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 토끼 육아기 (3)

–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필자의 아들 JY는 책 보는 것을 좋아한다. 만 세살도 안 된 주제에 무슨 영재 교육을 시킨 것도 아니니 글을 알 리는 만무하고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그저 책을 펼쳐들고 구경하기를 즐긴다는 뜻인데, 역시 혼자서 멀건히 책 구경하는 것보다는 아빠를 꼬셔서 읽히는 것이 아무래도 재미가 훨씬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석 노예’ 또는 조금 격을 높히면 ‘수석 시종장’인 필자가 잠시라도 한가한 기색을 보이면 여지 없이 쪼르르 쫓아와서는 손가락이 빠져라고 잡아다니면서 ‘뿍(book) 보자, 뿍 보자!’ 한다. (미국에서 day-care에 다니는 관계로 영어를 좀 한다. 아니, 뭐 한다기보다는 그냥 이 단어 저 단어가 튀어나온다. 아마, 한국에서 영어로 맹 훈련을 받는 또래 애들보다도 영어를 못 할지도 모른다. 고깝게 생각지는 마시길.)

이 가련한 노예는 손가락이 탈골되지 않으려면 질질 끌려가서 주인님께서 물리실 때까지 책을 읽어드리는 수밖에 없다. 대충 읽어드리면 지루해 하시니 성의를 다해 재미나게 읽어드려야 한다. 그게 지겨우면 무슨 설겆이라도 하든지 청소라도 하든지 집안일에 바쁜 척하면 맘씨 좋은 주인님께서는 좀 사정을 봐주시기도 하는 편이다. -_-;;; (참고 삼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책을 보는 것은 해당 안 됨.)

어느 일요일도 마찬가지였고 JY가 집어들고 온 책은, 음… 뭐더라, 제목도 생각이 잘 안 나네… 하여간에 늑대가 손발에 밀가루 칠하고 엄마 양인척 하고 새끼양네 집에 들어가 죄다 잡아먹고 어쩌고 하는 얘기였다. 헌데, 읽어주다 보니, 이 녀석, 늑대와 자기를 동일시 하는 것 같았다.

그 전에 본 동화 중에는 잘 알려진 ‘세마리 아기 돼지와 늑대’ (제목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고, 하여간) 가 있었는데, 잘 아시다시피 세마리 돼지 형제가 각기 집을 지었는데, 초가집(?), 판자집(?), 벽돌집을 각기 지었고, 늑대가 와서 후- 부니 초가집, 판자집은 다 날아갔지만 벽돌집은 괜찮았다는 얘기다. 그 얘기를 보고 나서는 신이 나서 여기 저기 후후 불고 다녔던 적이 있다. 하여간에 계통학적(?), 체질적(?)으로 양보다는 늑대에 가까워서 그런지 늑대 쪽이 뭔가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동화에서도 그랬는데, 손 발에 밀가루 칠하고 엄마 양인척 하는 늑대에 속아 새끼 양들이 문을 열어주자 늑대는 집안에 들어와 여기 저기 숨기 바쁜 새끼양들을 죄다 집어 삼켜버린다. 이런 잔인하고 폭력적인(?) 내용이 우찌 미성년자 관람가인지 잘 모르긴 하겠는데, 뭐 어쨌건 간에 늑대 편인 JY, 양을 ‘먹는’다니까 신이 났다. 참, 필자의 아들 아니랄까봐, 먹는 것은 어지간히 밝히는 편이라, 먹는 얘기만 나오면 즐겁다. ‘Sheep (양) 먹어? Sheep 먹어?’를 연발하며 벌떡 일어나서 몸을 흔들며 싱글벙글이다. 어휴… 하여간에…

그래서 그 많은 새끼양들을 다 잡수셔서 기분이 좋았는데, 어라, 책장을 좀 넘기니 상황이 역전된다. 한마리 겨우 몸을 숨긴 새끼양이 엄마양을 데리고 복수에 나선다. 배터지게 먹고 씩씩 자고 있는 늑대에게 가더니 가위로 배를 가르고, 그 안에서는 좀전에 먹었던 새끼 양들이 산채로 튀어 나온다. 배 속에는 돌을 넣고 꿰메더니, 깨어난 늑대는 비틀거리다 물 속에 빠져 죽고만다.

