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토끼 육아기 (2)

필자를 처음 만나는 사람 중에는 필자를 무척 얌전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자주 있다. 필자가 아주 외향적이고 시끌벅적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로 속속들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상학적으로 이마가 뒤로 넘어가거나, 눈썹 뼈가 튀어나왔다거나, 턱의 선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람은 고집이 세다고 한다. 헌데, 필자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고 (그렇다고 무슨 괴물이나 네안데르탈인의 형상을 상상하지는 마시길), 실제로도 필자를 잘 아는 이들로부터 가끔은 ‘똥고집’이라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뭐, 쉽게 얘기하면 ‘알고 보면 성질 드럽다’는 것인데, 아마도 필자의 첫인상을 그렇게 보지 않고 착하고 온순한 사람인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은 탓인지, 필자의 그런 면을 보고 나면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누가 그렇게 봐달랬나 뭐.

그런 성격 때문에 이제껏 살면서 심심치않게 ‘성질’과 ‘패악’을 부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온 것도 사실인데, 이제 그 업보를 갚는 것인지, 죄값을 치루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스스로 반성하고 사람되라는 하늘의 뜻인지, 필자는 최근 일생일대의 엄청난 강적을 만나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그 강적이란 다름 아닌 필자의 아들, 사랑스런 엽기토끼, JY이다.

필자는 운동 신경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탓에 자전거를 늦게 배운 편인데,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두발 자전거 타기를 처음으로 시도했었던 것 같다. 필자의 아버지께서 자전거 배우는 걸 도와주겠다고 뒤에서 밀어주셨던 것을 기억하는데, 필자가 한번 넘어지고 난 뒤, 그게 마치 아버지의 잘못이라도 되는 듯 신경질을 내고, 아버지에게 자전거에 손도 못 대게 했다고 한다. (필자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원래 불리한 부분은 기억이 잘 안 나는 법이다.) 그러고 결국 자전거 타기를 제대로 못 배웠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결국 자전거를 제대로 탈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쯤 되어서였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서운한 기억으로 이 일을 기억하셨던 모양이다. 뭐 애써 좋게 말하면 너무나 독립심이 강하고 자존심이 세어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고, 간단히 얘기하면 못된 성질에 똥고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JY가 9개월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던 때라 어제 하던 짓과 오늘 하던 짓이 다른 판이었다. 필자가 한두 주 동안 좀 바빠서 JY를 돌보는 데 별로 시간을 할애하지 못 하다가 어느 날 낮에 혼자서 JY를 보고 있던 중에 전과 다름없이 밥을 (실제론 죽) 떠먹여주려 하자 웬일인지 마구 짜증을 내면서 먹지 않으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허 참, 이상하다, 얘가 왜 이러나, 하면서 그래도 굶길 수는 없으니 억지로 먹여 보려 했더니, 손으로 숟가락을 탁 쳐내면서 화를 내더니만, 그것도 모자라 아예 밥그릇을 확 뒤엎고는 악악대며 성질을 피우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하면서 난감해하고 있던 중에 Y가 들어와서 하는 말, “걔, 요새 자기가 떠먹기 시작했어.”

이제 9개월 된 놈이 떠 먹여주는 거 받아먹는 건 싫고, 지가 떠먹겠다고? 새로 밥을 줘보니 마구 엉망으로 흘리면서 신나게 퍼먹는다. 뭐, 비교적 빠르게 스스로 숟갈질을 하는 것은 대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애비가 밥 먹여주는 걸 그렇게 지랄(!)을 하면서 거부해야 하냐? 이런 엽기토끼가 있나!

그의 이런 턱없는 똥고집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밖에서 나가면 느닷없이 마구 뛰어가는데, 위험해 보여 그의 앞길을 억지로 제지할 수밖에 없는 때가 흔히 있다. 오히려 가지 말라고 하면 기를 쓰고 그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이 보통이고, 결국 힘으로 제지를 하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독립투사라도 되는 듯이 두 주먹 불끈 쥐고 온 몸에 힘을 주고 저항하면서 끌려가곤 한다. 퍼덕거리는 것이 황새치같아 늙은 애비(?)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필자가 평소에 인심을 워낙에 잃어 놔서 그런지, 필자의 주위에서는 JY의 똥고집에 허구헌날 당하면서 사는 필자의 신세를 아무도 동정해주지 않는 것은 물론, ‘인과응보다’, 내지는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하면서 낄낄거리면서 즐거워하는 분위기다.

JY의 턱없는 ‘독립심’과 관련된 일화들은 계속 이어지는데, 블록 맞추기 (레고 같은 종류)를 할라치면 아빠가 같이 노는 것은 좋지만 뭔가 자기의 원칙에 따라서 블록이 쌓아지지 않으면 가차없이 빼버리고 다시 제 손으로 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데, 황당한 것은 필자가 꽂은 것을 맘에 안 든다면서 빼서는 다시 똑같이 꽂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영 마음에 안 들면 일껏 쌓은 것을 왕창 다 부시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만 한다.

그러다가는 놀이의 초점이 흔히 바뀌게 되는데, 제법 높다랗게 쌓아올린 탑을 부셔버리려고 할 때, 필자가 ‘어어, 어!’ 하는 것을 보더니 ‘어, 이게 더 재미있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졸지에 블록 쌓기 놀이가 ‘블록 탑 무너뜨리겠다고 아빠 위협하기’로 바뀌면서, 손을 휙휙 휘저으면서 필자가 ‘어어어…!’ 하는 것을 깔깔거리면서 보고 즐기곤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좀 한심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들 녀석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장난감이 되어 골탕을 먹어주는 것은 뭐 그다지 기분 나쁘진 않다.

