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 시절 (2)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은 정녕 헛된 것인지. 시험이란 마물은 참으로 죽어라고 우리를 따라다닌다. 졸업을 해서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렸다고 해서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언젠가 썼듯이 고달픈 인턴 생활의 몇 가지 안되는 낙 중의 하나를 들라면 학생 시절의 그 지긋지긋하던 시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예 생활(?) 속의 작은 위안(?)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1년이란 세월은 얼마나 허망하게도 지나가 버리는 것인지. 슬슬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서 인턴들의 마음은 바빠졌다. 레지던트 선발 시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살 길을 찾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면서 몸도 마음도 황망하다.

뭔가를 선택한다는 일은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경우에서 다소의 부담감을 주는 일이다. 더군다나 한 번의 선택을 되돌이키기가 힘든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삶이나마 살아온 경험을 되돌이켜 보건대는 중요한 결정이라고 하여서 반드시 그만큼의 무게를 가진 고민과 사려 끝에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때론 엉뚱하게도 오늘 무슨 넥타이를 매고 나갈까 등과 같은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보유하고 있는 모든 넥타이를 한 번씩 매었다 풀었다 해보는 일이 있는 반면, 대학의 무슨 과를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일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는 ‘그냥 멋있어 보여서’라든지 하는 영 믿어지지 않는 이유로 판가름 지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를 되돌아 보더라도 의예과에 입학하였을 때, 사람들은 어떤 동기로 의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일이 무척 많았다. 의대란 다른 학과와는 더욱 특별한 것이 다른 거의 대부분의 과들은 무슨무슨 과를 들어갔다고 해서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거나 무엇이 되겠다거나 하는 것이 딱히 정해지는 것이 아닌 반면, 의대를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거의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가 확고한 것이다. 그 목표가 충분한 근거를 가진 판단에서 나온 것이건 섣부른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건 간에 말이다.(비록 대다수는 그러하지만 의대를 나온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꽤나 최근의 일이다.)

헌데 참으로 딱하게도 사람들이 무수히 그런 질문을 해올 때마다 나는 대답해줄 말이 한마디도 없는 것이다. 천하에 멍청하고도 아무 생각 없는 인간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헌데 불행히도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슈바이쳐가 어쩌고 하며 박애주의를 표방하기에는 어쩐지 너무 위선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안정적인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이야기하자니 너무 속물적으로 보였다. 아니, 잘난 척 이런 저런 이야기를 꾸며대려 하여도 도대체 아무 생각이 없는데 어쩌랴. 지금 생각에는 아마도 전자처럼 거룩한(?) 생각보다는 아무래도 후자 쪽의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잠깐 촛점에서 벗어나서 지금 와서 이야기지만 쉬바이쳐를 박애주의라는 시각 하나만으로 바라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이 드신 분들 흔히 하는 이야기대로 ‘전쟁 나도 의사는 안 죽는다카이~’, 예를 들면 뭐 그런 거 말이다. 의사라는 직업이 정말로 어떠한 일을 하는지, 또 그 일이란 것이 나에게 잘 맞을 것인지 하는 문제들은 솔직히 말해서 거의 고민해 본 기억이 없다. 아니, 고민을 하려고 해도 아무 고민 거리가 없었다. 전혀 몰랐으니까. 우리 집안에는 그 흔한(?) 의사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의대생이 되어있었다.’라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조금 더 정신을 차려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젠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할지 또 다시 과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이 결정 또한 지금 생각해 보건대는 처음부터 어떤 과가 참으로 맘에 들어 결정했다기보다는 이 과는 이래서 관두고, 저 과는 이런 게 마음에 걸리고 해서 이리 저리 치우다 보니 자연 교통정리가 되었던 것 같다.

시험이란 것은 묘한 것이다. 시험 때문에 몸과 마음이 묶이어 공부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왜 이리 다른 짓을 하고 싶어지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평소에는 따분하기 짝이 없던 TV도 갑자기 재미있어지고 시답지 않은 친구들과의 잡담과 신문 보기를 즐기는데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인턴도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 한 가지 더 힘든 것은 일은 일대로 다 하면서 공부 또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경야독이라고나 할까? 시험을 본다고 하여서 있던 환자가 없어지거나 널려 있던 온갖 일들이 사라져 주는 것이 아니다. 대신 해줄 사람은 더군다나 없다. 믿을 것이라곤 자기 자신 뿐.

