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은 약을 먹고 있는가?

필자가 인턴 수련 시절 환자들의 팔뚝을 붙잡고 정맥주사를 놓기 위해 씨름을 하면서 문득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의과대학생 시절에 교과서에서나 강의를 통해서 들었던 어지러울 정도의 속도로 발전하는 눈부신 의학의 성과가 현실 세계에서는 이리 저리 도망다니고 터져버리기 일쑤인 환자의 혈관들과 씨름하는 일개 초보 의사인 필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는 사실이었다. 제 아무리 좋은 약이 있다 한들 그 약이 환자의 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주사를 놓는 필자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셈이다. 특히나 소아과에서 이는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닌 것이, 아기들에게 정맥 주사를 놓는 일은 때로 상당한 내공(?) 없이는 구사할 수 없는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그까짓 대수롭지 않는 정맥주사’를 놓기 위하여 온 병원의 ‘고수’들이 죄다 출동하여 법석을 피우는 경우마저도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듣고 접하는 현대의학의 면모는 환상적일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정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이 정맥주사의 예와 같이 지극히 불완전한, 매우 ‘인간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서 위태롭게 받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먹는 약의 경우에는 이 ‘불확실성’은 실로 엄청나게 커진다. 주사를 놓으면 최소한 환자의 몸 안으로 약이 들어간 것은 확실하겠지만 먹는 약의 경우에는 의사는 처방을 내려 버리면 그걸로 그만이다. 그 약이 실제로 환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지 확인할 방도는 현실적으로는 없다.

필자는 이때까지 십 수 년을 의사 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약 처방을 내었지만, 대개는 그저 그것을 환자들이 당연히 먹으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별 생각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는 치과 치료를 받고 처방 받은 항생제를 처방된 대로 다 복용하지 않고 하루 쯤 먹고 내던져버리고 나서도 ‘난 의사니까, 좀 특별한 경우니까’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필자는 고혈압 환자들을 흔하게 접하는데, 약을 처방하고 다음번에 외래에서 다시 만났을 때, 기대했던 만큼의 혈압 강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필자는 이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 약이 뭔가 그 환자에게 잘 맞지 않는 것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환자가 제대로 약을 먹지 않는다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약을 제대로 먹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국내의 연구 사례는 매우 드물지만, 외국의 예를 참고로 하면 고혈압과 같은 만성 질환에서 환자들의 처방 약 복용율의 연구 결과는 거의 충격적일 정도이다. 연구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처방된 약의 80% 이상을 복용하여 ‘우수한’ 경우는 약 절반, 5-10%는 처방된 것의 5분의 1 이하로 복용을 한 ‘불량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그 사이에 속한다. (도대체 어떻게 연구했는지 궁금하실까봐 약간 설명을 드리면, 뚜껑에 전자회로가 내장되어 뚜껑을 열은 날자와 시간이 기록이 되는 특수 약병을 이용한 것이다.) 이는 환자 몰래 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약 복용 시간이 기록됨을 알려준 후에 시행한 결과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 사례를 접한 후 환자에게 질문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약을 잘 드셨지요?’라는 좀 건성으로 하는 질문에서, ‘일주일에 약 드시는 것을 잊으신 적이 몇 번 정도나 되는 것 같습니까?’라는 다소 공격적인 질문으로 방법을 바꾸자, 놀랍게도 많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의 환자들은 약을 잊은 적이 있노라고 ‘이실직고’를 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약 복용을 거르는 환자들의 약 절반만이 의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 사실대로 대답을 하며, ‘의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숨기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심정에서 그런 것 뿐 아니라 환자들도 자신이 실제보다 훨씬 약 복용을 충실하게 하는 것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또 ‘어쩌다가 한번’ 정도라고 대답하는 사람 중에서 실은 절반 밖에 약을 먹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필자는 ‘환자들은 믿을게 못 된다’는 식으로 의사 환자간의 불신감을 조장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 제 아무리 현대의학의 눈부신 성과를 한데 담은 훌륭한 약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환자의 입으로 실제 들어가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이런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현실적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환자들은 약을 제대로 먹지 않는 것일까?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약을 먹는 것이 일상생활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그저 자꾸 ‘잊어 버리는’ 경우이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상황이다. 약을 먹어 놓고도 정말 먹었는지 아닌지 가물가물하는 경우는 특별히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니라도 누구나 아주 흔하게 겪게 된다. 이런 문제라면 요일별로 먹을 약이 정돈되게 되어 있는 약통이라던가, 약을 먹을 시간을 알람으로 알려주는 등의 여러 가지 ‘기특한’ 물건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흔히 환자들에게 식사와 상관없이 약 먹는 것을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자 하는 첫 번째 행동으로 만들라고 조언을 한다. ‘빈속에 약을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아침을 먹어야만 약을 먹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혈압 강하제들은 일반적으로 위장장애가 드물기 때문에 실제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훨씬 어려운 경우로서, 환자가 질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믿음이 약 복용을 꺼리게 하여 불규칙하게 복용하거나 아예 중단해버리게 만드는 경우이다. ‘한번 약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한다’, ‘약을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약이 잘 안 듣는다’, ‘약을 오래 먹으면 부작용이 생긴다’ 등등 매우 다양한데, 심지어 ‘혈압약을 먹으면 심장이 나빠진다’고 믿고 있는 분도 있다. (심장이 나빠지는 것을 막는 것은 혈압을 조절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필자 스스로도 약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약이 좋아서 먹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약을 먹어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약을 복용한다면, 충실하게 복용하는 것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환자들이 약을 제대로 먹게 할 수 있을까? 왕도는 없다. 환자들에게 질병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제공하고, 약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거부감을 해소시켜 주며, 약물 치료 뿐 아니라 다른 생활 요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주고, 부작용이 혹시 생겼을 경우에는 그에 대해 충분한 설명과 함께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한마디로 해서 ‘많은 정성을 들이는’ 길 외에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헌데, 고혈압이나 고지혈증과 같이 장기간 약을 먹어야 하고 환자들에 대한 교육이 매우 중요한 경우에도 극히 최근까지도 의료 보험은 전혀 이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이런 경우 따로 돈을 받고 교육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 환자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는데 불법이라니! 일부 병원에서만 손해를 보아가면서 인력과 시간을 들여 ‘공짜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다가 최근에야 겨우 ‘비보험’으로, 즉 개인 부담으로 교육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런 중요한 부분은 하루 빨리 보험 적용이 되도록 전환되어야 할 것이며, 충분한 교육을 통해 보다 많은 환자들이 충실하게 약 복용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결과적으로는 합병증을 줄임으로써 오히려 보험 재정 절감에 이바지하리라고 본다.

 

2004.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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