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가방 잃어 버리기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수들의 경험이 쌓여가면 남의 실수이든 자신의 실수이든 엔간한 것은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할 여유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런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자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의 경험을 쌓아 가는 것은 참으로 힘들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그 실수가 황당한 것일 수록 값진 경험은 되겠지만 그 실수를 저지른 자신에 대한 분노를 삭히는 일은 꽤나 정신 건강에 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다지 꼼꼼하지도, 치밀하지도 못한 성격 탓에 이 날 이 때까지 살아 오면서 ‘아차!’ 라든지 ‘앗!’ 등의 외마디 비명을 지를 일이 심심치않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실수들로 인해서 나 자신이나 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일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여튼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참으로 화나는 일이지만 화 낼 대상이 자기밖에 없기에 더욱 한심한 것이다.

지하철이란 이 교통 지옥에서 무척이나 훌륭한 교통 수단임은 틀림없지만 반면에 이용하기에 무척 지루한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눈길을 둘 곳이 없질 않은가. 아리따운 아가씨가 서 있다고 침 흘리면서 쳐다보다가는 미친 놈 아니면 치한으로 오해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밖엔 쳐다 볼 것이 없는 걸 어쩌랴. 잠시의 시간이라도 건설적으로 쓰자고 책을 보는 등의 일도 가끔은 해보지만 불행히도 나에게는 참으로 잘 맞지 않는 일이다. 그저 내가 하는 일이라곤 멍청히 생각에 잠기는 것뿐이다. 매우 비 생산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때론 유익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일도 있으니 그다지 나쁜 버릇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이 버릇이 지나쳐 엄청난 고생을 사서하게 될 줄이야.

나는 언제나처럼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이 생각 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전문의 시험, 그리고 이번 주말까지는 전문의 시험 원서를 접수시켜야 하는데 무슨 서류들을 챙겨야 하나 등등의 시시껍쩔한 생각에 잠겨 있었고 지하철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내릴 충무로 역이 되었고 내가 내리려고 하는데 내 앞에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일어 나는 것이었다. 그 앞에는 나와 어떤 아주머니가 서 있었는데 이럴 경우 절묘한 바디체크(?)로 자리를 확보하려 드는 조금은 몰염치한 아주머니들을 보는 것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닌데 이 점잖은 아주머니께서는 나더러 앉으라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에고, 내가 무슨 할아버지라도 되나. 아닙니다, 저도 내립니다, 하하… 하면서 기분 좋게 내려서서는 4호선으로 갈아타려고 계단을 올라갔다.

‘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사 면허증을 복사해야지. 전문의 시험 원서 접수 서류 중에 의사 면허증 사본이 있었지. 휴… 나 이거 없어진 줄 알고 얼마나 황당해 했는데… 4년 전에 인턴 시험 원서 낼 때 한번 보고는 본 적이 있었어야지. 가만, 가방 속에서 구겨지지는 않았…. 앗!’

이럴 수가. 응당 가방이 걸려 있어야 할 내 어깨는 매우 허전하였다. ‘아니, 이게 어찌 된 거지?’ 어찌되긴 뭘 어찌 돼. 지하철에 놓고 내렸지. 뒤를 돌아보니 내 의사 면허증을 실은 기차는 야속하게도 서서히 역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악…! 안돼~!’

버스면 육백만불의 사나이처럼 뛰어서 쫓아가기라도 하지. 뛰어서 못 가면 택시라도 잡아타고 영화에서 흔히 나오듯이 “앞차를 쫓아주세요!” 할 수라도 있지. 이건 뭐 도대체 대책이 없었다. 멍하니 기차를 보낸 나는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졸지에 무면허 의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주 토요일까지 전문의 시험 원서를 접수 시켜야 되는데… 무면허 의사도 받아주남? 이거 다시 발급 받으려면 보사부까지 가야하고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던데! 망했다, 난 망했어! 으이구… 이런 멍청한 화상아!

내가 지하철에서 저지른 해프닝 중의 압권은 학생 때의 일이다. 졸다가 충무로역을 지나친 것까지는 인간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치고, 종로 3가에서 반대편으로 가는 차를 잡아타는 데까지는 좋았다. 잠시 방심한 탓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충무로가 아니라 한 정거장을 거꾸로 지나쳐 동대 입구가 아닌가. 이런, 젠장! 하지만 이럴 때 화 내봐야 제 얼굴에 침뱉기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정신 바짝 차려서 충무로에 내렸다. 이젠 혜화역으로 가는 차를 갈아 타야지. 어… 근데 왜 명동역이 나오지?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탔다.)

나는 속으로 바보, 병신, 머저리, 천치, 말미잘, 멍게 같은 녀석… 하면서 나를 자학해야만 했다. 온갖 종류의 멍청한 실수는 다 해본 내가 지하철에서 가방을 잊어 버려 본 일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언젠가는 당하고야 말 일이건만, 하필이면, 하필이면 지금 그럴께 뭐람. 하필이면 그 중요한 걸 놔두고 내릴께 뭐란 말이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순간 영화 ‘포세이돈 어드밴쳐’의 맨 끝에 나오는, 목사님이 읊는 그 유명한 대사를 나도 외치고 싶어졌다. (영화에선 영어로 뭐라고 그랬겠지, 물론.)

“하느님, 언제 저희들을 도와달라고 그랬습니까? 방해하지만 말아달란 말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장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언제 너 전문의 시험 보는 거 방해했냐? 가방은 네가 멍청해서 놔두고 내린 거지!” 이상은 믿거나 말거나…)


(영화 대사가 문득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과 살짝 다른 내용이군요… 하여튼… 넘어갑시다. ^^;;;;
“We did ask you to fight for us but damn it, don’t fight against us! Leave us alone!”)

