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은 당신의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각, 온 아파트에 대낮같이 환히 불이 켜져 있는데, 길거리에는 인적이 드물다. 느닷없이 와!하는 우레같은 함성이 온 아파트 단지를 뒤흔든다.

이게 무슨 광경일까. 그다지 낯설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큰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면 벌어지는 광경이다. 필자는 실은 스포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고, 고등학교 때 모교 야구팀을 응원하러 간 이후로는 일부러 시간 내어 스포츠 경기를 보러 갔던 기억이라곤 전무하고, TV로도 스포츠는 좀처럼 보지 않는 편이다. 필자의 친구들은 박찬호가 출전하는 경기 시청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필자의 애국심(?)에 의혹을 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큰 국제 경기가 있다면 전혀 무관심할 수만은 없다. 월드컵은 어떤가? 필자가 미국에 있는지라 시청하기는 무척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워낙에 무딘 운동 신경을 타고난 필자는 특히 축구에 관해서는 거의 최악의 선수로서, 실은 초등학생 이후로는 공이란 것을 차본 일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던가, 자살골(요새는 자책골이라고 부른다던가?)을 넣은 이후로 말이다. 컬럼비아였든가, 남미의 한 국가대표 선수가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고서 고국에 돌아가서는 꼭지가 돌아버린 한 미친 놈(그렇다, 정말 미친 놈이다! 더 험하게 얘기하고 싶지만 참자.)에게서 총을 맞고 숨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하여간에 자살골을 넣은 그 참담함은 정말 겪어보지 않고선 모른다. (그저 캭,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다른 스포츠들도 다소는 그러하지만, 특히 축구는 전통적으로 열혈 한국인들을 ‘미치게’ 하는 스포츠이다. 그다지 관심이 높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도 16강, 16강하는 소리를 하도 들어 16강에 못 들면 어쩔지, 아니, 16강에 들고나면 그담엔 또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헌데, 월드컵이 도대체 건강컬럼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필자는 심장내과 의사로서 한가지 걱정을 하게 된다. 온 나라가 들썩들썩할 정도의 스포츠 경기는 드물지 않게 ‘희생자’를 내왔다. 한국 스포츠사의 신화적인 몇몇 장면들, 예를 들면, 홍수환 선수의 4전 5기라든지, 몇 년도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김재박 선수가 몸을 날려 번트를 하는 장면 등등이 있은 다음 날 신문은 온통 그 소식으로 도배가 되지만, 그 귀퉁이 어딘가에는 석줄자리 틈새 기사가 있었다. 아무개씨가 TV 시청 도중 그 결정적인 장면을 보고 나서 갑자기 쓰러져서 숨졌다는 허탈하기 짝이 없는 그런 기사 말이다. (걱정도 팔자라고요?)

1994년 1월 17일 새벽, 북미대륙 사상 최악의 지진이 LA 지역을 강타했다. 지진 그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음은 불문가지이지만, 이 엄청난 재앙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만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의학 잡지 중의 하나인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96년 2월 15일 호에는 LA 지역의 강진 직후 이 지역에서 돌연사가 급증했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평상시에 하루 4-5명 수준이던 돌연사가 지진 발생 다음 날은 24명까지 증가했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충격이나 스트레스가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육체적인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그 ‘정신적인 충격’이란 것을 계량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증거는 실제로 그다지 풍부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둘 중 하나에 가해진 충격과 무리는 다른 하나에게도 바로 영향을 미친다. 지진과 같은 엄청난 자연 재해를 들먹일 것까지도 없이, 그저 집에 앉아서 TV로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다가도 급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중년 남자 김열혈씨는 평상시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 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으로 직장에서의 반복되는 과로, 스트레스와 이를 푼다는 명목의 빈번한 음주가무(?), 무절제한 식사의 결과로 튀어나온 아담한(?) 뱃살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하루에 한갑이 기본인 흡연가이다. 휴일이면 리모컨 돌이가 되어 스포츠 경기 시청으로 날을 보내는 것이 낙인 그가 월드컵을 놓칠 수는 없다. 스포츠 경기를 일단 보기 시작하면, 자기가 팀 감독이라도 된 듯 열을 올리며 열중하는 그이다.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의 심장 혈관, 즉 관상동맥에는 이미 동맥경화가 생겨 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그의 동맥경화 병변은 혈관 벽에 붙은 기름주머니와도 같다. 충격을 받으면 터져서 그 안의 내용물인 콜레스테롤이 흘러나올 수 있다.

