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자연계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고들 한다. 느리고 힘없는 놈들은 늘상 자기보다 강한 놈에게 당하고 잡아 먹히기 마련이고 이것은 너무나 엄연한 현실이어서 사자가 갑자기 얼룩말에게 “우리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라고 하는 상황은 영영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긴 뭐 ‘라이온 킹’이나 (사실 보지는 않았음) 좀 옛날 만화지만 ‘흰 사자 레오’ 같은 만화에 보면 사자가 온 동물들을 다 지켜주는 것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혹시는 깡패가 시장 상인들에게서 상납을 받고 다른 깡패들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은유는 아닐까?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먹이 사슬과는 약간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적자 생존과 자연도태라고 하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이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 Herbert Spencer와 같은 –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Social Darwinism은 주로 극우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되었고 적자 생존과 자연 도태라는 현상이 사회를 보다 ‘바람직하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주장으로, 빈곤한 계층은 부적자(不適者)이므로 이들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하여 이를 구제하려는 국가의 개입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방해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나아가서는 인종주의를 부추겨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하는 이론으로도 이용되었다. 다윈 자신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법칙이 인간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견해를 후에 밝혔다고 전해진다.

경쟁이란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일 뿐 아니라 세상을 더욱 발전시키는 미덕으로 칭송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경쟁이 없는 사회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동네에 중국집이 하나 뿐이어서 경쟁이 없고 고객으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이 중국집에서 배짱을 튕기며 짜장면 한 그릇은 배달이 안 된다고 하면 열불이 치밀어 어쩔 것인가.

하지만 ‘나의 경쟁 상대는 독일 주부’라는 캠페인까지 벌려가면서 꼭 경쟁을 해야하나 싶은 일에까지도 뭔가 억지로라도 피터지게 경쟁을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이 사회 분위기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좀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이 사회에 과연 경쟁이 부족한 것일까? 어떤 곳에는 분명 경쟁이 필요할 것이다. ‘철밥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무능력하고 불성실할 때에는 떨려나갈 수도 있다는 자극이 있어야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평균적인 수준으로 보았을 때는 어떨까? 우리 나라가 경쟁이 없는 사회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글쎄, 간첩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서울 거리에서 30분만 운전을 해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사소한 일상에서까지 치열한 전투 정신을 요구하는지 실감할 수 있다. 섣불리 끼어들기라도 했다가는 빵빵 거리고, 번쩍번쩍거리고, 손가락질하고, 다행히 들리지는 않지만 낮선 사람의 입에서 느닷없이 강아지도 되고 송아지도 되는 일이 벌어진다. 물론 문을 열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사람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고도 분을 못 참아 붕~하고 냅다 앞질러서 다시 앞으로 획 끼어들면서 ‘복수’하는 사람도 있다. 그저 운전을 한다기보다는 거칠기 짝이 없는 카 레이싱을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혼자서 갈 때는 점잖게 가던 사람들도 옆에서 추월하려고 하든지 끼어들겠다고 깜박이만 켜면 ‘그것만은 안되지’라고 생각하는지 느닷없이 속력을 내면서 확 달려든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끼어들기할 때에 미리 깜박이를 켜지 않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다. 그저 공간이 있으면 잽싸게 끼어들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공간이 없어도 밀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깡패들이 담력 겨루기 (사실은 ‘만용 겨루기’라고 해야겠지만) 할 때에 하는 짓이 철길에서 손 마주 잡고 있다가 기차가 올 때 누가 먼저 도망가나 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운전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된다. 대개 ‘받을테면 받아 봐!’ 또는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 모두 비켜라아~!’ 라고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런 살벌한 판에서 벌벌 기고 있는 초보 운전자들은 완전한 ‘밥’이다. 보호해주려 하거나 양보해주려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뭐 하려고 기어나와서 저 X랄이야!” 하는 욕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리라. 여성 운전자들은 또 다른 밥이다. “예편네들이 뭐 한다고 차를 끌고 나와서…” 어쩌구 저쩌구… 더 말해 뭐하랴.

