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병동에서

서울 시내에 있는 모 병원의 ‘114’라는 번호가 붙어 있는 병동은 필자가 내과 레지던트 1 년차로서 첫 한 달을 보내었던 병동이다. 114라는 숫자는 좀 특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백십사’ 병동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하지만, 자주 그 별칭인 ‘텍사스’ 병동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불렸던 것은 발음이 묘하게 유사해서 그렇기도 하고, 거칠고 험하고 황량한 그 어감 그대로 중환(重患)들이 득시글대고 있는 주치의들의 무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중환만 모아 놓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째 그 당시에 그랬다. 중환이 상태가 나빠지는데는 때가 따로 없는 법이라 밤에 사망하는 일이 많고, 밤에 입원실이 비어 있으면 응급실에 기다리고 있던 중환자가 제깍 다시 자리를 메우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되다보면 유달리 특정 병동에

청평에서의 단상

나카하라여 지구는 겨울이라 춥고 어둡네. 그럼 안녕히 – ‘공간’, 구사노 심페이 (草野心平) 무진장 목이 말랐다. 물주전자를 통째로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는데도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계속 괴로워하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헌데 실제로 정말 목이 말랐던 것이다. 더듬더듬 주변을 더듬어 물주전자를 찾아 이번엔 진짜로 벌컥벌컥 마셨다. 옆자리에선 누군가 코를 골면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골치가 약간 띵해 오면서 어제의 기억들이 살아난다. 10월로서 병원에서 전공의로서의 나의 근무는 끝이 났다. 지금부터 1월까지는 그저 전문의 시험 준비를 위하여 공부만 들입다 하는 기간이 될 것이고 무척이나 즐거운 것은 그래도 월급은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병원이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외친다면 나도 그럼 법대로 하자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

나는 배달의 기수(?)다

낫살도 몇 먹지 않은 주제에 이런 소리하면 좀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란 나이를 먹어가면 먹어갈 수록 ‘왜’, ‘어째서’ 라는 질문을 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아이에서부터 어른이 되어가고, 마침내는 어른이 되는 지경을 넘어 늙어가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 무렵이 되면 (하지만 나는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떨어져 나가도록 머리를 흔들며 부정하려고 애쓴다. 내친 김에 얘기지만 나이 30이 뭐가 많단 말인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는 경우의 가지 수는 늘어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경우는 무척 줄어든다. 아예 그런 생각을 할 마음조차 먹지를 않는다. 그리곤 생각한다. ‘음… 난 역시 현명해…’ 보다 완벽한 바보가

나의 데뷔 시절 (2)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은 정녕 헛된 것인지. 시험이란 마물은 참으로 죽어라고 우리를 따라다닌다. 졸업을 해서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렸다고 해서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언젠가 썼듯이 고달픈 인턴 생활의 몇 가지 안되는 낙 중의 하나를 들라면 학생 시절의 그 지긋지긋하던 시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예 생활(?) 속의 작은 위안(?)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1년이란 세월은 얼마나 허망하게도 지나가 버리는 것인지. 슬슬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서 인턴들의 마음은 바빠졌다. 레지던트 선발 시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살 길을 찾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면서 몸도 마음도 황망하다. 뭔가를 선택한다는 일은 경중의

너 왜 사니?

“너 왜 사니?” 그것이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어리벙벙하던 의예과 1학년 초에 나의 학우가 어느 날 갑자기 강의시간에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특별히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친해질 기회도 아직 없었다. 헌데 느닷없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는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그런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는 나 자신이 순간 한심하게 느껴졌다. “너는 왜 산다고 생각하냐고?” 그가 대답을 재촉하였다. 나는 정말로 대답할 말이 궁했다. “죽지 못해서 살지, 뭐…” 나의 맥없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는 무척 경멸스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한심스럽다는 투로 내뱉었다. “아니, 네가 왜 사는 지도 모르고 산단 말야? 죽지 못해서 산다는 게 말이 되니? 너 정말 엄청난 패배주의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