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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4)
PC 통신이란 신통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게 된 것도 어느 새 3년이 다 되어간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경력이랄 것도 없는 필자의 통신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내인 Y와의 메일 주고받기와 채팅이다. Y와 통신상에서 만난 것은 물론 아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필자 역시 PC 통신이란 게 있다던데, 하는 수준일 뿐이었다. 그녀를 만난지 얼마 안되어 필자가 가지고 있던 거의 사망 직전의 AT 컴퓨터를 필자의 친구에게 거저 넘기고 486 DX, 4 MB RAM, 120 MB 하드 디스크 등, 92년 당시로서는 비교적 쓸만한 사양의 컴퓨터를 큰 맘 먹고 장만하였다. 멀티미디어 컴퓨터는 당연히 아니었고, 당시에는 별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2400 BPS의 모뎀이 달려 있었다. 그 전에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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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3)
이 글의 전편인 결혼기(2)에서 한 10년 쯤 뒤에도 재미있게 사는지 보자고 그랬는데 얼마(?) 못 참고 또 펜을 들었다. 아니, 펜을 들은 게 아니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건데, 너무나 삭막하고 반문학적인 표현이라 유감스럽다. ‘그래 어디 한번 살아봐라’고 비웃음 내지는 저주(?)의 주문을 외우던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말씀인데 다행히도 아직은 비교적 재미나게 살고 있다. 다행 중 불행은 아직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한 Y는 얼마 전 영국사(안타깝게도 필자는 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를 공부하러 다시 바다 건너 가버리고 필자는 독수공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떨어져 살면 신혼이 오래 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위로로 삼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하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떨어져 있게 되어서 안됐다’는 취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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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1)
참으로 오랫만에 쓰는 글이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라던가. 노총각 신세를 면하느라고 정신없이 한 달이 지나가 버렸다. 지금의 내 주위를 문득 둘러보건대 달라진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그간 뭔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벌어졌음에 틀림이 없건만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한 1년쯤은 나이를 먹어버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한 가지만 들라면 뭐라고 이야기할까? 이런 글을 써서 책 만들어서 떼부자가 될 성싶지도 않고, 유명 인사가 될 것 같지도 않고, 작문 연습해서 논술 고사 볼 것도 아니고, 그럼 뭐란 말인가? 구태여 뭐라고 뭐라고 시답지 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라고 할 것이다. 나는 뭐든지 참 잘 잊어버린다. 언제부터 이런 조기 치매 현상을 방불케 하는 건망증이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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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2)
사람들이 남들이 결혼한다고 할 때 보이는 반응은 경우에 따라 무척 다양할 것이지만 기혼자의 경우에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에 예외 없이 덧붙이는 한마디 말이 있다. 물론 표현은 다양하겠지만 그 내용은 다 같다. “좋~을 때다.” “그래 어디 살아 봐라.” “애만 한 번 낳아봐라. 좋은 것도 잠깐이다.” “지금처럼 평생 재미있을 줄 알지?” “신혼 여행 다녀오고 나면 끝이야.” 등등. (참고삼아 말해두자면 맨 마지막 얘기는 결혼한 지 석 달 된 친구가 한 말이다. 참 웃기는 세상이다.) 어떤 경우에는 부러움 섞인 농담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네들의 신세 한탄이기도 하고 가끔은 별로 듣기 좋지 않은 악담이기도 하다. 심지어 Y의 어떤 아는 사람은 사준지 관상인지 뭔지를 좀 안다고 주장하면서 Y에게 하는 소리가 두 사람 모두 날카로운데다 유약한 사람들이라 언젠가는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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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발의 사관(士官) (4)
나는 눈부시게 떨어지는 햇빛 아래서, 그리고 제법 생생한 파릇파릇함으로 자라 올라오는 잔디를 디디고 서서 잠시 뒤에 있을 임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도 행복한 일인가. 2주일 전, 억겁처럼 긴 시간 끝에 결국 기브스를 풀게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았다. 오랜 억압 끝에 족쇄를 풀어버리고 자유인이 되려는 노예같은 기대감으로, 한편으로는 첫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듯한 산모의 설레임으로, 또 다른 마음 한 구석 뭔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뒤범벅이 된 마음으로 전기톱에 다리를 내 맡겼다. 석고 붕대가 쪼개지고 참으로 오랫만에 보게 되는 내 오른 다리는 분명해 내 다리임에도 무척이나 낯설었다. 창백하고 털이 숭숭 난, 삐쩍 말라 가늘어진 다리였다. 다리를 구부리고 펴고, 땅에 디디고 밀치는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