이 사회에서 경쟁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기는 하지만, 정말 피튀기는, 본격적인 경쟁은 대학 입시에서 시작된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 경쟁에서 대부분은 패자로 남는다. 합격을 한 사람 중에서도 정말 입시의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만 따진다면 또 얼마가 패자로 분류될 것인지. 정말 본격적이고도 실질적인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는 취업의 관문에서도 엄청난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시절이 어려워진 지금은 정말 극소수만이 승자로 남는다. 그럼 그 나머지는 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무도 2등을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세상에 1등은 하나 뿐인 것이다. 하나 뿐인 1등만이 중요하고 다른 모든 2등 이하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도 좋단 말인가? 물론 공정한 경쟁에서 이겼다면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보상이 없다면 누가 죽어라고 경쟁을 하겠는가. 하지만 경쟁에 탈락한 사람이 실업자가 되든, 노숙자가 되어 길거리를 헤메든, 마약 중독자가 되든,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지든,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 떨어지고 못난 것이니 개인의 책임이고, 따라서 사회 전체로서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당연한 일이라면 인간 사회가 TV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와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동물의 세계가 그러하니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 세계도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인간도 동물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정히 그 쪽이 자연스럽게 보인다면 다 옷이고 뭐고 벗어던지고 돌도끼 들고 우가우가 하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돌도끼를 사용하는 것조차도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컴퓨터에 인터넷에 핸드폰에 자동차에, 동물들은 안 하는 온갖 짓을 다 하면서 유독 적자생존은 자연의 법칙이니 이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는가?

1등과 2등을 가려야만 하겠다면 경쟁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 경쟁이 과연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또 100명 중 능력이 뛰어난 10 명과 능력이 남달리 처지는 10 명을 구분하는 데에도 필요할 것이다. 이 사회에 능력이 특별히 탁월한 사람들도 있고 영 시원치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간은 어떤가? 과연 누가 누구보다 낫다고 정말 객관적이고도 공평무사하게 평가할 방법이 있는가? 월러스틴은 이 중간 80명에서 누구를 뽑을 것인가는 차라리 추첨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의 전 구성원을 1등에서 꼴찌까지 순위를 메겨서 일렬로 세워야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다.

인텔사의 앤드류 그로브 회장은 그의 저서에서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라고 하였다. (필자는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정신착란증에 걸린 사람처럼 초긴장 상태로 항상 경계하는 자만이 경쟁에서 이긴다’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너나 그렇게 살아라!”

이 사회는 정말 모든 사람을 경쟁의 편집광으로 몰아가고 있다. 6개월 짜리 애기를 남들보다 ‘똑똑하게’ 키우려고 ‘플래쉬 카드’인지 뭔지를 보여 주는데, 울고 보채고 5분도 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애를 붙잡고서 영어, 불어, 중국어, 구구단, 기타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나오는 카드를 끝없이 보여 준다. 편집광적인 행동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과연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할 수 없다.

오직 어떻게 하면 남들을 경쟁에서 꺾을 수 있을 지만을 생각하는 편집광들로 가득 찬 세상을 상상해보라. 남들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공동체적인 심성은 둘째치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남보다 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밤낮없이 골몰하는 인간들이 득시글대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니, 상상하려고 애쓸 필요는 별로 없다.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이 그것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으며 지금 이 정도로는 모자라서 더욱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 투성이니까.

과연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세상의 부와 재산의 80%가 상위 20%에 집중되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전세계 컴퓨터 산업을 쥐락펴락하는 기업인 인텔의 총수 정도라면 편집광으로 산들, 살벌한 경쟁에 피를 말리든 이상할 것도 없지만, 세상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도 그를 따라해야 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 거리에 나서서 비장한 전투 모드가 아닌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1999.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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