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나를 살인자라 불렀다

의사로서 내가 일해온 경험이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남아있는 기억들을 추스려 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고 그 중에는 대수롭지 않게 잊혀질 일들도 있고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도 있다. 나의 기억 속에는 즐거웠던 기억도 있지만 쓰라린 기억과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기억들도 남아 있다. 아니, 오히려 고통스럽고 괴로왔던 일들이 더욱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어쩐 일인지.

이제 나는 내가 만 4년 동안의 의사라는 직업의 경험 중 가장 어처구니없고, 가슴 아프고 괴로왔으며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그런 기억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 내가 나에게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멸을 철저하게 맛보게 해준 이런 진절머리나는 사건을 글로까지 남기려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웬지 모를 ‘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것이 내내 나를 따라다녔었고 이제 나는 그 강박에서나마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1992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내과 전공의 2년차였고 짧은 경험이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보았다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었으며 환자에게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은 가지고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활기차게 일할 때였다. 당직을 서게 되었고 밤이 깊어갈 무렵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흉통을 호소하는 50대의 남자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였고 나를 부른 인턴의 표현에 의하면 좀 ‘심상치않은’ 심전도 소견을 보이는 환자였다.

즉시 응급실로 내려갔다. 흉통이 발생한지는 2시간쯤 되었었고 환자는 흉통을 호소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보였다. 통증도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어서 그의 부인과 함께 자기 발로 응급실에 스스로 걸어들어올 정도였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심전도 소견은 그저 보아넘길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전극 2, 3, aVF에서 ST분절의 뚜렷한 상승을 보이고 있었고 이는 하벽 심근경색의 전형적인 소견이었고 진단 자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심근경색이란 심장 자체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인 관상동맥이 막힘으로써 심장에 혈액 공급이 차단되어 그 부위의 심근이 죽어버리는 병으로 성인병인 동맥경화가 주원인이 된다. 급사할 수도 있는 심각한 병으로, 서구에서는 주요한 사망 원인이고 우리 나라에서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 번 죽어버린 심근은 되돌이킬 방법이 없으며 이로 인해 심장기능의 저하 등의 후유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환자는 즉시 중환자실로 입원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환자와 그의 부인에게 병명과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해 주었지만 워낙 환자가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지라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초조하였다. 지금 혈전으로 막혀있는 관상동맥을 혈전용해제를 투여하여 뚫어줄 수 있다면 죽어가는 심근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 간이 흐른 다음에는 어떤 방법도 죽어버린 심근을 되돌이킬 방법은 없는 것이다. 오래된 속담대로 ‘시간은 돈’ 이 아니라 ‘시간은 심장’ 인 것이다. 1분 1초라도 빨리 혈전용해제를 투입해야만 한다는 초조함에 나는 환 자 보호자를 몰아붙이다시피 설득했다. 그들은 약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워낙에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하자 결국 중환자실로 입원하게 되었다.

신속하게 혈전용해제인 유로키네이즈 (urokinase)가 투입되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투여한지 약 30-40분만에 환자의 가슴 통증은 완화되었고 심전도상 ST분절은 하강하여 정상수준까지 돌아왔다. 혈전으로 막혔던 관상동맥이 재관류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소견이다. 환자는 편안한 상태가 되었고 비로소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나에게 고맙다는 말까지 건넬 정도였다. 혈압이 150/90으로 약간 높았지만 심하지 않으므로 강압제인 베타차단제를 투여하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다시 혈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항응고제인 헤파린(heparin)이 투여되고 있었고 부정맥도 없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시간은 한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이제는 나도 잠을 좀 자도 될 것이다.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악몽을 꾼 것일까? 당직실에 잠을 자던 나의 옷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리고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온 전화였고 그 환자가 뭔가 이상하다는 담당 간호사의 연락이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불안감에 휩싸인 채 중환자실로 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환자의 상태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반 혼수상태였고 동공의 대광반사가 뚜렷치 않았으며 좌우 사지의 건반사의 차이를 보이면서 우측 상하지 모두 마비된 듯이 보였다. 나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그럴 리가… 뇌출혈을 강력하게 의심해야할 소견이다.

