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자(사람)친구 = 술친구?

세월이란 빠르게도 흘러가고 사람들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추억이란 무엇일까? 추억이라 불리우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난 시간들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지난 날 나를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저 희미하고 아련한 기억만으로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고 여전히 나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나에게 많은 감흥과 참으로 삶이란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흐뭇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그들이 옛날의 신선하고 활기찬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이다. 사람이란 오랜 세월을 살면 살수록 세상의 때가 묻고 거친 바람의 풍화작용으로 맨질맨질하게 되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언제 보아도 그대로인 것만 같은 모습 – 비록 겉모습은 조금 달려졌을지라도 – 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즐거움인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대개는 술 한두잔쯤 걸치고 시답지 않은 개똥 철학을 주절이 주절이 풀어놓을 때) 남녀간에 우정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지만 나는 그것은 무척이나 쓸데없는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고 필요로 한다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약간 다른 표현방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필자에게는 몇명의 여자 친구들이 있다. 타고난 성격이 조금은 차갑고 냉랭하고, 또 그 얼마 안되는 감정이나마 따뜻하게 표현해내는데 서투른 나이지만 친구 복은 있는 것인지, 나의 주변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나는 그런 관계라는 것에 있어 남녀를 구별지을 필요를 느낀 적은 없었다.

학생 시절, 한 동아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끈끈하고 정이 풍부한 관계보다는 감정에 치우치지않고, 조금은 표면적이고 가식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 이미 익숙해져가고 있는 나였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무척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곧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었고 본의 아니게 동아리의 감투도 쓰고 어쩌고 하다보니 이 사람 저 사람과의 기억할만한 추억거리들도 어느덧 쌓이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에 남고, 또 그들 중 지금도 가끔은 만나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나의 한 여자 (사람)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P를 처음 본 것은 동아리에 처음 가입하자마자였다. 그녀는 4학년으로 동아리의 고참이었다. 나는 2학년이었고 그녀와 나는 학번은 같지만 오히려 그녀가 나보다 2살이 많았다. (뭐가 이리 복잡한가?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있는 지 없는 지 도대체 알수 없을 정도인 사람에서부터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의 사람까지 있는 법인데, 그녀는 단연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항상 활기차고 항상 뚜렷한 주관이 있었고 모두를 이끄는 힘이 있었다.

