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쇼는 물러가라?

작년 11월 30일, 전국의 의사들이 서울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의약분업으로 말미암아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된 개원의들이 주축이 되어 가진 이 성토대회는 의사들도 이렇게 한데 모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의사들이 처한 위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필자는 의약분업이나 의사들의 주장에 대해서 말하고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이날의 집회로 인해 필자에게 든 조금 다른 생각을 쓰고자 시작한 것이다.
이날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많은 의사들이 하루 내지는 반나절을 휴진하였다. 사실 상의 짧은 시한부 파업을 한 것이었다. (물론 파업을 하노라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필자는 이것을 보고 그날 저녁의 뉴스 보도가 어떠할 것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놀라웠고, 그 예상과 정확하게 똑같은 보도가 나오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고 짜증이 났다. (물론 필자가 의사이기 때문에 생긴 반응일 것이다.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야 뭐…)

“오늘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회가 장충체육관에서 있었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개인의원들이 휴진을 하는 바람에 시민들은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야 하는 등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이어 시민들의 반응.

“환자를 담보로 이런 행동을 하다니 이건 집단 이기주의 아닙니까?”

필자가 기억력이 나쁜 관계로 있었던 그대로 옮기지는 못 하겠고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장충체육관 집회가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집회는 아니었다는 점 등등 보도의 부정확성도 문제지만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언론이 그토록 수도 없이 반복하여 떠드는 ‘시민의 불편’,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서이다.

이런 광경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아니, 수도 없이 보아온 너무나도 낯익은 일인 것이다. 지하철이 파업을 할 때도 그러하였다. ‘시민의 발을 담보로 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 하다니…(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하는 얘기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지하철 공사 직원의 월급이 얼만데, 그 월급을 받고도 저 X랄이냐, 그거보다도 못 버는 나도 가만있는데, 등등 (이건 물론 방송에 나온 얘기는 아니다) 하여간에 비난 일색이었다.
어느 업체에서 파업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 업체가 파업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손실액이 얼마이고, 해외 바이어들이 계약을 취소하고, 국가의 신임도가 떨어지고, 수출에 차질이 빚어지고, 등등….

물론, 물론, 다 맞는 얘기일 것이다. 지하철이 안 다니면 불편하다. 공장이 안 돌아가면 손해를 본다. 의사가 진료를 안 하면 환자들은 또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하지만, 지하철을 못 타서 불편한 그 ‘시민들’도 또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파업 이외에 그에 항거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평범한 노동자이다. (노동자라는 말이 영 마음에 안 든다면 근로자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함으로써 나에게 조금의 불편이 생기는 것은 참아줄 수 있고 또 참아주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라는 것은 편리하고 능률적이지 않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각기 자기 주장을 하고 서로의 이익은 충돌하기 마련이고 그런 집단간의 협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질질 끌거나 결렬되는 일이 흔하다. 원래 그렇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이나 한 집단의 이익은 희생해야 하고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우리들 모두에게 깊이 박혀 있는 것은 왜일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필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학교에서 ‘이타주의’의 숭고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수류탄이 굴러들어 왔을 때 몸으로 덮어 부하들을 구한 군인이나, 제방에 뚫린 구멍을 밤새도록 막고 있었다는 네덜란드의 팔뚝 굵은(?) 소년이라든지, 그 밖에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이의 목숨을 구하는 – 전형적인 – ‘리더스 다이제스트’ 스토리들.

물론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그러한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노인이 앞에 있는데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호통을 치는 노인들을 가끔 보는데, – 필자를 버릇없는 놈이라고 욕할지는 모르겠지만 –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은 아니다. 어떤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면, 희생을 하지 않고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마겟돈’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죽기 싫어서 (아플까봐?) 혜성에 심은 폭탄을 터뜨리지 않았다고 ‘나쁜’ 놈이라고 비난할 수야 있겠는가? (뭐 그런 입장이라면야 스위치를 누르는 것 외에 별달리 뾰죽한 수도 없을테니 ‘어리석은’ 놈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구와 전 인류를 구하는 일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필자의 아내인 Y도 그런 일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지하철에서 웬 노인(사실은 노인과 중년의 중간쯤 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이 다짜고짜 일어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자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Y는 당시 임신 6개월이 되었을 때인데 배가 많이 부르지 않아 표가 별로 나지 않았었다. Y가 한숨쉬면서 하는 말이 그런 노인들은 주로 만만해 보이는(?) 젊은 여자들을 주된 목표로 삼는단다. 뭐, 하긴 요즘 세상에 아무나 보고 이놈 저놈 했다가는 노인이라도 봉변 당하기 십상이긴 하다. 그 노인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노인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젊은이가 괘씸한 놈일 수도 있겠지만, 임신 중일 수도 있고 몸이 아플 수도 있고 심지어 금방 눈에 띄지는 않아도 장애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저런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조용히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을 소리를 버럭 지르고 창피를 주어 일어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어른 공경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노약자’의 논리가 아니다. 사실은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고 한 개인의 사정이나 품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깔아뭉개는 지배자의 논리인 것이다.

하여간에 이 사회는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지 않으면 무조건 나쁜 놈, 이기주의자로 매도하기 마련이다. (어떤 좀 더 한심한 사람은 이럴 때 ‘개인주의자’라고 욕을 한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란 말의 뜻을 구별 못 한단 말인가?) 하지만 전체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개인이나 소집단의 권리는 무시해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할까? 파시즘! 바로 그것이다.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더라도 그저 꾹 참고 일해야 하고 ‘시민’들이 ‘불편 없이’ 출퇴근할 수 있도록 지하철은 무조건 운행해야 하고, 의사들은 환자들을 위해서 적자가 나도록 수입이 깎여도 군말 없이 진료를 해야한다면, 다들 국가와 민족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고 울분이 터지고 생계가 위협받아도 입 꾹 다물고 시키는대로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한다면, 또 그러지 않는다면 죽일 놈으로 몰고 달겨들어서 짓밟아버린다면, 그것이 파시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하철이 파업한다고 불편하다고 난리를 쳤던 그 사람들이 다음에는 바로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접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려 했을 때에, 다시 다른 ‘시민들을 불편하게’한다면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도 그 주장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려는 행위 자체를 부당한 것으로 몰아 버린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행위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파쇼적인 행위가 국가권력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며칠 지하철이 안 다녀 불편하다고, 개인의원들이 한나절 문을 안 열어 불편하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대는 그 잘난 ‘시민들’, 바로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독재타도를 외치던 80년대에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반민주적인 정권이 목표였고, 다른 목표는 생각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 다른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제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되었다. 타도해야 할 파쇼는 이제 우리 안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의사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하기에 매우 불리한 위치이다. 아무도 핍박받는 노동자와 같은 수준으로는 취급해주지 않는다. 이미 ‘배부른’ 놈들이 자기 밥그릇 뺏기지 않으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밖에는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의사도 ‘시민’이다. 어느 시민 좋자고 어느 시민은 일방적으로 희생해도 좋단 말인가? 시민이라면 자신의 이익이 부당하게 훼손되는 경우에 이에 대항할 권리가 분명 있는 것이다. 누가 무조건 입닥치고 있으라고 한다면 외치자. ‘파쇼는 물러가라!’

2000. 1. 7.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