월드컵 16강 전 진출에 고비가 되는 일전, 한국팀은 상대방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답답한 졸전을 펼치고 시간은 다 되어가고 스코어는 2-0, 이제 다 틀린 것 같다. 짜증이 나고, 혈압이 오르고 맥박은 빨라진다.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 혈액은 끈적끈적해지고, 아드레날린의 영향을 받은 심장의 전도체계에는 교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부정맥도 하나둘 나타난다. 그뿐인가,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줄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헌데, 혜성같이 나타난 모 선수 (뭐, 누구면 어떤가) 순식간에 해트 트릭을 하며 거짓말처럼 역전승을 거둔다. 아파트 단지에는 또 낮익은 함성이 진동하고, 우리의 김씨도 물론 열광한다. 햐, 시원하다, 십년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구나!

헌데, 그 순간, 참으로 재수없게도 김씨의 관상동맥 벽에 있던 한 동맥경화 병변이 톡하고 터져버린다.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치솟은 혈압과 맥박으로 혈액의 흐름이 매우 거칠어지고, 게다가 담배로 인해 수축을 일으켜 좁아진 관상동맥에서의 흐름은 더욱 거세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고름주머니와 같은 상태였던 동맥경화 병변 중 하나가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이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된다. 혈관내에 흘러나온 콜레스테롤은 강력한 응고작용을 일으키고 이미 끈적끈적하게 응고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혈액은 순식간에 피떡을 만들면서 혈관을 막아버린다.

혈액 공급이 중단되자, 흥분 상태였던 심장의 전기 전도 체계에는 큰 혼란이 생긴다. 한 방향으로 곱게 흘러야 할 심장 전기의 흐름은 격렬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이에 따라 분당 200회 이상의 치명적인 부정맥이 생긴다. 혈액공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심장이 감당해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김씨는 뭐라 말도 한마디 못해보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린다.

필자는 이런 안타까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이런 허망한 비극이 생기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겠지만, 세상 살면서,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이미 망가진 몸을 어찌할 것인가.

최소한, 정신 수양이라도 미리 좀 해야 되지 않을까. 스포츠 경기를 보고 즐기는 것,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경기 결과에 좌불안석 애간장을 태우는 것은 감독에게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자. (필자는 스포츠 팀 감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팀이 답답한 경기를 펼치고 있어 계속 지켜보고 있기에 너무 짜증이 난다면, 실은 그냥 TV를 꺼놓고 있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밖에서 함성이 들려오면 그때 TV를 켜면 된다. 그리해도 골 넣는 장면의 슬로우 모션 화면은 충분히 볼 수 있다. 아니, 그렇게나 결정적인 장면이라면 그 날과 그 다음날까지 뉴스에서 지겹도록 다시 볼 수 있다.

이기면 어떻고 지면 또 어떤가. 초연한 태도로 느긋하게 관전한다고 해서 애국심을 의심하지는 말자. 실은 남들은 열광하는 속에서 멀뚱멀뚱 앉아 있는 필자는 매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세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다. 글쎄, 좀 재미 없고 심심할지는 모르겠지만,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는 명경지수와 같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을 필자는 확신한다. 세상 사는데 화나고 마음 흔들릴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그렇지 않아도 마음 다스리기가 어려운 판에, 필자는 스포츠 중계에까지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한국축구의 앞날이 걸린 판에! 난 그렇겐 못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글쎄… 무슨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라는 점을 먼저 전제하고 나서, ‘그렇다면, 준비운동이라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더운 여름날, 준비 운동 안하고 물 속에 다짜고짜 풍덩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얘기는 누구나 들어보셨을 것이다. 같은 강도의 충격과 부담이라도 서서히 준비운동을 해서 몸을 푼 상태와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는 천지 차이이다. 맨손체조로 몸 푸는 것이 운동 경기 시청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급사에 대한 예방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가 알기론 아무도 연구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면, (보다 권장하고 싶은 방법인데) 지금부터 월드컵에 나가는 우리 축구팀과 함께 ‘몸만들기’에 들어가면 어떨까? 이 기회에 앉아서 TV 시청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뛰는 것이다. 물론 시작은 가볍게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납량특집 프로그램 앞에 흔히 나오는 말로 ‘임산부, 노약자는 시청을 삼가시기 바란다’는 문구가 있는데, 월드컵 경기 방송 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자막을 내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임산부 노약자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는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형편없이 망가진 몸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농담 같다고 해서 필자의 충심어린 권고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마시길!

20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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