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8)

참으로, 정말로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다. 여러 가지로 여유가 없었는데, 지금부터 그 여유가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해 쓰려고 한다. 제목이 여전히 결혼기(結婚記)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대로 쓰려고 한다.

하도 오랫만에 시리즈를 이어가니 TV 시리즈 같은데서 흔히 하는 대로 지난 줄거리, 뭐 그런 비슷한 것을 앞에 좀 써야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필자와 Y가 아이를 가지기로 했고 결국 그에 성공하여 아빠와 엄마가 될 예정이었다는데 까지이다.

 

임신 기간 내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Y에게 했던 얘기가 ‘좋겠다. 의사가 옆에 있으니 무슨 걱정이냐’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필자는 산부인과에 그다지 자신이 없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의과 대학생 시절부터 죽 이어져 오는 상황인지라, ‘어떻게 의사가 아는 게 하나도 없어!’하는 Y의 개탄을 들어야만 했다. 쯔쯔….

그래서 Y는 아예 자기가 공부를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는지 학구열을 불태운 나머지 필자를 능가할 정도로 유식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입덧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엔간히 먹을 것 챙겨 먹을 정도로 먹을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거저 지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연속극에 흔히 나오는 대로 한밤중에 난데없이 딸기가 먹고 싶다느니 해서 밤거리를 헤메고 다녀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낮에는 그런대로 지내는 편인데 밤이 되면 속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뛰어나가서는 화장실에서 웩웩거리는 Y의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그래도 남편된 도리로 그냥 놔둘 수 없고, 쫓아 나가서 Y의 등을 두들겨 주는 게 – 반쯤 졸면서 – 필자가 해주는 일의 전부였다. (그래도 명색이 의산데… 쩝….)

Y가 억울해 하는 점은 왜 낮에는 멀쩡해 가지고 사람들의 동정(?)도 못 사고 밤만 되면 고생하느냐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그만큼 늠름하니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육아기는 임신을 알게 된 후로부터 해서 태동을 느끼고 초음파로 모습을 보고 결국 정말 애기를 낳아서 실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의 희열과 감동을 마르고 닳도록 묘사하고 있지만, 필자나 Y는 사실 그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감동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듯 싶다.

태동은 필자는 거의 느끼기 힘들고 Y만 느낄 수 있을 정도에서 시작해서 점점 강해져 배를 뻥뻥 차는 수준까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필자가 아침거리로 접시에 콘플레이크를 붓는데 그 드르륵거리는 소리에 뱃속의 아기가 꿈틀하는 웃기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후로 이따금씩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틀림없이 골때리는 애기가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빠를 닮아서 먹을 걸 상당히 밝히는 놈(년?)일지도 모르지.

 

예정일이 거의 다 되어가자 고민거리 한가지가 생겼는데, 이름을 뭐라고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성별을 미리 알게 되어 (의사라는 필자의 신분을 약간 남용?) 아들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 정도만 고민하면 되었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성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필자나 Y나 딸․아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거의 막달이 되어서 필자의 아버지에게 아들이라고 귀띔을 해 드리자, “그래? 그럼 이름을 지어야겠구나.” 하시는데, 좋아하시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필자는 아버지가 무척 진보적인 분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 세대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배신감이 느껴졌다.

 

세상에 한자가 많고 많은데 이름에 쓸 글자라는 것이 참 몇 자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으로 이리저리 고민을 좀 해보다가 결국에는 옥편을 사서 Y와 함께 본격적인 고민에 들어갔다. Y의 선배 중 한 사람이 해봤다는 얘기를 듣고 장난 삼아 가능한 모든 이름을 다 찍어보기로 했다. 혹시 애기 이름 짓는데 고민하고 계시는 독자라면 그냥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시간 있을 때 장난 삼아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

Excel 등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인데, 가로축에 일단 마음에 들고 이름에 쓸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글자를 죽 적어 넣고 이를 세로축에 복사해서 갖다 붙이고 (엔간하면 다 아시겠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하자면, copy한 다음 선택하여 붙이기 중에서 열과 행 바꿈 option을 주면 됨.) 교차되는 칸에 이 두 글자를 이어 붙이도록 수식을 입력하면 되는데 지면상 구체적인 방법은 생략하겠다. (혹시나 정말로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실 경우에 연락주시면 보내드릴 용의 있음.)

그 결과는 정말로 골때리는 것으로, 프린트하니 스무 장도 넘게 나왔는데 95% 가량이 말도 안 되는 이름이었다. 참 세상에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Y와 함께 들여다보며 한참을 배꼽 빠지게 웃을 수 있었다.

 

헌데, 필자와 Y가 이렇게 헤메고 있을 때, 필자의 아버지 역시 엄청난 고민 끝에 몇몇 이름을 지으셨는데, 돌림자를 따르기를 강력히 주장하고 계셨다. 필자는 사실 속으로는 돌림자를 따르지 않으려고 했었다. 필자 자신의 이름도 돌림자를 따르지 않았는데, 필자는 이 이름을 무척 좋아하고 대단히 만족한다. 필자가 약간 삐딱해서 그런지 기존의 형식과 관습에서 일탈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통쾌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또한 필자는 전화번호부를 비롯하여 그 어디에서도 동명이인을 본 적이 없다. 돌림자를 따른다면 동명이인이 있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필자가 그런 뜻을 살짝 비추자 아버지는 겉으로는 내색 안 하셨지만 상당히 위기감(?)을 느끼셨는지, 돌림자를 따르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필자에게 파격적인(?) 이름을 지어주셨던 아버지가 이제는 필자의 아들에게는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이름을 지으려고 하시다니!

