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왜 사니?

“너 왜 사니?”

그것이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어리벙벙하던 의예과 1학년 초에 나의 학우가 어느 날 갑자기 강의시간에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특별히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친해질 기회도 아직 없었다. 헌데 느닷없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는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그런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는 나 자신이 순간 한심하게 느껴졌다.

“너는 왜 산다고 생각하냐고?”

그가 대답을 재촉하였다. 나는 정말로 대답할 말이 궁했다.

“죽지 못해서 살지, 뭐…”

나의 맥없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는 무척 경멸스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한심스럽다는 투로 내뱉었다.

“아니, 네가 왜 사는 지도 모르고 산단 말야? 죽지 못해서 산다는 게 말이 되니? 너 정말 엄청난 패배주의 속에서 살고 있구나?”

패배주의는 또 뭔가? 하지만 별로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아마 처음으로 서로 이야기해본 것 같다.) 그에게 난데없이 팔푼이 취급을 받으니 내심 무척 화가 났지만 강의 시간 도중에 소리지르며 싸울 수도 없고 해서 그저 꾹 참았다. 강의 시간 끝난 후에 한마디 해주리라고 벼르고 있 는데 강의 끝나자마자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총총 가버렸다. 결국 하루 종일 우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게 잘난 너는 왜 사는지 한번 들어보자!’하고 긁어주고 싶었는데. 그는 과연 자기가 왜 사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또,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그 복잡한 사연들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의 질문은 확실히 우문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의 우문에 현답을 해줄 지혜가 없는, 지혜는 커녕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개똥 철학도 없는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짬뽕이란 말인가?

그리곤 세월이 흘렀다. 그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휴학을 해버렸고 그의 우문에 현답을 해줄 기회를 다시는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8 년을 더 ‘죽지 못해서’ 살은 나는 내과의 레지던트가 되어 영화에 나오는 전장터의 야전 병원처럼 땅바닥에까지 환자들이 널브러져 있는 아수라장의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마 어느 월요일 늦은 오후였을 것이다. 거의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환자들이 몰려 지칠대로 지친 몸과 극도로 날카로워져있는 신경을 당직실에서 잠시 달래고 있는데 새로운 환자가 왔다는 연락이 왔다.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단받고 치료받다가 치료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 치료를 포기하고 지내던 20세의 남자 환자가 왔다는 것이다. 내가 물먹은 솜같이 무거운 몸을 추스려 환자를 보러 나가려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나에게 물었다.

“지금 왔다는 환자, 혹시 000씨 아니니?”

“몰라. 내가 보지도 않고 무슨 재주로 아냐?”

“아마 맞을 거다. 얘기들은 거 같은데… 유명한 환자라더라. 잘해봐라.”

유명한 환자? 잘해봐? 뭘? 나는 원 싱거운 자식, 하면서 밖으로 나아갔다. 거기에는 좀 살풍경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험상궂은 얼굴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씩씩대면서 서있는 한 중년 남자와 역시 잔뜩 화나있는 듯한 얼굴의 그의 부인인 듯한 여자,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몹시 지친 표정의 젊은이. 저 젊은이가 환자구나. 나는 우선 옛날 챠트를 뒤적여보았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 이미 수차의 항암화학요법을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별 효과가 없었다. 더 이상의 항암화학요법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별로 희망이 없는 환자였다. 그에게로 다가가서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시죠?”

헌데,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하기조차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열나서 왔어요!”

옆에서 그의 아버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나, 하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열이 났습니까?”

“혈소판 수혈 해야되요!”

혈소판? 이 사람 정말 왜 이러나?

“혈소판이 1만이래요. 빨리 혈소판 수혈해주세요!”

인턴 선생이 환자가 오자마자 검사를 내 놓아서 이미 결과가 나와있었고 환자의 아버지는 이 결과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내서는 혈소판 수치가 낮으니 수혈을 해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혈소판이란 적혈구와는 달리 수명이 길지 않아 미리 만들어 놓고 저장했다가 줄 수가 없어 그날 그날 만들어서 써야하므로 구하기가 힘들다. 아침에 예약을 해야만 그날 들어온 혈액에서 추출하여 준비하여 저녁에나 수혈이 가능한 정도이다. 더구나, 이 환자는 좋아질 희망이 없는 환자이고 혈소판 수혈은 혈소판 숫자를 올리기는 하겠지만 이는 극히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그에게 설명을 하고 지금 특별히 출혈도 없는데 혈소판 숫자가 낮다고 해서 혈소판 수혈을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점도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말은 전혀 들으려하지 않았다.

“다 아는데, 아무튼 혈소판 수혈 해 주세요. 응급으로 저한테서 뽑으면 되잖소.”

이 사람은 훤히 사정을 알고 있었다. Platelet pheresis이라는 방법이 있다. 공여자의 혈액을 뽑아내어 혈소판만을 걸러낸 뒤 나머지 혈액은 다시 넣어주면 한 사람에게서만도 상당량의 혈소판을 얻을 수 있다. 응급으로 pheresis를? 하지만 지금 전혀 응급 상황이 아니다. 혈소판 수혈 자체가 이 환자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미 백혈병 세포들로 꽉 찬 골수에서는 혈소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수혈해 주고 며칠 뒤면 다시 혈소판 숫자가 떨어지고 그러면 또 수혈해주고 또 해주고…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킬지도 의문이고 비용도 만만찮다. 게다가 병이 좋아질 희망은 없이.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당신은 혈소판 수혈 소용없다고 그러는데, 그럼 피나서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거요?”

