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먹어야 하나?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우리 나라에도 방영되었던 유명한 TV 시리즈 ‘X-파일’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명 대사, ‘진실은 저 바깥 어딘가에’ (Truth is out there)를 아시는 분이라면 이건 또 웬 패러디인가 하실 지 모르겠다. 우리는 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적당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동양적 미덕인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극단적인 것, 그래서 확 ’튀는‘ 것들에 쉽게 혹하기 쉽다. 대개의 경우 진실은 극단이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에는 정말 뚱뚱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 나라에서 보는 살찌고 배나온 사람 정도는 이곳에서는 거의 표준(?)에 가깝고, 발 디딜 때마다 쿵쿵거리고 땅이 울릴 것만 같은,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신기해 보이는 공룡 같은 체구의 사람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날씬한 체격을 가진 중년의 남녀들은 실은 체중 유지를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90년대의 전국적인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 미국인 중 남성의 20%, 여성의 25%가 비만(obestity)의 범주에 들어가는 체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비만’이라는 범주는 키가 170 cm 라면 체중이 87 kg 이상인 정도의 체격에 해당된다.)

현실이 이러니 만큼 미국인들의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물론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지 못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정크 푸드를 먹고 가공할 살을 찌워가고 있지만 말이다. 고칼로리의 푸짐하고 기름진 음식을 싼 값에 먹을 수 있고 칼로리가 낮고 양은 째째하며 맛도 퍽퍽한(?) ‘푸른 초원’ 음식일수록 비싼, 참으로 이상한(?) 나라 미국에서 저소득층은 비실비실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없이 눈사람처럼 부풀어오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채식주의자(vegetarian)’들이다. 필자가 미국에 와서 처음 장을 보고 나서 당혹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콩고기(soy protein)’이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자고 슬라이스 햄을 사왔는데 엄청나게 많은 종류 중 하나를 별 생각 없이 들고 왔더니만 진짜 햄이 아니고 이 ‘콩고기’로 만든 햄이었던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것을 무척 싫어한다. 맛도 맘에 안 들거니와, 햄을 먹으려면 먹고, 말려면 말 것이지 왜 ‘가짜 햄’을 먹는가 말이다.)
몇 년 전 국내 신문의 독자 기고란에서 한 성난 독자의 편지를 본 기억이 난다. 우리 나라 항공사 소속 국제선 항공기에서 기내식을 주는데 외국인을 먼저 따로 주고 한국 사람들은 한참 있다가 주었다면서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차별을, 그것도 우리 항공사가 하느냐며 분개하는 글이었다. 며칠 뒤 항공사 측의 해명 글이 올랐는데, 그 내용은 참으로 허탈하게도, 그 외국인에게는 ‘채식주의자용 식사 (vegetarian meal)’을 제공했었고, 이런 특별 주문식은 통상적인 기내식보다 먼저 준비해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흥분했던 독자만 완전 바보가 되었는데, 그만큼, 우리 나라에는 ‘채식주의자’란 상당히 드물고 낯설다. (요새는 있기는 있는 것 같지만.) 원래부터 야채가 많고 탄수화물, 즉 곡류의 비중이 높은 식사를 하는 우리 나라에서는 채식주의란 개념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이 채식주의자들이고, 시장에도 위에서 말한 ‘콩고기’를 비롯한 이들을 위한 식품들이 즐비하다. 채식주의자라고 한마디로 부르지만 실은 그 안에서도 무척 다양해서, 정말로 풀만 먹고 사는 사람(vegan)에서부터, 계란이나 우유, 또는 두 가지 모두를 먹으면서 ‘고기’만 안 먹는 사람(lacto-ovo-vegetarian), 주로 채식을 하지만 가끔씩 동물성 식품도 먹는 사람 (semi-vegetarian)등 다양하기도 참 다양하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보통의 미국 식사에는 육류가 많고 따라서 지방의 섭취량이 높으며 섬유질이 상대적으로 부족한데 대한 반동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많은 대형 연구들을 통해 높은 혈중 콜레스테롤이 심장병의 주원인이고 식사의 내용이 이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면서 기름진 식사가 사실은 미국인의 거의 절반을 죽이고 있다(정확히는, 95년 자료에 따르면 심혈관계 질환은 미국인의 사망 원인의 42%를 차지하고 있다.)는 공포심이 조장되었으니, 그 무서운 것을 피하려면 결국 채식주의자가 되는 수밖에.

헌데, 이렇게 기름진 식사와 육류에 대한 기피 현상이 생기고, 최소한도 건강식단을 추구할만한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는 실제로 식사의 패턴이 그런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이 명백해지고 나자, 놀랍게도 (아니,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정반대의 주장도 나오고 있다.