미국으로 올 때 돌이 막 지난 때였는데,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는 (필자가 한 달쯤 먼저 오고 그는 Y와 외삼촌과 함께 나중에 따로 왔다.) 마일리지를 써서 비즈니스로 승급을 해서 왔기 때문에 비교적 자리가 넓은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좌석’이 없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시를 하는가 하면 스튜디어스가 자기에게 와인을 따라 주지 않는데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독립심이 강한 애기라 그런지 JY는 day care center에 보내기가 수월하였다. 돌 반이 채 되지 않아 보내기 시작했으니 그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서 하루 종일 지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고, 처음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애먹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모와 떨어진다고 울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한 일주일 지나니 day care에 빨리 가자고 아침마다 성화였다. 신발을 찾아가지고 와서는 아직도 자고 있는 필자를 두들겨 패면서 빨리 데려다 달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애를 찾으러 가보면 장난감 붙잡고 자기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듯이 집에 가자고 해도 말을 안 듣는 경우까지 있었다. 어떤 때는 필자나 Y에게 장난감을 하나 쥐어 주기도 한다. ‘좀만 더 놀다 가자! 넌 이거 갖구 놀아!’ 뭐 대충 그런 뜻인 것 같다.

쉽게 적응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고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한 경우도 없지 않은데, day care에 저녁에 데리러 가서 집에 가자고 해도 들은 척도 안하고 딴전을 피우거나, 엄마나 아빠가 나타나면 (보통 다른 아이들이 그러듯이) 뛰어와서 안기는 것이 아니라, 뛰어오기는 오는데, 휙 지나쳐서 밖으로 나가버린다든지 할 때는 거기 선생님들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Y가 JY에게 정색을 하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야, 니가 그렇게 엄마가 집에 가자고 해도 무시하고 선생님들 앞에서 무안주고 그러면 엄마는 너무 섭섭해!”

두 살도 안된 녀석이 뭘 알아듣겠나 했지만, 웬걸, 다음 날, JY는 엄마가 나타나자 천사같이 웃으면서 뛰어와서 폭 안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요물!

생각해보면, JY는 갓난 아기 적부터 품에 폭 안겨서 가만히 있는 적이 없었다. 워낙에 몸이 따끈하고 열이 뻗치는 녀석이라 안고 있으면 겨울에도 따뜻해지고 여름이면 땀이 배어 견딜 수가 없다. 안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더워지면 그는 무척 짜증스러워하곤 했다. 안아 주는 것 싫어하는 갓난 아기… 상상이 가시는지? 그러던 것이 좀 커서도 부모라도 껴안아 주는데는 상당히 인색해서 그저 잠깐이지 조금만 오래 안고 있으면 버둥거리고 난리가 난다. (그럴 때 Y는 일부러 더 꼭 껴안는다. 필자가 그의 ‘밥’인데 비해, 그녀는 확실히 JY의 ‘호적수’다.) 그런 그가, 부모의 불평을 무마(?)하기 위해 천사같이 안겨준 것이다.

집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고 밖에 나가 놀지 않으면 좀이 쑤셔하고 밖에 나가면 집에 기를 쓰고 안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는 필자와 Y는 “야, 남들이 보면 집에서 학대라도 하는 줄 알겠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곤 했다. 이곳은 미국이 아닌가. 낌새가 이상하면 옆집에서 전화 걸어서 아동 학대하는 것 같다고 신고하는 나라다. (그게 꼭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헌데, 어느 일요일 오후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 문을 열어본 필자는 기절 초풍하였다. 경찰이 와 있는 것이다! 경찰 불렀수? 아니…요? 집에 어린애가 있지 않우? 그런…디요? 그 때 JY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부모는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인간들이지만 손님이 오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실 그렇지 뭐.) 누가 왔나 하고 눈을 반짝거리며 신나서 나와본 것이다. 아랫도리는 홀랑 벗고 말이다. (요새 용변 가리는 연습 하느라고 집에서는 기저귀를 벗고 있음) 그 꼴이 하도 명랑해 보여 그다지 학대받는 아동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약간 기가 막힌 경찰 아저씨.

“니가 경찰 불렀니?”

“…” (괜히 수줍은 척 네숭 떠는 JY)

“전화가 왔는데 무슨 소린지는 모르지만 애 소리가 난다고 해서 와봤지요. 그럼… 이만…”

(할 말을 잃은 필자, 휙 돌아서서 가는 경찰 아저씨 뒤통수에다 대고)

“…. 죄송… 혀유… 크…”

(돌아서서 JY에게)

“야! 너 911 눌렀어?!”

“…” (내가 뭘? 하는 표정의 JY)

집은 너무 재미없는데, 게으른 아빠는 데리고 나갈 생각은 안하고 집에서 뭉기적거리고 있고, 경찰 아저씨라도 불러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두 살짜리 녀석이 911을 어떻게 눌렀는지는 미스테리지만 말이다.

JY는 필자로서는 정말 감당이 안 되는 강적이다. 힘과 기에서 모두 압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만, 그는 아마도 똥고집에 지고는 못사는 성질 드러운 필자가 대오각성하고 인간되게 한 수 가르쳐 주려고 삼신할미가 보내준 엽기토끼인 모양이다.

2001.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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