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병동에서

서울 시내에 있는 모 병원의 ‘114’라는 번호가 붙어 있는 병동은 필자가 내과 레지던트 1 년차로서 첫 한 달을 보내었던 병동이다. 114라는 숫자는 좀 특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백십사’ 병동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하지만, 자주 그 별칭인 ‘텍사스’ 병동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불렸던 것은 발음이 묘하게 유사해서 그렇기도 하고, 거칠고 험하고 황량한 그 어감 그대로 중환(重患)들이 득시글대고 있는 주치의들의 무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중환만 모아 놓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째 그 당시에 그랬다. 중환이 상태가 나빠지는데는 때가 따로 없는 법이라 밤에 사망하는 일이 많고, 밤에 입원실이 비어 있으면 응급실에 기다리고 있던 중환자가 제깍 다시 자리를 메우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되다보면 유달리 특정 병동에 중환자들이 모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때 114 병동이 그러하였다.

이곳에는 당시 병원 안에 유일하게 있었던 9 인실이 있었고, 그 환자들이 바글거리는 병실에 들어설라치면 먼지 바람 몰아치는 텍사스 벌판에 홀로 선 총잡이라도 된 듯, 어디선가 총알이라도 날아올 것만 같은 긴장감과 함께 한없는 고독감(?)이 밀려왔던 것을 기억한다. 서부극 총잡이들이 입는 폼나는 코트 대신 제때 세탁 못해 지저분한데다가 권총…이 아니라 청진기에서부터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서 볼품없이 주머니가 늘어진 가운을 펄럭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9 인실에서 간경변 환자 세 명이 거의 동시에 토혈을 하여 아수라장이 되었던 악몽 같은 일도 있었다. 아, 참 험하디 험한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라는 것은 사람의 기억에 대해서는 거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고, 참으로 그 위력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엔간한 것들은 다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 당시에는 그토록 격렬한 감정을 일으켰던 일들도 훗날 뒤돌아보면 ‘내가 그때 왜 그랬었나?’하는 생각에 의아해 하게끔 만드는 법이다. 하지만,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필자는 그때의 한 환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참담함에 눈물이 솟아오를 것만 같은 감정에 젖는다.

이제 그 환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녀는 50대의 말기의 담낭암 환자로 한마디로 대책이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였다. 가족들도 참으로 조용하게 이 힘든 시련을 견디어 냈고, 본인도 마음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 보이고 사소한 일에도 참 고마와하는 것이어서 안 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프다고 하면 진통제를 투여했고 잠이 안 온다고 하면 수면제를 주었고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 필자는 그녀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녀의 상태는 서서히 나빠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필자는 당직은 아니었지만 거의 모든 초년병 주치의들이 그러하듯이 늦게까지 병동에서 일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도 또 병원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간호사의 보고가 있었다. 가보니 호흡이 몹시 곤란한 상태였다. 쇠약한 상태였지만 한동안 별 변화가 없었는데, 갑자기 웬일일까. 흉부 엑스레이를 찍어본 필자는 기겁을 하였다. 한 쪽 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적극적인 치료는 포기한 환자여서 괜히 이것저것 검사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간 한참 동안을 사진을 찍은 것이 없어서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악성종양의 전이로 인해 흉수가 찼고 이를 뽑아주면 일단 환자가 편해질 것이라는 판단에 도달했다. 무어라도 환자를 위해 해주고 싶었던 탓에 덤벼들었던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필자의 오판이었고 이 오판으로 인해서 엄청난 사고를 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바늘과 큼직한 주사기를 준비하여 그녀의 옆구리를 찔러 늑막강에서 물을 빼려고 시도하였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분명 늑막강에 도달할 정도로 찔렀다고 생각되는데 물이 전혀 안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방향을 조금 바꾸어서 찔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바늘을 뽑고 다시 엑스선 사진을 걸어놓고 생각에 잠겼다. 혹시는 흉수가 찬 것이 아니라 폐가 짜부러들은 것일까? 낭패감이 들었다. 엑스레이를 열심히 뜯어보면서 감별을 해보려 애쓰고 있는데, 순간 다급한 환자 보호자의 비명이 들렸다.

필자는 황황히 환자에게로 뛰어갔고 병실에서는 참으로 끔찍스런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환자가 느닷없이 엄청난 양의 각혈을 시작했던 것이다. 혈액의 양이 많아 순식간에 환자의 기도를 막아버렸고 눈 깜짝할 사이 필자가 보고 있는 앞에서 환자는 질식해 쓰러졌다.