애기를 낳은 직후의 일이었는데, 아버지는 필자에게 몇 가지 후보 이름을 적은 종이를 주셨는데, ‘지동이 돌림자를 따르지 않아 돌림자를 따를 것을 고집’이라고 메모가 되어 있었다. ‘아, 이것도 얘의 팔자일지 모르겠구나. 하는 수 없다’하는 생각이 들어 필자의 생각은 접고 아버지가 지으신 이름 중 하나를 골랐다. 지어 놓고 불러 보니 괜찮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지금 보니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필자의 이니셜인 J와 필자의 아내 이니셜 Y를 하나 씩 딴 셈이 되었다. JY.

 

하여간에 시간이 자꾸만 가서 예정일을 넘겼다. 초산이라 좀 늦게 나오려니 하기는 했는데 어느새 1주일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Y가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슬도 비쳤다고 한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남들은 의사가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지만 이 순간에야 필자가 무슨 의사이겠는가. 그저 불안한 예비 애 아빠일 뿐이었다.

조금 기다리면서 통증의 시간 간격을 재어 보니 조금 오락가락하기는 하지만 비교적 규칙적인 것 같아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Y는 아직 매우 늠름한 상태였다. 짐을 얼추 챙겨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아파트 같은 줄에 사는 어느 아주머니가 쓱 보고 “어머, 이제 거의 낳을 때 다 됐겠네요.” 하더니만 다시 보니 어쩐지 짐을 잔뜩 들고 있는 행색이 심상치 않았던지 “아니, 혹시…” 하는 것이었다. Y가 “네, 낳으러 가는 길이에요.” 했더니만, 다시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제왕절개 하시나보죠?” “아니에요, 배가 아파서 병원 가는 거예요.” “거의 배 아파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가는 거라든데….” Y가 너무 멀쩡해 보였나보다.

 

차를 타고 가는데 한참 동안 배가 아프지 않아서 다시 긴가민가 고민에 빠졌는데, 그러는 동안 병원에 도착하여 진찰을 받았지만, 전혀 열리지 않은 상태이니 가진통일 가능성이 많아 집에 가서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뒤에 보니 완전한 오판이었다. 그 때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던 산부인과 레지던트 선생을 가끔 복도에서 보는데 어째 쑥스러워 하면서 필자를 피하는 것 같다.)

 

집에 오는 길에도 이따금씩 배가 아팠고, 점심 때가 다 되었으나 밥은 못 먹겠다고 하여 집 앞 제과점에서 팥빙수를 사서 같이 먹었는데 왜 그랬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맛이 있었다.

그러고는 긴장이 좀 풀렸는지 노곤하여 같이 낮잠에 떨어졌는데 Y는 잠결에 배가 아파하면서도 잠에 취해 일어나지를 못 했다. 그런 와중에 저녁때가 되니 아픈 게 서서히 장난이 아닌 수준이 되어갔고, 이건 가짜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가진통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아프면 뭔가 어떻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다시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는데, 시시각각으로 아픈 것이 심해져서 이젠 완연한 진통이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50%가 열렸는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냐고 한다. 나, 이런, 전혀 아니라고 할 땐 언제구. 이젠 배 아픈 게 완전 장난이 아니었다. 미리 계획했었던 대로 서둘러 무통분만을 위해 경막외 마취를 서둘렀는데, 일껏 준비를 다 해놓고 보니 그 사이에 다 열려 버려서 이젠 할 수가 없단다. 뭐, 되는 일이 없구먼, 이거.

그 와중에 입원 수속을 하러 병동에 올라갔더니 산부인과 병동은 다 차서 다른 과 병동에 들어가야 했는데, 그 병동 간호사가 챠트에 끼워 넣을 서식이 없다면서 여기 저기 전화를 걸면서 시간을 축내는 것이었다. 짜증은 났지만 교양있게 참았다. 이럴 땐 의사인 게 더 힘들다. 다 아는 처지에 화가 나도 화도 못 내고 조바심이 나도 재촉하기도 그렇고.

 

다시 분만실로 내려와보니 본격적으로 힘을 주고 있었다. 좀 있으니 분만대로 옮기자고 한다. 자정이 가까와져 있었다. 아빠가 되는 게 뭐 어떤 건지 마음의 준비가 된 건지 뭔지 아직 실감이 전혀 안 나는데. 하여간에 Y는 분만대 위에 올라갔고 보통의 남편들이라면 (지금까지 같이 있었다 하더라도) 밖으로 쫓겨나겠지만 필자는 의사인 점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덧가운을 입고 끝까지 따라 들어갔다. (남편을 분만에 참여시키는 병원들도 마지막 출산 장면에서는 대개 남편을 내보낸다고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번의 힘주기 끝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애기가 나왔다. 버둥거리며 생애 첫 오줌을 찍 갈기고는 앙앙거리는 애기를 보니, 순간, 아, 이젠 정말 애를 낳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무슨 특별한 감격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다만, 이젠 모든 것이 정말 크게 달라진 것, 그리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어떤 세상인지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지만)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애기가 한쪽 눈은 감고 한쪽은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는데, 필자가 임신 중에 필자에게 무슨 얘기를 시키려고 할 때 (Y는 필자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해내라며 떼를 쓰는 습관(?)이 있다.) “궁금한 거 참으면 애가 짝눈된대” 하며 협박(?)하던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산모와 애기 모두 건강했다.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만큼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정상이란 매우 특별한 것이다. 1999년 5월 13일, 자정을 40분쯤 넘겼을 때의 일이었다.

 

  1. 8. 15.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