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발의 사관(士官) (1)

흔히 군대 이야기는 평생 술안주 감이라고들 한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가장 큰 공감대라고도 한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 시절의 고생담을 심심치 않게 남들에게 얘기하게 되고 또 드물지 아니하게 그 이야기는 소주 한잔의 힘을 빌어 고생담이나 경험담의 차원을 넘어서 거의 무용담의 수준으로 비화되곤 한다.

필자는 국가관이 희박해서인지 나약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군대가 사람을 만든다느니, 남자라면 모름지기 군대를 다녀와야만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다느니 하는 말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군대를 다녀와야만 사람이 된다면 군대를 안 다녀온 사람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곱게 키운 우리 딸, 방위 사위 웬말인가!’ 하는 표어도 있다던데 군대가 뭐길래 이런 말이 나오는지. `동방불패’ (동네 방위는 불쌍해서 패지도 않는다.) 나 UDT (우리 동네 특공대), KGB (코리안 … 에고, 그만두자.) 등등의 말들은 군대를 현역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임이 분명할 것이다. 좀 무성의한 것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숲 속에 있는 사람이 숲 전체를 볼 수는 없다는 말처럼 어쨌거나 현재 군인인 내가 군대가 내 인생에서 가지는 의미를 무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야기는 몇 년, 혹은 십수년이 흐른 뒤에나 다시 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훈련병으로써,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관후보생으로써 내가 겪은 조금은 남다른 경험에 관한 것이다. 남다르다고 하는 뜻은 한편으로는 내가 보통 세상 사람들 중 아무도 도대체 훈련다운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래서 제대로 된 군인으로 봐주지도 않는, 군의관이 되기 위한 사관후보생이었다는 점에서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할 이야기가 흔히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무용담류의 –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훈련을 받고 또 얼마나 지독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내었는가 – 이야기와는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마지막으로 맞는 아침이다. 아버지 어머니와 작별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30년 가까이 살면서 열흘 이상 집을 떠나본 기억이 없다. 내일 모레면 서른이 될 늙은(아! 정말 싫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이란 어떠할른지. (이렇게 늙어서 군대에 가는 사람은 군의관 외에는 드물 것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 직장에 나가야 하는 어머니의 얼굴이라도 마지막 보려면 졸립지만 일어나야한다. 어머니는 나가시면서 그저 잘 다녀오라고만 한다. 살짝 웃으시기까지 한다.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자 함이었을까? 군대에 가면 힘들고 몸이 아플 때 어머니부터 생각이 난다는데, 나도 과연 그럴까? 만약에 어머니와 내가 아들과 어머니가 아닌 그저 남남으로 우연히 만났더라도 나는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허둥지둥 짐 꾸리는 것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집을 나서야 한다. 집에 계시던 아버지와 이별해야한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려니 이제 한참 동안을 여기 돌아오지 못한다 생각하니 묘한 기분에 젖는 판국에 아버지가 내게 다가 오셨다.
“악수를 하기는 안됐고…”
나를 와락 껴안으셨다.
“잘 해…”
오… 맙소사… 눈물이 솟아오른다. 내가 눈물을 흘린 게 도대체 얼마만의 일인가.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 얼굴에 수염이 난 이후로 아버지와 포옹해 본 것은 이번이 정말로 처음이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역시 눈물이 맺힌 아버지의 두 눈.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서서 솟아오르는 울음을 참아야했다.

몇 달이 지나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나의 콧잔등은 시큰해지고 가슴 한 구석은 척하니 가라앉는다. 혹시 연극 배우가 된다면 우는 연기만은 자신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요할 때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가 5년이라는 꽤나 긴 시간 동안을 보내었던 나의 직장인 병원에 도착하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제 가노라고 인사를 하였다. 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들은 몸 건강히, 다치지 말고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라는 이야기들이다. 그저 의례적인 인사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그 이야기들을 뼈저리게 되새기게 될 줄을 그 때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이제 군대에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동행할 사람을 만나러 갈 차례다.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Y를 만났다. 그녀가 나를 걱정해서 싸준 이런 저런 물건들을 이미 빵빵해져 버린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사병으로 입대하는 사람들은 맨 몸으로 들어가는데 뭐 저리 준비물이 많으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많지만 다 늙어서, 그것도 병원 생활에 찌들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만 볼록한 형편없는 몸으로 군대에 가는 거니 몸 사린다고 너무 비난만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와 나의 약혼녀인 Y와는 참으로 많이도 헤어지고 만나고 또 떨어졌다가는 또 만나고 했다. 그것도 한 번 헤어졌다하면 그다지 간단하게 만날 수가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곤 하였다. 도보나 버스, 지하철 등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비행기나 배, 또는 핵잠수함을 이용하거나 최소한 뗏목이라도(?) 있어야만 갈 수 있는 곳으로 그녀는 떠나갔다가 잠깐씩 돌아오곤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가면 가나보다, 오면 또 오나보다하던 것이 언제부터인가는 헤어질 땐 슬프고 없으면 그립고 만날 날을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고, 처음 만날 적에는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헤어지는 것도 연습하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 쌀쌀한 날씨가 아직은 봄이 멀었다고 알려주는 2월의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을 놔두고 군대에 가기 위해 이별해야만 하는 순간에 그 동안 몇 번 헤어졌다가 만나면서 `이별 연습’을 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수 있을까.

그녀와 마주 앉아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아버지와 작별하던 순간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때의 느낌과 앞으로 있을 그녀와의 이별에 대한 예감이 합쳐지며 갑자기 또 눈물이 솟아올랐다. 아, 내가 도대체 왜 이러나. 웬 고장난 수도 꼭지란 말인가. 고작 몇 달 훈련받으러 가는 것 가지고. 어디 전쟁에라도 나가기라도 하나?

