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도하부괄약근에 대한 고찰

의사들이란 족속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폭이 좁은 경우가 많아서 주로 접촉하는 사람은 (환자들을 제외한다면) 같은 동료 의사 내지는 의료 관계 종사자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의사 내지는 그 비슷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는 화제의 빈곤을 경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쎄, 필자의 경우를 너무 확대하여 의사들 전체를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필자 역시 비록 발이 특별히 넓은 사람도 아니고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경우를 만드는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혹시나 그런 경우가 생기면 비의료인들이 의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탐지해보려고 속으로 애쓰는 편이다.

많지 않은 기회나마 의사의 실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접해서 얘기를 들어보면 의사라는 집단의 속성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일수록 의사에 대해서 완고한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거기에 대해서 장황하게 논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 스테레오타입의 일부로 되어 있는 한가지 속성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그 특성이란, 의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고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술을 엄청 퍼마신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의사 내지는 의료인이 얼마나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스테레오타입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의사는 과연 술을 많이 마시는가? 필자가 아무리 연구열에 불탄다 한들, 의사와 비의사의 음주량에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역학 조사를 시도할 생각은 없다. (혹시 이 문제에 대한 기존 연구 결과에 대해 문헌 고찰을 해본 경험이 있으신 분은 의견 개진을 바란다?!) 분명, 의사들 중 일부는 꽤 많은 량의 에탄올을 정기적으로 섭취(복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의사가 그러한 것도 분명히 아니다. 필자는 이 사회에서 의사가 특별히 술을 많이 먹는 집단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우리 나라의 술을 권하는 독특한 문화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싫다는 사람에게도 억지로 술을 먹이고 싫다는 사람도 억지로 차수를 증가시키는 데에 동참시킨다. 해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마다 한두 명씩 어이없는 희생자를 내고 있는데도 이런 미풍양속(?)은 없어질 줄을 모른다.

또, 술자리에서 술을 먹이기 위한 가지각색의 희한한 방법들이 고안되어 이용되고 있다.

젓가락을 사이에 놓고 소주잔으로 삼층탑을 쌓아서 위로부터 술을 따르면 술이 넘쳐서 차례로 아래까지 석 잔이 모두 차는 삼배주란 것이 있다. 굉장히 고전적인 것인데, 필자가 신입생 환영회 때 마셨던 기억이 난다. 선배가 한잔을 드시는 동안 신입생 후배가 석잔을 들이키는 것이다. 뭐 사발에다가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는 사발주에 비하면 거의 장난이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폭탄주야 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원자폭탄도 모자라서 수소폭탄까지 등장하여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혹자는 맥주에 소주 뇌관을 넣은 폭탄주가 고소하고 맛있다고도 하는데, 필자가 굉장히 싫어하는 종목이다. ‘회오리주’라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 술잔 속의 토네이도를 만드는 것도 있고, ‘XX 종합주’라 하여 특정 주류회사에서 나온 모든 술을 한꺼번에 넣고 마시는 것도 있다. 위스키에 불을 붙여 놓고 홀랑 입안에 털어 넣는 ‘화주’는 혹여 입술이라도 델까봐 긴장하는 통에 술이 좀 덜 취하는 장점(?)이 있다.

두 팀을 갈라서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편 끝까지 ‘원샷의 물결’을 이어 달려 어느 편이 빠른지 겨루는 ‘파노라마’는 우리 고유의 미덕인 협동 정신을 한껏 고취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맥주 잔에 소주잔을 띄워 놓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양주(또는 뭐라도 상관없겠지만)를 조금씩 따르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데 그러다가 소주잔이 침몰하면 그때 붙잡고 있던 사람이 잔을 비우는 ’타이타닉‘이라는 비정한 게임도 있는데, 한 방울만 떨어뜨리려고 바들바들 떠는 사람에서부터 다음 사람 먹이겠다고 왕창 따르다가 자기가 가라앉히는 경우까지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골프를 시뮬레이션(?)하는 골프주던가 뭔가 이름이 잘 기억 안 나는 것도 있는데, 폭탄주를 만들어서는 (실력, 아니 주력이 좀 떨어지는 경우에는 그냥 맥주로 할 수도 있겠다.) ‘원샷’으로 먹는데 마실 때 꿀꺽거리느라고 목젖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수를 세어서 규정타수(par 4 로 하던가?)보다 하나 작으면 버디, 둘 작으면 이글, 물론 한번에 주~욱 들이키면 홀인원, 하나 많으면 보기 등등이 된다. 복잡한 게임룰이 성가시면 그냥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을 먹이면 간단하다.