책임? 안된 얘기지만 이 사람은 어차피 죽을 사람이다. 한판 해보겠다는 식의 그의 거친 말투에 ‘송장 치고 살인났다한다’는 말이 생각나면서 가뜩이나 날카로워져있던 나의 신경이 ‘투두둑’하고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목소리가 한 세배쯤 커지면서 그와 나는 고래 고래 서로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 사방의 사람들이 다 우리를 돌아보았고 나는 순간적으로 ‘아뿔싸, 이러면 안되는데.’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는 절대로 지지않고 끝까지 나에게 대들었고 나는 마침내 거의 살기등등한 그의 기세에 위압감마저 느꼈고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임상병리 당직을 찾아서 전혀 응급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응급 pheresis를 해야 하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아! 000 환자요? 그 사람 알아요. 그 아버지가 유명하더군요. 입원해 있을 때도 굉장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못 견디실 걸요? 알았습니다. 그럼 그 아버지를 보내 주세요.”

이런, 내가 잘못 걸렸군. 임자 만났네, 빌어먹을. 거의 짱돌에 엊어 맞은 셈이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그의 혈소판을 뽑아서 그의 아들에게 수혈하였다. 그후로는 나는 그를 설득하는 것은 포기하고 그가 혈소판 수혈을 요구하면 항상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혈소판 수혈이 필요하고 말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바보같이 욱해가지고 쓸데없이 소리질러대며 스타일만 구기고 환자 보호자와는 완전히 틀어지고… 환자 보호자 하나 설득을 못 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으니. 엄마, 엄마, 나 의사 맞어? 나중 에 그를 병실에서 맡아보았던 동료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혀를 내 둘렀다.

“야, 야, 말 마라. 나도 대판 싸웠어. 헌데 도저히 당할 수가 있어야지. 그냥 하자는대로 다 해줘라. 그게 상수다.”

제기랄, 이런 황당한. 안되겠다. 입원이나 시켜버리자. 돗대기 시장같은 응급실에서 그를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입원은 안하겠다고 한다. 열만 내리면 집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래, 맘대로 해라. 나는 그를 설득하거나 그와 논쟁하는 것은 완전히 포기하였다.

며칠 그 환자를 보다보니 그를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아들, 아무런 해줄 일 없는 절대절명의 상 황… 혈소판을 수혈하는 것은 분명 부질없는 짓이고 도움도 안 되는 것 이었지만 그에게 ‘그냥 포기하고 아드님 죽을 날만 기다리실래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계속하실래요? 둘 중의 하나밖에 없걸랑요.’라고 선택을 강요해야만 하는 나 자신이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선택을 하였고 그 끝없는 절망의 물 붓기 끝에 그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거의 동물적인 보호 본능,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과 광기에 가까운 분노, 그리고 처절한 절망뿐인 것이었다.

그 환자가 응급실에 있는 며칠동안 나는 그 환자나 그 아버지와 되도록 이야기를 안 하려 애썼다. 그들도 나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서로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리고 아무런 해결법도 없음을. 유일한 해결법은 환자가 죽는 것뿐이었다. 고통은 그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며칠 뒤 열은 조 금 내린 상황에서 퇴원을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아무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져갔다. 나는 8년 전에 그러하였듯이 또 하루 종일 우울하였다. 도대체 사람이 왜 사나?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나?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만일에 정말 있다면, 그는 인간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 신의 필요에 의해서? 고통과 불행이 있어야만 희망과 행복도 존재하는 것이니까? 인간이 고통받는 것이 어째서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이 그의 필요에 의해서 인간을 이런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한다면 나는 그를 저주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을 택하겠다. 차라리 세상엔 아무런 목적도 이성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을 택하겠다. 왜 사냐고? 죽지 못하니까! 건강하게 살아서 걸어다니고, 아침 나절의 맑은 공기를 숨쉬고, 저녁놀을 보고,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느끼고, 다음 날 아침 깨어나 다시 아름다운 아침을 맞이하고, 그리고 어찌되었든 살아가고 있다는 것,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한 것조차도 영원한 것은 아닐진대, 무엇을 그렇게도 물어보아야 한단 말인가? ‘너 왜 사니?’ 그 질문을 처음 들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질문을 나에게 던졌던 그 친구가 다시 나타나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젠 조금은 자신있게 대꾸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넌 죽을래?’라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 속으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물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이를 물리쳐야 하는가, 죽는 것은 잠자는 것 -
	오직 그뿐. 만일 잠자는 것으로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피치 못할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바 극치로다. 죽음은 잠드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아, 그게 곤란해. 
	죽음이란 잠으로 해서 육체의 굴레를 벗어난다면
	어떤 꿈들이 찾아올 것인지 그게 문제야.
	이것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 때문에
	이 무참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과
	권력자의 횡포와 세도가의 멸시와
	변함없는 사랑의 쓰라림과 끝없는 소송사태, 
	관리들의 오만함과 참을성 있는 유력자가 천한자로부터 받는 모욕을
	한 자루의 단검으로
	모두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그 누가 참겠는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지루한 인생고에 신음하며
	진땀빼려 하겠는가.

- 셰익스피어, '햄릿' 중에서

199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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