Doctor's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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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데뷔 시절 (1)

    시간이란 물 흐르듯이 마디없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흘러만 가는 시간에 억지로 금을 긋고 한 시절의 끝과 새로운 시절의 시작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축하하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 시험에 합격한다고 갑자기 어느 순간에 어리어리하던 의과대학생이 유능하고 빠릿빠릿한 의사로 둔갑할 수는 없다. 어느 환자나 경험이 풍부하고 연륜이 있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를 원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다. 세상에 초보운전을 거치지 않고 능숙한 운전자가 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사가 되겠다는 어리석은(?) 꿈을 안고 막 임상에 나선 햇병아리 의사에게는 스스로조차도 자신감이 없으면서도 환자를 안심시켜야하고 신뢰를 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크나큰 짐이 된다. 그런 부담이 크면 클수록 어이없는 실수가 터져나오기 마련인 것이 누구나의 데뷔시절인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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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나를 살인자라 불렀다

    의사로서 내가 일해온 경험이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남아있는 기억들을 추스려 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고 그 중에는 대수롭지 않게 잊혀질 일들도 있고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도 있다. 나의 기억 속에는 즐거웠던 기억도 있지만 쓰라린 기억과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기억들도 남아 있다. 아니, 오히려 고통스럽고 괴로왔던 일들이 더욱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어쩐 일인지. 이제 나는 내가 만 4년 동안의 의사라는 직업의 경험 중 가장 어처구니없고, 가슴 아프고 괴로왔으며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그런 기억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 내가 나에게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멸을 철저하게 맛보게 해준 이런 진절머리나는 사건을 글로까지 남기려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웬지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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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정신 아닌 사람이 쓴 정신 나간 사람 이야기

    제목을 이렇게 붙혀놓고 보니 백일장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조태현님의 ‘정신 나간 여자와 제 정신이 아닌 여자’라는 글이 얼핏 생각이 나는데 이 글은 그 글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나 정신 나간 사람이 세상에 어디 한 둘이던가? 의과 대학에서의 생활이란 단조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계속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1, 2학년 때의 기초 의학 과정과 그 이후의 임상 실습의 과정이란 참으로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 임상에서는 환자를 직접 본다는 것이다. 환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고,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이야말로 임상 의학의 기본이라 할 것이다. 환자가 좀처럼 협조를 안해준다는 의미에서 소아과는 수의사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죄송!) 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무척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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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취과 이야기

    한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0년 8월 나는 마취과의 인턴으로 가게 되었다. 7월을 내과 중환자실에서 30일 간 계속 당직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보내었던 나는 그 감옥살이와도 같았던 중환자실에서의 근무를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뻐 날뛸 지경이었다. 몸도 마음도 한 달 동안의 고생 끝에 팍삭 삭어버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마침내 말년에 진정한 자유를 찾은 빠삐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취과에서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다소 긴장은 되었지만 지금까지 겪은 일에 어찌 비하랴! 마취과에서의 일에 대한 간단한 orientation이 끝나고 드디어 나는 감격스럽게도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세상에나! 이런 별천지가 밖에 있었다니! 한 달 간 거의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더니만 무슨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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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공에 대하여

    제목이 이상해서 이 글을 들추어보신 분들 중에는 이자가 그간 몇 편 시답지 않은 글 올리더니 이번엔 무협지를 연재하려는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지신 분들도 있겠지만, 나의 무협지 내공은 1갑자에도 못미치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니 애당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관련은 있겠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의사도 과학자라고 할 수 있을런지? 의학 지식의 창조자, 연구자로서의 의사는 분명 과학자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지식의 소비자로서의 역활, 즉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가로서의 의사는 단순히 과학자라고 단정짓기 힘든, 무척이나 복잡한 존재이다. 임상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 뿐이 아니다. 그들은 통계학, 생물학, 물리학, 화학, 사회학, 윤리학, 보건학, 그리고 건전한 상식(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것은 학문과 지식만은 아니다. 때로는 호신술이 필요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