막판이 가까워질수록 신경전은 더욱 치열하다. 어디나 경쟁이 있는 곳은 다 그러한 법, 서로의 향방과 어느 과의 경쟁률이 어떠한지에 온 신경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선발 정원이 적은 곳은 뻔히 아는 얼굴끼리 경합을 벌여야 한다는 것은 때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모진 일인 것이다. 모두들 지원자 수와 선발 정원을 맞춰서 ‘무혈입성’하는 것이 꿈이지만 어디 그렇게 맘대로들 되는가. 선발 정원도 지원자 수도 많은 내과에 지원한 나는 그런 압박감에는 시달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험이란 지겨운 것이고 바라는 것은 결과는 어찌 되건 간에 그저 빨리 끝나는 것뿐이었다.

시험은 세 가지 였는데 하나는 모든 인턴이 공통적으로 보는 시험이었고 두 번째는 각 과별로 실시하는 시험이며 세 번째가 면접이었다. 헌데 두 번째 시험이 큰 골칫거리였다. 필기 시험으로 치르던 이전과는 다르게 최초로 구두 시험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어떤 공부를 하는 사람, 그래서 시험이란 것을 치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지만 어떤 시험에도 ‘족보’가 있다. ‘족보’라? 시험의 족보? 비단 의대에서만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는 해당 시험의 기출 문제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때로는 엉성한 복사물, 어떤 경우에는 제법 번듯하게 제본되어 표지까지 있는 책의 모습이기도 하다. 언제나 시험의 성패를 크게 좌우하는 것 중 하나는 얼마나 좋은 족보를 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시험 문제의 출제자가 게으르면 게으를수록 족보의 위력은 대단해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시험 문제를 받아보면 문제가 이런 식으로 보이게 된다. ‘작년 3번 문제의 답을 쓰시오.’

족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고 시험이란 모름지기 ‘탈족보’를 해야 한다. 즉, 계속 이전에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중요한 요점이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무한정 새로운 문제를 만들겠는가. 족보에 있는 것을 빼고 문제를 만든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싹 다 빼고 그 밖에서만 문제를 내야 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족보란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족보를 만드신 조상님(?)들을 기리는 마음 또한 가져야 할 것이다.) 시험이 ‘족보를 타건’ 아니건 최소한 시험의 경향이라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헌데 우리의 문제는 처음으로 바뀐 형식인 구두 시험은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르고 따라서 전혀 족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방향을 못 잡고 갈팡질팡할 수 밖에 없었다. 무얼 공부해야 할지 모르니 결국 놀 수 밖에 없질 않은가. 빈둥빈둥 놀다가 시험 보러가니 그것 참 좋았겠다고 생각할른지도 모르지만 시험을 앞두고 뭘 공부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멍청하니 헤메이는 것도 참으로 고역이다.