이러고 저러고 다 귀찮으면 그냥 먹고 죽자고 마구 마시는 것이 최고다. 고도리 방향, 반 고도리 방향, 지그재그로, 기타 아무렇게나 마시고 꼴리는대로 잔을 돌리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용량을 초과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긴다. 오바이트라는 단어는 분명 토한다는 뜻이 아니고 ‘과식하다’라는 뜻이지만 많이 먹고서 토하는 것이니 이 경우만큼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괴상한 생각도 든다. 혹시나 세월이 가면 국어사전(아니면 영한사전?)에도 나오게 될지 아는가. (국어사전에서 ‘가든’이라는 단어에 고기 구어 먹는 음식점이라는 뜻이 드디어 추가되었다고 하던데…) 괴롭게 나중에 꺼내 놓느니 미리 미리 꺼내 놓는 선견지명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많다. 선천적인 재능인지 후천적인 피나는 수련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수월하고 유연한 동작으로 방금 들어갔던 술을 완벽하게 반납하는 재주를 지닌 고수들을 보게 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필자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LES(Lower esophageal sphincter; 식도 하부 괄약근)은 voluntary muscle(수의근)이야.“

(혹시 의사가 아니신 독자라면 이해하기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별로 식욕 돋구는 내용은 아닌 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굳이 각주까지 달지는 않겠다.)

주절주절 써 놓고 보니 참 뭐하는 X랄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거나 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의사들만 이러고 노는 건지, 남들도 이러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역시 의견 개진 부탁드린다.) 왜? 뭐가 어때서? 분위기 좋~챦아? 이렇게 얘기할 분들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술 마시는 게 그렇게도 재미있는 일일까? 술을 마시면 정말 스트레스가 풀릴까? 필자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고 (그것도 적지 아니하게) 특별히 종교적이라든지 기타 이유로 술 마시는 건 죄악이라는 터무니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며 술이란 것의 효용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서 술이란 것은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고 있고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그건 술의 잘못이 아니라 그 술을 마시는 인간의 잘못인 것이다.

우리에게 그토록 술을 엄청 마시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뇌를 풀어보겠다는 처절한 사연이라든가, 하다 못해 실연의 아픔이라든가(하다 못해?라고 할 수는 없지?), 더러븐 세상 술 먹는 것밖에 낙이 없어서라는 불쌍한 이유라기 보다는 많은 경우는 ‘조직의 힘’이다. 조직이란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하고, 일을 같이 할 뿐 아니라 사생활이고 뭐고 다 제끼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놀 때도 같이 엉겨서 놀아야 하고, 그러니 술을 먹고 뻗어도 같이 뻗어야 하는 것이다. 다같이 먹는 술자리에 빠질 순 없다. 빼는 놈은 반역자다! 주량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각자 최선을 다해서 모두 같이 주량껏 먹고 모두 같이 장렬하게 전사하자! 그리고, 산자여 따르라!

혹시나 필자가 이런 삐딱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다음 번 회식 자리에서 좀 더 많은 공격(?)을 받을 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술맛 떨어지는 놈이라고 아예 술을 안 줄지도 모르겠지만, (술자리에서 정신이 말똥말똥한 것도 생각보다 꽤 괴로운 일이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뭐 어찌 보면 그렇게 함께 진탕 마시고 엉겨보는 기회를 가끔이라도 가지는 것이 썰렁하게 잔 앞에 두고 제사만 지내다가 술자리를 파하는 것보다 백배 분위기가 좋지 않느냐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어째 슬슬 몸도 예전같지 않아서 한번 마셨다 하면 일주일 내내 몽롱한 가운데 헤메이는 이 체력 약한 필자는 술자리라는 것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요즘 와서는 특히 전자가 절실!) 좀 더 부담 없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혹시는 필자가 좀 더 나이를 먹어 밑에 ‘애들 몇’ 거느리는 처지가 되면 (무슨 조폭 같구먼) 이런 생각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열심히 술을 먹여 아랫것들 취해서 해롱대는 꼴을 보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부담 없이 마시거나 또는 안 마실 수 있고, 또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오늘 집에 제사라느니 하는 요상한 핑계를 대고 않고도 그냥 ‘오늘은 별로 마시고 싶지 않다’는 한마디로 자리를 빠져도 ‘조직의 배신자’가 되지 않는 그런 분위기를 원하는 것이 필자만의 바램일까? 혹시나 필자의 정신 상태가 글러먹은 것일까?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필자의 아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 너머로 글을 검열(?)하더니만 내지르는 일성,

“아니, 이러고 노느라고 늦게 왔단 말야?”

하여간에, 술, 적당히 마십시다.

1999. 8. 11.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