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현대의학의 꽃?

필자가 미국에 머무르고는 있지만 한국 가게들도 많이 있는지라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대중매체를 접할 기회가 있다. 한국 비디오 가게에 가면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연속극을 비롯한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빌려볼 수 있다. 얼마 전 필자의 집에 손님이 며칠 머무르게 되었는데, 탤런트 이병헌의 팬인 그 분을 위해 심심풀이로 그가 나오는 연속극을 빌려 보았다.

홍콩 무협지 비디오 등속을 빌려서 보신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정말 허술하게 만들어진 뻔한 드라마라도 결국 ‘궁금해서라도’ 눈이 뻘개져가며 밤잠을 잊고 보게 되는 것이 연속극이다. 그래서 십수권 비디오를 한번에 빌려와 보는 것은 그야말로 ‘폐인되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긴 하지만, 때론 그것도 재미일 수도 있기는 하다. (단, 할 일이 몹시 없을 때 말이다.)

헌데, 이 드라마, 여주인공(최지우!)이 백혈병을 앓으면서 골수이식 기증자를 찾으며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필자는 할 수 없는 의사인지라, 드라마를 보면서도 의학적 고증 오류가 나오면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매우 흔하다) 당장에 거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뭐, 욕하는 것도 재미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드라마가 호화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상투적이고 뻔한 스토리 전개를 보이는데다가 여러 가지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지라, 마침내 여주인공이 애타게 기다리던 골수기증자를 찾아 골수이식 ‘수술’ (여기에 왜 따옴표를 쳤는지 곧 설명을 드리겠다.)을 받게 된다는 쪽으로 얘기가 전개되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드라마 작가가 한심한 실수를 저지를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의사가 아닌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많겠지만)

그리고, 염려(?)하던 그대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수척한 최지우는 환자 운반 침대에 실려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로 입장을 하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의사가 나와 ‘수술이 잘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이병헌에게 전하면서 그는 환희의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뭐가 잘못인가? 라고 반문하실 독자도 많을 것이다. 골수이식을 할 때 실제로 수술장에 들어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에 준하는 절차를 밟는 것은 골수이식을 ‘받는’ 쪽이 아니라 골수를 ‘주는’ 쪽 뿐이다. 굵은 바늘로 골반에서 골수를 채취하게 되는데, 한번에 얻을 수 있는 양이 매우 적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횟수를 반복해야만 하고, 따라서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편, 골수를 ‘받는’ 쪽은 어떤가? 수술장에는 전혀 갈 필요가 없다. 채취된 골수를 보통 수혈하듯이 ‘주사’로 맞으면 그뿐이다. 반면에 그 준비과정이 대단한 것이어서 무균실에 들어가 엄청난 양의 항암제를 투여하여 원래의 골수를 완전히 파괴하는 만만치 않게 힘든 과정이 필요하다. 게다가 골수 이식 후 성공의 여부는 한달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이 지난 후 이식된 골수 세포가 제대로 착상하여 혈구 세포들을 생산해내고 있음이 확인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골수 기증자가 나타났다고 하자마자 바로 수술실로 환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나, 잠시 뒤에 ‘야, 성공이다!’하면서 기뻐하는 것이나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이고, 필시 의학적 자문은 전혀 받지 않았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저 ‘이식’이라고 하니 다른 장기 이식이나 마찬가지로 수술실에 들어가서 수술을 받겠거니 생각했던 모양이다.

 

장황하게 서두를 늘어놓았는데, 여기서 필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스테레오타입을 본다. 수술이라고 하면 수술실에서 수술복을 차려 입은 의사들이 무시무시한 분위기에서 전신 마취된 환자의 몸 속을 헤집고 환자는 사경을 넘나들지만 잠시 뒤에 어려운 순간이 지나면 환자는 기사회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무엇이 수술이고 무엇은 수술이 아닌지를 말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 기술이 다양화․복잡화되고 있다. 내과의사와 외과의사의 경계도 실은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골수이식 ‘수술’이라고 흔히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골수를 받는 쪽은 전혀 ‘수술’이라 할 만한 것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이 수술 아닌 수술을 하는 사람들은 외과 의사가 아니고 내과 의사들이다. 심장에 있는 혈관이 좁아져서 생기는 협심증을 치료하는 데에, 불과 수 mm의 피부절개를 통해 가느다란 관을 좁아진 혈관부위까지 넣은 후 풍선이나 그물망으로 좁아진 혈관을 넓히는, 역시 수술 아닌 수술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를 행하는 사람들도 외과가 아닌 내과 의사들이다. 이런 가느다란 관을 몸 속에 삽입하여 행하는 각종 시술의 원조는 사실 방사선과 의사들이다. 이런 시술에는 몸 속을 비추어보기 위해 X-레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내과의사들은 내시경을 통한 수술도 하고 있다. 장에 생긴 ‘폴립’이라고 하는 작은 양성 종양이 앞으로 악성 종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수술을 하게 되는데 배를 열고 하는 수술이 아닌 내시경을 통해 올가미같은 기구를 집어 넣어 떼어 내는 수술을 하게 된다. 전신 마취 같은 것은 물론 필요 없다.