마침내 결전의 날은 왔다. 완전히 베일에 싸여있던 새로운 시험의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0명의 평가자 (즉, 교수님들)가 10개의 방에 들어앉아 있고 수험생(?)들이 각방을 돌면서 각 방마다 5분의 시간을 가지고 구두 시험을 치르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이렌을 울려 다음 방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소림 36방’이라고 옛날 무술 영화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수련을 마친 뒤 각 방을 통과하며 시험을 치뤄서 마침내 달궈진 화로를 들어올리면 용 문신이 새겨지면서 합격하게 된다. 다 아시는 내용일 것임.) 뭐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0개의 방을 어떻게 통과하였는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는데 그 중 한 방은 유난히도 기억에 난다. 거기 앉아 계셨던 교수님은 내가 방에 들어가니 아무 말 없이 그저 책상 위를 가리킬 뿐이었다. 거기에는 어디서 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물건이 하나 놓여 있고 이 사용법을 설명해 보라는 문제가 써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그 물건은 Sengstaken-Blakemore tube(이 웬수 같은 물건의 이름을 언젠가 철자를 헷갈리지 않고 쓸 수 있게 될까?)라고 불리는 것으로 간경변증 환자에서 많이 보게 되는 식도정맥류에서의 출혈이 있을 경우 식도와 위에 집어넣어 풍선을 부풀려 출혈 부위를 눌러 줌으로써 지혈을 시키는 관이다. 불행히도, 참으로 불행히도 나는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그 실물을 본 것이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이러고도 내과를 하겠다고!) 나는 애처롭고 가련한 눈빛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틀림없이 그러했으리라.) 시험관을 쳐다보며 연민의 정이라도 불러일으켜 보려 했지만 그는 그저 염라대왕처럼 네 이놈~하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난 그저 수줍은 새색시가 옷고름 조물락거리듯이 애꿎은 튜브만 열심히 만지작거리면서 빨리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야 했다. 망할 놈의 5분이 왜 이렇게 기나. 보다 못한 시험관이 마침내 염라대왕 같은 일성을 내질렀다. “됐어~! 나가~!” 쩝… 되긴 뭐가 돼… 나는 쓰디쓴 입맛을 다시면서 문 앞에서 다음 문제로 갈 때까지 멍청히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재가 워낙에 없던 탓이었는지 나는 합격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무식한 자가 합격하면 환자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러분들은 좀 걱정이 되실 것이다. 시험에 붙었다고 기뻐한 것도 잠깐, 나도 역시 걱정이 태산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맞부닥친다는 것은 항상 두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 일이란 것이 엄청난 중압감을 주는 일이라면 더욱 그러한 것이다. 조금 더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더 사람을 갉아먹는 일인 것이다.

시간은 가차없이 흘러서 나는 마침내 인턴이란 딱지를 떼고 내과의 전공의 1년차라는 직함을 달게 될 날이 오고야 말았다. 사람이 성장하고 경험을 쌓고 능력을 키우는 일이란 항상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반해 사람의 허울, 즉 직책이나 해야 할 일은 거의 언제나 불연속적으로 변한다. 방금 전까지 인턴이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전공의, 또 주치의라는 직함을 달고 심지어는 밑에 인턴 한 사람까지 거느리는 입장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저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가버리고 싶지만, 어쩌랴, 사각의 링은 좁고 숨을 곳은 없는 법이다. 그저 1년 더 인턴 노릇 하라는 것보다는 무척이나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뿐.

인계를 해야 할 날이 되었다. 달마다 있는 곳이 바뀌는 생활을 벌써 몇 년째 해오면서 항상 느끼는 일은 인계를 다음 사람에게 해 주는 순간에는 뭔가 홀가분한 느낌이 들고, 다음 근무할 곳으로 가서 인계를 받으면 뭔가 가슴 속에 묵직한 것이 하나 들어차게 되는 것이다.

애용하던 토니켓 (tourniquet ; 고무줄 (노란 기저귀 고무줄처럼 생긴)인데 채혈을 하거나 정맥 주사를 놓을 때 팔을 묶어서 정맥을 튀어나오게 만든다. 인턴의 필수품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인턴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을 애처롭게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는 신임 인턴에게 선사하고 “그럼 잘 해 보슈! 안녕!”하고 떠나 올 때의 상쾌한 기분은 주치의로 근무할 병동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잡쳐버리고 만다. 으… 정말 기분 드럽네… 난 인젠 정말로 죽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는 뭔가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 – 예를 들면, 예과에서 본과로 올라올 때, 졸업하고 처음 인턴으로 근무하기 시작할 때 – 에는 ‘난 인젠 죽었다…!’ 하고 비장한(?) 각오로 시작하게 되지만 정말로 죽지는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얼마나 다행인가. (다행이 아닌가?) 죽겠다 죽겠다 해도 사람 다 살게 되어 있는 법이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

나에게 인계를 해 주는, 이제 잠시 뒤면 2년차가 될 선배 전공의가 그렇게 부럽고 존경스러울 수가 없다. 환자 인계해 주느라고 옆에 쌓아 놓은 차트는 왜 이리 산더미 같은지. 마침내 그는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떠나고 나는 뒤에 홀로 남았다. 오! 신이여! (혹시 시간 있으시면) 이 무기력한 신임 주치의에게 목숨을 맡긴 가련한 환자들의 생명을 보살피소서! 아멘! 나무아미타불!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나는 그래도 의연하려고 애쓰면서 내 환자들의 차트를 한데 모아 들어 올려 본다. 에구, 무거워… 이것이 인생의 무게일까?

1994.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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