혈전용해제는 응고된 혈액을 녹이는 작용을 하는 약물로 부작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출혈이다. 하지만 뇌출혈이 생기는 일은 드문 일이다. 0.3% 확률의 부작용이 하필이면 내 환자에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15% 마니톨(mannitol)을 투여해서 출혈로 인해 상승되었을 뇌압을 낮추어주면서 호흡의 이상에 대비하여 인공호흡기를 준비시키고 출혈을 확인하기 위해 뇌의 전산화 단층촬영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환자의 가족들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중환자실 밖의 보호자 대기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던 환자의 가족들을 불러 깨워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은 완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전산화 단층촬영을 위해 방사선과로 옮겨지는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것을 보고는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하였다. 3시 40분 경, 나는 환자의 단층촬영 필름을 받아들었고 필름 뷰어(viewer)에 사진을 거는 나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맙소사… 빌어먹을… 나는 주저앉고 싶었다. 엄청나게 큰 혈종이 좌측 담창구(淡蒼球, globus pallidus; 뇌의 한 부위에 대한 신경해부학적 명칭)에 자리잡고 있었다.

환자의 의식은 점점 나빠져서 마침내는 완전한 혼수상태에 빠졌고 호흡도 거칠어져 갔다. 새벽이 되었고 환자의 상태는 악화일로였다. 가족들에게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거의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도 역시 이것이 악몽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그 날 오후,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환자는 사망하고 말았다. 멀쩡히 걸어들어온 사람이 하루도 채 안되어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었던가? 아니다. 최소한 나는 의학적으로는 아무런 잘못한 일이 없었다. 혈전용해제를 투여하기로 결정한 일도, 그 과정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독한 일이 일어난 것이고 돌이킬 수도 절대로 없는 것이었다.

다음 날, 가족들은 나를 찾아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슬픔에 차 있었고, 그 다음에는 분노에 차 있었다. 나는 내가 판단하고 치료한 일에는 잘못이 없음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물었다. 그럼, 그 환자에게 약을 주지 않았으면 그 환자가 죽었겠느냐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내 멱살만 잡지 않았을 뿐, 나를 두들겨패서 죽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속으로는 나를 살인자라고 백번은 불렀겠지. 나를 더욱 더 참담하게 한 것은 내가 아무리 설명하고 이야기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세상의 어떤 의사에게도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환자가 들어와 약을 쓴 다음, 순식간에 죽어버렸다면 그 보호자들에게 이건 의사의 잘못이 아니며 예측할 수 없었던 약물의 부작용이라고, 단지 운이 지독히도 나빴을 뿐이라고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사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었으니까. 그놈의 빌어먹을 ‘유감이다’라는 ‘외교적’ 발언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건가?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 환자의 보호자들은 나를 협박하지도, 소송을 걸지도, 배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점잖게 물러갔다. 그 점에 대해서 내가 그들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할까? 아마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와 나라는 인간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남아있으리라. 멀쩡한 사람을 순식간에 죽여 놓고도 의사라는 위치와 지식을 이용하여 잘못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면허있는 날강도로 나를 기억할 것이다.

이 빌어먹을 의사라는 직업은 나에게 먹고 살 월급을 주고, 기쁨과 보람을 주고, 살아 갈 의미를 주고, 그리고 절망과 삶에 대한 지독스런 환멸과 어두운 좌절과 참담한 오욕을 준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일을 한다. 그리고 내일 또 다시 살인자라고 불리게 될지 모른다. 그 때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그저 하나의 몸서리쳐지는 악몽인 것일까?

몇 마디 말로 되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이런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뒤늦게나마, 내가 잘못했건 아니 건간에 나에게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나신 그 환자 분의 명복을 빈다.

199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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