Atkins 박사라는 사람은 탄수화물, 특히 정제된 설탕 등이 비만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면서 놀랍게도 탄수화물의 섭취를 제한하는 고단백․고지방식이 건강에, 특히 체중 조절에 좋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탄수화물 섭취를 제한하면 우리 몸이 저장되어 있는 지방을 태우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고기를 실컷 먹으면서 살을 뺀다고 해서 우리 나라에도 유행했던 소위 ‘황제 다이어트’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http://www.atkinsdiet.com/started_story.asp?startedID=2)

Atkins 박사의 주장은 상당한 대중적인 관심을 끌고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두었지만 주류 의학계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주장과 거의 대척점에 있는 주장을 하면서 그를 공격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Dean Ornish 박사라는 인물은 지방 섭취를 고도로 제한하고 탄수화물 섭취의 비중을 높인 식사를 함으로써 심장질환 예방의 효과를 거두고 심지어 기존의 심장질환에 대한 치료 효과까지 있다고 주장하면서 Atkins 박사의 ‘천적’으로 자처하고 나섰다. (http://www.heartinfo.org/diet10orn3497.htm) Atkins 박사의 주장은 권위 있는 의학 잡지에 한번도 실린 적이 없는 반면, Ornish 박사의 연구 결과는 1998년 12월 미국 의학협회지(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게재된 바 있다.

2001년 3월, 플로리다주 올란도에서 열린 미국 심장학회 (American College of Cariology)의 연례 학술 대회는 이 두 사람 불구대천의 원수(?) 간의 외나무다리 만남을 성사시켜 많은 눈길을 끌었다. 이 학회에 참가했었던 필자는 이 재미난 구경 – 불구경과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건 없다질 않는가 – 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이 타이틀 매치 장소를 찾아갔으나 이 흥미진진한 대결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넓은 강당이 이미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들어차 있어 뒤에 서서 볼 자리도 마땅치 않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구석에 낑겨서 그들의 설전을 지켜보았는데, 참으로 싱겁게도, 어눌한 말투로 횡설수설하는 백발 노인 Atkins 박사와 청산유수의 달변인데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결과들로 중무장한 젊은 Ornish 박사의 대결은 애당초 해보나 마나였다. Orhish 박사는 ‘Atkins 박사의 다이어트의 단점 중의 하나는 입냄새와 몸냄새’라고 조롱까지 해가면서 Atkins 박사를 묵사발 내었다.

하지만, Atkins 박사의 주장과 그가 개발한 여러 가지 상품과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팔리고 있다. 대중들이란 신기한 것에 약하기 때문이다. 이미 꽤 옛날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기억하실 지 모르겠지만, 이상구 박사란 분이 TV에 등장하여 이름도 낯선 ‘엔돌핀’을 유행시키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가 주장했던 식사는 – ‘제칠일 안식교’ (Seventh-day Adventist)의 식단이라는 뒷 이야기도 있었는데 –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무척 생소할 수밖에 없었던 거의 완전한 채식주의 식단이었고, 이 방송 이후 시장에서는 두부 등이 동이 났다고 한다.

이제는 저지방 고섬유질 식사가 건강식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미국에서 청개구리처럼 고지방 고단백질 식사를 하자고 주장하는 Atkins 박사나, 원래 섬유질과 탄수화물을 비교적 많이 먹으면서 ‘채식주의’란 개념조차 없었던 한국에서 채식주의 식단으로 선풍을 일으킨 이상구 박사나, 주장하는 내용은 정반대이지만, 인기를 끈 비결을 정확히 일치한다. 신기하고, 고정관념을 깨면서, 확 튀는, 극단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미국 심장협회 (American Heart Association)가 권고하는 ‘건강식’은 그 중간 어디쯤엔가 있다. 미국 심장협회가 권고한다고 해서 무슨 금과옥조라 할 수는 없는 것이, 불행히도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한 우리 나라에서 이 권고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지방 섭취가 전체 열량의 30% 이하, 포화 지방산이 10% 이하, 단백질은 15%, 나머지 부분을 탄수화물에서 섭취한다는 내용의 1단계 (모든 건강한 성인들에게 일반적으로 권고되는 수준) 식단은 우리 나라의 평균적인 지방 섭취량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양을 섭취하도록 권고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3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 나라 국민들의 지방 섭취는 전체 열량의 18% 정도였다.)

전통적인 한국의 식사는 상당히 건강식임에 틀림없다.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구태여 주장해야 할 만한 절박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잘 계획되지 않은 채식주의 식단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고, 과하지만 않다면 약간의 육식을 하는 것이 필요한 영양소들을 훨씬 용이하고 균형되게 섭취하는 길이라는 현실적인 고려도 해야 할 것이다. 한국적인 식단을 고수해 나가는 한에서는 콜레스테롤 등에 신경쇠약이 될 필요는 없다. ‘적당히’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신기한 유행에 혹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먹거리 문제에 관한 한은 좀 보수적인 편이 낫다.

물론, – 아마도 80년대 이후의 풍속도라 보아야겠지만 – 회식을 한다든지 손님 대접을 한다면 의례 고깃집에서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구어 먹어야 하는 습관 등은 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인의 평균 콜레스테롤 농도도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고 있는 중이고, 육류 소비량은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중용을 지키는 동양적인 미덕이 절실한 때다.

‘세계화’를 목이 쉬도록 부르짖으면서 식사 습관도 서구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실상 미국인들 중에서도 엔간한 수준 이상의 사람들은 한국 식단에 못지 않은 고급의 건강식을 하고 있는 판에, 서구의 식사 중에서도 질 높은 것은 빼 놓고 안 먹느니만도 못한 싸구려 음식 쪽으로만 세계화가 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참으로 실감이 난다. 그런 싸구려 정크 푸드의 홍수에 대책 없이 빠져든 다음에, 이젠 ‘채식주의’를 해야겠다고 부르짖는다면 그런 블랙 코메디가 어디 있겠는가. 다음 세대가 그런 싸구려 입맛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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