‘양들의 침묵’ 내지는 ‘한니발’에 필적하는 그 엽기적 잔인성은 뭐 그렇다 치고, JY는 완전 사색이 되었다. 아니, 먹을 땐 좋았는데, 배를 가르고 다 꺼낸 담에 돌을 넣어? 거의 울상이 된 JY는 필자를 붙잡고 ‘늑대 배, 아야? 늑대 배, 아야?’를 애처롭게 되풀이하였다. 배를 가위로 가르고 아까 먹은 걸 다시 꺼내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싶은 모양이다.

이 동화로부터 JY가 얻은 교훈: 첫째, 양은 먹지 말고, 밥을 먹자. 원래 먹던 거 먹어야지 괜히 엉뚱한 거 먹었다간 탈난다. 둘째, 꼭꼭 씹어 먹자. 음.. 늑대도 좀 꼭꼭 씹어 먹지 않구선…

‘Politically correct’ 옛날 얘기 시리즈가 번역되어 출판된 적이 있다. 백설공주는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일곱 난장이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얘기,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던 그 익숙한 얘기들을 난장판으로 헤집고 뒤집어 엎어버린 그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생각이 난다. ‘정치적으로 올바름’ 정말 쉽지 않은 얘기다. 도대체 뭐가 올바른 것인가?

왜, 양은 착하고 늑대는 나쁜가? 늑대도 먹고 살아야지 않는가?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이 뭐가 나쁜가? 늑대 배를 갈라서 돌을 집어 넣어 가며 잔인하게 복수하는 것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에서는 항상 ‘착한 편, 우리 편’과 ‘나쁜 놈’의 구분이 명확하다. 그러나, 그 나쁜 놈이 정말로 왜 나쁜지는 따지고 보면 모호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저 좀 성격이 나쁘거나 못됐기로서니(?) 결국에는 처참하게 죽거나 심지어는 죽여버리고 권선징악이라고 한다. 그 구실로 폭력은 자꾸만 확대 재생산되어 각종 만화 영화에서는 폭력이 판을 친다. 그 상대가 흉악하게 생긴 괴물이라든가, 외계인 등으로 교묘하게 바뀌어져 있을 뿐이다.

그 권선징악이라는 것 때문에 지금 세계가 난리다. 그저 ‘악의 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싹 쓸어버려야 한다니, 선과 악이란 것이 도대체 이 세상에 어디 구별이 가기나 가는 것인가? 자기가 보기에 ‘악’이라는 거지 그 반대편에서는 그 악의 축 운운하는 쪽이 ‘악’ 아닌가? 자기네가 보기에 악이라고 세상 나라들더러 다 이쪽에 줄을 서서 말 잘듣던지, 아니면 저쪽으로 가서 같이 쥐어 터지라고 강요하고 있다. 단순 무식하기 짝이 없는 허접 미국 애니메이션 수준의 세계관이라 할 밖에.

훨씬 복잡하게 꼬여있는 일본 만화 영화만 해도 그렇지는 않다. 지구를 침략해 오는 외계인들에게 우주 전함 한척을 거느리고 단기로 맞서 장렬하게 싸우는 ‘하록 선장’이 생각난다. 거기서 외계인은 결국 전멸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지구를 침략할 수 밖에 없는 그들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고 아픔이 있다. 아무렇게나 싹 쓸어버려도 그만인 괴물들은 아닌 것이다.

주제 넘게 애니메이션 비평까지 할 생각은 없고, 그저 새로운 고민 거리다. 도대체 애에게 뭘 보여줘야만 하는 것인지 말이다.

어쨌거나 간에 필자와 Y는 이 동화를 최대한 이용(?)하는데, 제법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것 같다. JY가 뭔가 말을 안 듣고 떼를 부리기 시작하면, ‘어? 뱃 속에 뭐 들었어? 미운 애기 뱃 속에 sheep 들었나? 어디 한번 열어보자’ 하면 JY를 질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못된 부모다.

20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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