동아리의 모든 회원들이 여름에 해변으로 놀러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서먹서먹하게만 느껴지는 동아리의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 것인가 고민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만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먼저 말을 걸고 스스럼없이 친한 척을 하였고 특히 나처럼 어색한 분위기로 똥폼 잡고 있는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지 못 하는 것이었다. 해변에서 ‘살인 배구’를 하게 되었다. 필자가 운동에 영 소질이 없다는 것을 다른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익히 잘 알고 계시겠지만 살인 배구 역시 영 취미가 없는 운동이다. 게다가 뻔히 얼굴 서로 보면서 거기다 대고 냅다 스파이크를 갈겨야하는 비인간적(?)인 게임을 왜 그리들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인지. 마음이 약한 나는 감히 강타를 먹이지 못하는데 그녀는 도대체 인정사정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 면상을 강타하였고 (물론 공으로) 나의 안경은 알이 빠진 채 휙하니 날아가버렸다. 졸지에 눈 뜬 장님이 되 버린 나는 모래바닥 위를 네발로 기면서 헤메었는데 잘 안 보이는 눈으로 보기에도 그녀는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안경을 끼는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한번 빠져버린 안경알을 아무런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다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내 눈깔 돌리도!” 했고 그녀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알았어! 껴주면 될 꺼 아냐!” 안경을 들고 한참을 안쓰러울 정도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낑낑댄 끝에 결국 그녀는 안경알을 끼워 넣는데 성공하였고 나에게 광명을 (?) 다시 찾아주었다. “미안하다, 얘!” 하고 활짝 웃으면서. ‘천만에.’ 나는 속으로만 말했을 뿐이다.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내가 속해 있었던 동아리의 사람들은 주로 야만스럽고 반문명적인(?) 게임을 골라서 즐기는 취미가 있는지라 밤이 되자 그 유명한 ‘품바 게임’이란 것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도대체가 게임이라고도 할 수 없는, 머리 쓸 필요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단지 인간의 공격 본능, 또는 새도매저키즘을 만족시켜줄 뿐인 원초적인 게임이었다. (음… 이쯤 해두자.)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약간의 해설을 붙이자면, 규칙은 지극히 간단한 것으로서, 둥글게 죽 둘러앉아서는 한사람이 느닷없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은 ‘품!’ 하면서 좌우에 앉은 사람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주로 넓적다리 등등) 그러면 좌우의 사람들도 질세라 ‘파!’ 하면서 역시 신나게 두들겨패게 되는데 이는 가운데 앉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계속된다. 이름을 부르면 똑같은 일이 계속된다. (이게 무슨 게임이야?) 푹팍푹팍, 우악, 꺅, 사람 아니 짐승 살려… 두들겨 패는 소리에다 비명소리가 겹쳐져 거의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는데, 내가 이 게임에서 그녀의 옆에 앉게 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거의 정신이 번쩍나고 눈앞에서 불똥이 튈 것만 같은 그녀의 가공할 펀치는 나의 빈약한 맷집으로는 거의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사각의 링은 좁고 숨을 곳이란 없는 법! 거의 악만 남은 나도 분노의 화신이 되어 맞받아 쳤지만 펀치력마저도 딸리니, 이거야 원… 광란의 밤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드디어 내 몸이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쑤시고 아프지 않은 데라고는 머리카락밖에 없으니… 게다가 간밤에 그녀의 집중공격을 받은 넓적다리에는 엄청나게 큰 멍이 들어있었다. ‘흑흑… 어머니에게도 안 맞고 자란 난데…’ 그리하여 그 이후로 내내 찜통 더위에도 반바지를 입지 못 하였던 사연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다음 날 밤, 주량이라면 나도 남부러울 것이 없다는 섣부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원샷!’을 외칠 때에도 그다지 겁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웬걸, 얼마 뒤에 나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해롱해롱대고 있었고 그녀는 뭐가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두 발이 아니라 네 발로 기어서. 그때 비겁하게 도망치치 않았던들 나는 낯설은 타향의 하늘 아래서 장렬히 전사하고야 말았으리라. 그 뒤에 그녀와 한잔 할 때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심심챦게 기회가 있었다.) 지극히 조심하여 완전히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녀라고 술에 장사는 아니어서 마시다 보니 역시 한계가 드러나는 적도 있었다. 헌데 그녀는 한 번 맛이 가버리면(?) 도저히 회복 불능인데다 ‘어… 추워…’하면서 덜덜 떠는데 그 모습이 그냥 놔뒀다간 거의 얼어죽을 것만 같은 모습이어서 엄동설한이고 뭐고 누군가 입은 걸 벗어서 덮어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세월은 흘렀고 그녀가 먼저, 그리고 나는 2년 뒤에 졸업을 하였고 전해져 오는 그녀의 소식만 들었고 한참을 보지 못하였다. 결혼하고 애 엄마가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 후, 이제는 선배의 자격으로 목에 힘주고 참석한 동아리의 한 행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본 때로부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인 8년이 흘렀을 때의 일이다. 30줄에 확실하게 접어든 아줌마에다 애 엄마 티가 팍팍 풍기는 그녀를 상상하고 있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내가 보기엔 옛모습 그대로였다. 활기차고 스스럼없는 그 모습은 잠시 세월의 흐름을 잊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재학생 후배들이 선배들을 즐겁게 해준답시고 게임을 준비했는데 (어휴! 또 게임이야…) 그녀와 나는 벌칙에 걸렸고 그 벌칙이란 것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업고서 돈 구걸해오기’였다. 나는 당연히 내가 그녀를 업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등을 돌리더니 씽긋 웃으면서 어부~바 하는 것이 아닌가! 하하… 그래, 그렇지, 이래야 말이 되지… 나는 달랑 업혔고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대굴대굴 구르면서 즐거워했다. 그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눈가에 생긴 희미한 잔주름과 옛날에 비해서는 좀 주량이 줄어든 것 같다는 사실만이 지나버린 세월에 대한 아련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 줄뿐이었다.

무척이나 대가 센 여장부 스타일의 그녀이길래 남편을 완전히 꽉 잡고 살려니 하는 나의 막연한 생각은 아무래도 전혀 잘못된 것인가보다. 아마도 짐작컨대는 그녀는 지성으로 남편을 위해주는 현모양처가 아닐까 한다. 확실히 그녀의 남편은 행운아다!

항상 찐한 사랑과 우정을 아낌없이, 넘치도록 베풀어주었던 그녀는 분명히 나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난날의 추억의 한 구석을 오래도록 지키고 있으리라. 내가 남녀간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그녀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변함없는, 좋은 술친구(?)니까.


199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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