아니지,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 쥐어 뜯으면 뭐하나. 나는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억겁같은 긴 시간이 지나고 다음 열차가 들어 올 때 잽싸게 번호를 봐 두었다. 3138… 그리고 앞에서 하나, 둘, 셋, 네번째 칸이다. 나는 역무실을 찾아갔다. 드넒은 충무로 역을 (지하 4층까지 있다!) 헤멘 끝에 역무실을 찾아 들어섰다. 험,

험… 저기… 가방을 기차에 놓고 내려서요… (제발 나 좀 살려 줘요!) 3138호 열차 앞에 가는 찬데 앞에서 넷째칸 오른 쪽 선반에 검은 색 가방을 두고 내렸거든요… (그거 없어지면 난 몰라~ 우앙~!) 역무원 아저씨는 이런 일 한 두번 당해보나 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또닥또닥 지축역으로 전화를 해서는 문제의 가방의 인상착의를 전해주고는 나에게 지축역 전화번호를 적어 주며 한 30분 있다가 연락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러고 있을 수가 있나. 지축이 아니라 땅 끝까지라도 추적해서 내 면허증을 찾아 내리라! 지축역에 전화를 해서 내 가방 어디 도망 못 가게 꼭 붙들어 매놓고 있으라고 한 후 발바닥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나게 뛰어 가야지.
“여보세요? 지축역이죠? 여차 저차해서 고렇게 됐걸랑요?”

“아… 잠시 기다려 보세요. 그 열차 지금 들어 왔는데…”

“(꿀꺽…)”

“근데 유실물은 아무 것도 없다는데요.”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럼 어디 갔다는 말인가.

“차에 남아 있으면 저희 직원들이 반드시 챙기는데요, 중간에 누가 가지고 내렸으면 저희도 어쩔 수 없지요.”

망했다. 진짜로 망했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으로 병원 전화 번호를 알려주면서 물건이 나오면 연락해 달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 신통치도 않은 가방을 가지고 내렸단 말인가. 뭐 값나가는 물건이 있다고.

젠장,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일이 꼬이나. 면허증 잃어버려서 전문의 시험 못쳤다는 전무후무한 전설의 주인공이 될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보사부를 찾아가서 내 면허증 당장 재발급해 달라고 농성을 벌이는 거랑, 내과 학회에 가서 제발 접수 좀 받아 줘잉~! 하고 바닥에 퍼질르고 자빠져서 뗑깡을 부리는 거랑 어느게 더 나을까? (왜 지저분한 얘기 시리즈 중에 그런게 있지 않는가 – 가래 한사발을 먹을래, 코 한사발을 먹을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이고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만 대개는 그 실수로 인한 결과는 용서하지 못 한다. 한국 축구 대표 팀이 줄곧 유리한 경기를 이끌다가 한순간의 어이없는 실수로 패배했다면 경기 내용에선 이기고 점수에선 졌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해보는 말일뿐이다. 진 것은 진 것 아닌가. 뛰어난 선수들도 한 번 실수로 대역죄인이 되버린다. 시차 적응에 실패해서, 체중 조절의 문제로, 고질적 문전 처리 미숙으로, 어쩌고저쩌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의사 면허증을 잊어 버려 원서를 못내 시험을 못 봤다면 후세에 길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승부의 세계란 냉혹한 것이고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이 지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완전히 구겨진 얼굴을 해가지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우거지상을 해가지고 내 자리에 앉는 순간 전화 메모가 눈에 띄었다. ‘지축역에서 가방 보관 중…’ 나는 눈썹을 휘날리면 지축역으로 달려갔다. (실은 지하철 타고서 앉아서 갔음.) 생전 처음 가보는 지축역에서는 천사 같은 모습의 (적어도 그 순간의 내 눈에는 등에 날개가 달리지 않은 것만 빼고는 그렇게 보였다.) 어느 역무원이 나를 맞이하며 아까 전화를 끊자마자 직원이 가방을 찾아가지고 들어 왔노라고 하면서 가방을 건네준다.

요즘 세상이란 것이 하도 상식을 벗어나는 초자연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뭔가 제대로 돌아가야 할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기쁘다.

비록 나한테는 천국과 지옥을 두어 차례 왕복할 정도로 아찔한 일이었지만, 지하철에서 가방을 잊어버리고 또 그걸 다시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그런 대단치는 않지만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이루어지도록 어디선가 보이지 않게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마치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다리가 그냥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다행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당분간은 아무리 가방이 무거워도 지하철에서 선반 위에 짐을 올려놓지 못 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오늘의 이 황당했던 경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가방을 지하철에 두고 내릴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이 다시 안 생겼으면 – 최소한도 그런 중요한 물건을 놓고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다시 없었으면 – 좋겠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때에도 오늘과 같이 결국 다시 물건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도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는 경우보다는 올바로 돌아갈 때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말이다. 또 나같이 한심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꿋꿋이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도록 말이다.

나는 꿈에 그리던 내 가방을 받아들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50년만에 만난 이산가족처럼 가방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칠칠치 못한 주인을 만나 점심을 거른 나의 불쌍한 위장은 이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쪼르륵거리면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런데, 전문의 시험이란 게 이렇게 어려운 건가?

94. 10. 22.

– 이 멍청한 시민의 가방을 찾느라고 애써주신 지축역과 충무로역의 역무원 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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