‘클리프 행어’라는 영화를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영화 초반에 주인공(실베스터 스탈론)이 조난자 구조에 나섰다가 손을 놓치는 바람에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가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고 나서 괴로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 자체는 정말 별 생각 없는 액션 영화지만 그 장면만큼은 필자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필자는 각혈로 숨길이 막혀 숨이 끊어져가며 필자를 쳐다보고 있었던 그 환자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런 조치도 소용이 없었다. 끝이었다. 거의 순식간에 환자 한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내가 이 환자를 죽인 것일까? 나의 섣부른 늑막천자가 그녀의 폐혈관 중 하나를 재수 없게 건드리면서 각혈이 초래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인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필자의 잘못으로 환자의 명을 재촉했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필자는 망연자실했다. 돌아가실 분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마음을 정리한 탓인지 가족들이 차라리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가족들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목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멍하니 서있는 필자에게 그 자리를 지키던 그 환자의 보호자가 한마디하였다.

“저희는요, 어머니가(환자를 말함.) 돌아가실 거,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선생님한테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저 사시는 동안 가능하면 편안하게 지내시고 돌아가실 때 식구들이 다같이 임종을 할 수 있기만을 바랬어요. 근데 이게 뭐예요. 이렇게 갑자기, 임종도 못하고…”

흐느끼는 환자의 보호자에게 필자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유령같은 모습으로 흐느적거리고 당직실로 돌아온 필자는 방의 불을 켤 생각도 안하고, 피에 물든 가운은 벗지도 않은 채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 때, 찝질한 무언가가 눈가로부터 흘러내려 귓바퀴에 고였다. 도대체, 난 뭔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의과대학에 들어온 이후, 그리고 의사가 된 후, 처음이자 가장 뼈저리게 이 길을 택한 것을 철저하게 후회하였다. 그 환자의 시신을 실은 관 운반차가 삐거덕거리면서 가족들의 흐느낌과 함께 당직실 문 앞을 통과하는 것을 어둠 속에서 들으면서 난 이 짓을 당장 집어치워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가족들이 고소해도 좋다. 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감옥에 가야지. 다 때려치우자. 네가 의사라고? 개똥이라고 그래라. 바보같이 눈물만 하염없이 솟았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다음 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난 법정에 불려나가지도 않았고 그 개똥같은 의사질을 집어치우지도 않았다. 그저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부시시 일어나서 눈꼽을 떼곤 병동으로 나가서는 환자들을 둘러보고 챠트를 뒤적거렸다. 간밤의 그 엄청난 사고를 치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을 해야하는 자신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냥 악몽을 꾸었던 것이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 이 환자 expire (의사들은 그냥 ‘죽었다’고 말하기가 좀 뭐하면 이 문어체의 어려운 단어를 쓴다.)했네?”

 

병동에 나타난 동료가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오늘 날씨 참 구질구질하네 하는 정도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의사와 장의사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의사와 사람 백정은 또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

필자가 오늘날까지 이 의사라는 천당 가기는 완전히 글러 먹은 (천당이란 게 혹시나 있다면 말이다.) 직업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순전히 딴 일로는 벌어먹을 재주가 없는 무능함과 용기 없음 때문일 것이다. 환자에게 해주는 게 도대체 뭔가? 해를 끼치지나 않으면 다행 아닌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불쌍할 정도로 초라하고 궁색한 의학이라는 이름의 과학을 믿는다. 설사 그 모습이 강력하고 전지전능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지라도, 언제 흉기로 돌변할지 모르는 양날의 칼일지라도, 사형수의 목을 조이는 밧줄 같은 절박한 한계를 느낄지라도, 그래도 필자는 믿는다. 세상에 흘러 넘치는, 말도 안 되는 돌팔이들의 만병통치약과 그럴싸한 사기술, 신비스러운 초능력과 영혼의 신통력을 믿느니 이 의학이라는 우울한 이름의 과학을 끝까지 따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자리가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거나 불쌍한 곡마단의 줄타기 곡예사가 되거나 인간 백정이 되어 저주를 받거나 간에, 어찌됐거나 누군가는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왜 하필이면 죄도 많고 능력도 하잘 것 없는 필자여야만 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어차피 돌아가실 분이었는데, 하는 생각을 애써 해봐도 묵직한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질 줄 모르는 것은 왜일까? 죄송하다고 해야할 지, 그냥 명복을 빈다고 해야할 지, 정말 잘 모르겠다. 아니면, 필자의 손에 쥐어진 의술이란 것이 얼마나 겁나고 두려운 것인지 뼈저리게 깨우쳐 주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무어라 할 말이 없다.

2001.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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