기존의 많은 수술이 내시경을 이용한 수술로 대치되고 있다. 아주 작은 절개를 통해서 수술이 이루어지고 입원 기간과 환자의 고통을 훨씬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담낭 절제와 같은 수술은 내시경을 통한 수술이 전통적인 개복 수술을 거의 대치해버린 실정이다. 내시경을 쓴다고 무조건 내과 의사가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시경 담장절제술은 외과의사가 한다.

반면에 외과 의사들은 수술만 하면 되는가? 장기 이식술과 같은 복잡한 수술은 단순히 째고 자르고 떼어내는 손재주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 이식된 장기의 거부반응을 막기 위해서 면역 억제제와 같은 약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따라서 철저한 사전 준비와 사후 치료가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섬세하게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약의 용량을 조절하는 등 전통적으로는 내과 의사가 잘 하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외과 의사들이 일상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내과 의사는 안 내(內)자가 있으니 배를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는 수술을 하는 의사이고 외과 의사는 바깥 외(外)자가 있으니 수술은 안하고 그냥 밖에서 보는 의사라고 거꾸로 알고 있는 분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냥 웃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누가 내과의사이고 누가 외과의사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수술에 대한 또 하나의 큰 오해는, 수술은 어려운 병을 단박에 고쳐내는 마술과 같으며 그 ‘마술’을 부리는 것은 ‘신의 손’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외과의사라는 것이다. 항상 수술이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고, 수술로 고칠 병이 있고 수술이 전혀 해당 안 되는 병도 있다. ‘수술은 잘 되었는데, 환자는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얘기가 현실일 수도 있다. 뱃속의 종양은 그림같이 멋지게 떼어냈지만,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가 너무 나빠 힘겨운 수술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수술 전의 철저한 준비와 수술 후의 적절한 보살핌은 수술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극단적으로는 현대의학에서 수술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수술이나 응급 상황을 제외하고는 현대의학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그 이외의 부분은 한의학이나 대체의학이 해결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과의사인 필자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수술이라는 것이 현대의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수술은 단순한 ‘손재주’는 결코 아니며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술이 한데 어우러져야만 한다. 소독과 멸균법의 발전, 혈액형의 발견, 마취술의 개발 등 의학의 신기원을 이룩한 대발견들이 없었다면 자유로운 수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면역억제제라는 약의 개발이 장기 이식술을 가능하게 했고, 위중한 상태의 환자에 대한 어려운 수술은 인공 호흡기와 중환자실에서의 환자 상태 모니터링 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투기가 화려하게 하늘을 누비는 것이 오직 파일럿의 조종술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뒤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비공, 관제사, 등등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과 기술이 있는 것이다. 수술은 현대 의학의 꽃이라 할만 하지만, ‘신의 손’을 가진 외과의사의 단독 드리블이 결코 아니며, 현대의학의 모든 것이 모여 이루어내는 협주곡과 같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 협주곡에는 심지어 필자와 같은 내과 의사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의학에서 수술이 중요하다면, 그래서 외과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면 내과도 마찬가지로 존재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02. 1. 11.

One thought on “수술, 현대의학의 꽃?

  1. 이 글을 쓴 지도 세월이 한참 지났네요. 골수 이식은 지금 더 많이 발전했습니다. 골수를 주는 쪽도 전신마취하에 힘들게 골수를 채취하지 않고 마치 혈액 투석하듯 혈액을 뽑아 걸러서 필요한 세포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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