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다니는 것이 무서버!

사람의 – 또는 사람 뿐아니라 모든 고등 생물에 있어서 – 무서움이란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그 개체의 보존에 유리한, 합목적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쉬운 말을 너무 어렵게 썼나? 어쨌든 쓸데없이 겁이 없는 사람은 괜히 얻어맞거나, 고소 당한다든지, 욕을 먹는다든지, 물어뜯기거나 꼬집히거나, 타박상, 찰과상, 그리고 급사의 위험성이 높다. (이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음!)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한두 가지, 때론 수십 가지의 물건, 생물, 상황들을 별다른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고소공포증이라던지 (이게 이유 없는 두려움이라고?) 폐소공포증과 그 반대되는 광장공포증, 대인공포증 등등 이유없고 과도한 무서움증은 드물지 않은 것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을 들어보라면 두 가지의 항목을 들 수 있다. 첫째는 발이 7개 이상이거나 1개 이하인 것. 세상에 발이 7개이거나 한개인 생물은 심각한 선천성 기형이나 사고에 의한 불구 외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에 속하는 놈(!)들은 발이 많은 쪽으로는 거미, 지네, 그리마, 전갈, 송충이 등이고 (게, 새우, 문어, 낙지, 오징어 등은 빼고 말이다. 그것들은 먹는 것이니까… 꿀꺽!) 발이 없는 놈들은 뱀, 거머리… 이런 것들이다. (역시 생선이나 뱀장어 등은 같은 이유로 제외.) 뭐 이런 흉칙하게 생긴 놈들을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기는 하겠지만 난 이놈들이 무섭다. 나한테 해가 되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두번째의 항목을 들라면, 글쎄 좀 뭐라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긴 한데…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어렸을 적, 어린이 대공원에 처음으로 놀러갔을 때를 기억한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가 여러 가지 탈 것들 중에서도 유난히도 줄이 긴 것이 있음을 발견했는데 그게 소위 "청룡 열차"라는 것이다. 요사이는 물론 "프렌치 레볼루션"이니, "독수리 요새"니 하는 무척이나 이국적, 환상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한 이름들로 불리는 것들이지만 이름이 뭐 그리 상관인가. 아무튼 나는 지루한 기다림 끝에 결국 멋도 모르고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는데 공교롭게도 제일 앞자리였다. 헌데, 출발하고 철커덕거리면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기분이 영 이상하더니만 마침내 정상에서 스스르 미끌어져 나가기 시작할 때의 그 엄청난 공포의 엄습! 그리곤 추락의 느낌, 땅이 쏜살같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다시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 몇십 초 간의 전율의 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나는 완전히 얼이 빠지고 다리가 풀린 채 해롱해롱하면서 악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도대체 거기에 올라타고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꽥꽥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또 타겠다고 난리인 애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에 바이킹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타봤지만 나는 역시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부들부들 떨어야만했다. (근데, 내가 타겠다고 해서 탄 적은 정말 한번도 없다. 항상 여자가 같이 타자고하는 바람에…) 남자 체면에 눈감고 비명 지를 수도 없고 머리 처박고 있을 수도 없고 무서워서 못 타겠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은 벌리되 소리는 나오지도 않고 온몸의 근육은 긴장으로 팽팽한 채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행복했던 순간들,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참는 거야…"하다가 그 괴물 같은 기계가 겨우 멈추고 나면 거의 얼빠진 얼굴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비실비실대곤 했다.

청룡열차

며칠 전, 나는 한 5년만에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영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최소한 비행기 타는 것이 무섭다거나 불안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리고 비행기는 가장 사고율이 낮은 교통 수단이 아니던가. (한 번 사고 났다하면 살아날 길이 없다는게 문제지만.) 참혹했던 항공기 사건의 기사들이 머리 속을 스쳐가고 기체의 사소한 흔들림과 상하 동요가 있을 때마다, "그래… 마음을 비우자… 어기서 죽는다면 그것도 운명인 것을… 아냐, 난 죽기엔 너무 젊어…" 하는 온갖 방정맞은 생각들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아리따운 스튜디어스 아가씨들의 상냥한 미소인들 눈에 들어올리 있는가. 거짓말 좀 보태어서 하마트면 비행기에서 살아 내린게 너무 기쁜 나머지 땅에다 입마춤할 뻔했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비행기에 타고서 이렇게 불안하다고 생각해본 건 처음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인지?

온 세상이 모두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주며 따뜻하게 미소지어주는 꿈속에서만 살았던 시절이라면 무슨 두려움이 있으랴. 모든 사물이 친근하고 익숙한 변함없는 친구와 같은 존재로서 남아있다면야… 하지만 나의 주위의 것들은 빠르게 변해가고 내가 세상을 만들어가기보다는 세상이 지금껏 나를 만들어왔다. 그리곤 쉴 틈 없이 어지럽고 숨가쁘게 뱅글뱅글 돌아가는 건 나인지 세상인지? 아침마다 입에는 치약거품을 물고 한눈으론 신문을 스캐닝하면서(?) 한편으론 배설의 신성한 의식(?)을 행하고 머리 속으로는 오늘의 할 일을 생각하는, 도스에서 윈도우즈로 나아가듯이 우리의 생활은 또 얼마나 절묘한 멀티태스킹의 연속인지… 하지만 우리의 CPU는 뚜껑 열고 옛날 것 뽑아버리고 새 걸로 슬롯에다 갖다 꽂기만 하면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그걸 멀리하면 현대의 원시인으로 전락할 것 같은 두려움이 더욱 크기에 이를 악물고 그 무서운 것들을, 그 무시무시한 속도와 정신 아득해지는 아슬아슬함으로 위험스럽게 세상을 날아다니는 것들을 집어타야만한다. 그리곤 달리는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형상으로 두 눈 질끈 감고 언제까지나 날아가는 것이다.

난 무섭다. 날아다니는 것이, 발이 없거나 너무 많이 있는 것들이, 그리고 별안간 예고없이 추락하는 것들이. 내가 뱀을 주물럭거려야하는 땅꾼도 아니고, 전투기 조종사도 아니고, 롤러코스터나 바이킹등속을 꼭 타야만할 이유도 없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대신에 다른 모든 아슬아슬하고 무서운 것들은 다 해내야만한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두려움을 모르는 패기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오기로 전진해나가는 나는 참으로 나약한 사람인가보다. 근데, 어디 나랑 바이킹 타러 갈 아가씨 없수?


199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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