하지만 눈물은 흘러 내렸다. 그래, 남자라고 울지 말란 법 있냐.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이 `싸나이’의 미덕이라고들 하지만 그토록 부자연스럽게 감정을 억누르거나, 아니면 목석같이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는 것이 뭐가 그렇게 멋진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눈물이 나는데 울어야지 그럼 어쩌란 말이냐. 에라, 나도 모르겠다. 청승맞던 궁상스럽던, 울자, 울어.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참으려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내가 가면 그녀도 울까? 지난 번 헤어질 때 공항에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번에도 그렇게 의연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무척 위안이 될텐데. 하지만 내가 입영하게 될 곳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그녀는 내내 울었다. 얼굴 쳐다보다가 갑자기 울고, 어깨에 기대어 울고, 창 밖을 보면서 울고. 하여튼 그렇게 울보인줄은 정말 몰랐었다.

나는 ‘사회에서의 마지막 밤’을 작은 아버지 댁에서 묵고 아침에 영내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Y와 술 한잔을 나누었다. 이것도 마지막, 저것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절로 비감한 생각이 떠올랐다. 젠장, 뭐 전쟁에 나가기라도 하나. 왜 이 난리야. 오늘따라 이놈의 알콜은 왜 이리 척척 목에 감기어서 확확 머리 위로 솟구치는지.

아침에 일어나자 Y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가는구나…”
나는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목적지로 가는 차 안에서 그녀와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앉아있기만 했다. 입영할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의 친구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가보니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우리는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로 얼마 남지 않은 피같은 시간을 흘려보내었다. 그녀가 타고 돌아가야할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그녀에게 말했다.
“야, 기차 시간 늦겠다. 그만 가라.”

“싫어. 좀 있다가. 더 시간 늦은 걸 살껄 그랬나봐.”

“늦는다니깐?”

“늦으면 환불하지 뭐.”
쓸데없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시간은 갔다. 나의 친구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여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고 사진도 찍고 하니 정말 그녀를 보내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제 정말 가라.”

그녀는 나를 잠깐 쳐다보고 있더니만 갑자기 내 팔을 급하게 잡아 끌고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곤 내 친구들이 안 보이는 곳에 도달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이젠 아예 엉엉 우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를 안고 들먹이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는 것뿐이었다. 협심증이라면 이런 증상일까. 가슴 한가운데가 꽉 메인 듯한 이 기분.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순 없었다. 여전히 최루탄 맞은 듯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녀를 억지로 택시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곤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 안보이게 될 때까지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래, 잠깐이다. 우린 금방 다시 만나게 돼.’
아직도 무겁기만 한 가슴을 안고 친구들에게로 돌아와 우울함과 앞 일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떨쳐보려고 실없는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이윽고 우리들은 택시에 나누어 타고 입영 장소로 향했다. 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키어 웅성대고 있었다. 우리들은 사뭇 용감한 척 쓱쓱 걸어 들어갔다. 군대 안에는 군기가 서리어 봄이 되어도 꽃이 안 핀다던가. 바깥하곤 바람부터가 다른 것 같다. 나중에야 그것은 내 마음이 춥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지만. 지금부터 난 어떻게 되는 건가?

일주일 동안은 신체검사 기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로 할 일없이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줄을 몰랐다. 도박과는 좀 거리가 먼 필자이지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카드를 쳤다. (50원 짜리 ‘훌라’라고 그러면 거의 모든 사람이 비웃을 것이다. 거의 양로원 수준일테니까.) 아직 우리는 군인이 아니라 ‘장정’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기를 쓰고 말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운동, 전화 걸기 (매우 효과적으로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정작 전화 거는 시간은 얼마 안되지만 대충 사오십분 정도는 줄에 서서 기다리느라고 보내야 했으니까.), 책읽기, 낮잠, 심지어 윷놀이에 이르기까지 (나는 윷놀이가 그렇게 재미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역시 우리 것은 소중한 거시여~.) 시간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한편으론 이제 다가올 본격적인 훈련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시간이 좀 천천히 갔으면 하는 생각과 그래도 빨리 세월이 가야 훈련을 마치고 임관할 것이라는 상반된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는 점에서는 걱정이란 걸 할 필요가 없다. 유명한 격언이 말해주듯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놔도 간다.’ 옛 성현의 말씀 중 틀린 것이 없다질 않는가.

어느 날씨 화창한 (그러나 바람은 아직 싸늘한) 토요일, 드디어 우리들은 7주간 군사훈련을 받아야 할 장소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7주란 시간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느껴지는지. 7주후의 토요일은 과연 오기는 오는 것인가? 뭔가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려 애써봐도 어쩔 수 없이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을 애써 추스리며 불안감 속에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나는 깜빡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잠을 깨보니 버스는 이미 `학교’ (내가 훈련을 받은 장소를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짐을 들고 운동장, 아니 연병장 (똑같은 장소를 일컫는 말이지만 참으로 큰 차이가 있다.)에 불안한 시선을 여기 저기로 돌리면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 때, 우리의 전방 12시 방향에,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해 보이는 다리를 가진 확실하게 `군인 아저씨처럼’ 생긴, – 당사자에게는 약간 실례되는 표현일른지 모르겠지만 – 투견(鬪犬)을 연상케하는 모습의 어떤 사람이 다리를 어깨 두배 넓이로 쩍 벌리고 서서 우리들을 향해 벽력같이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뭣들 하나! 빨리 내려라!”
찍-. 에고, 난 이제 죽었다.

1995.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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