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토끼로 더 알려져 있지만 원제는 ‘마시마로’…)
어느 날 필자의 아내 Y에게 친구가 포워딩해준 메일이 날아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유머 메일’이라는 것으로 골때리는 얘기들을 플래쉬, 쇽웨이브, 기타 등등, 컴퓨터를 엔간히 쓸만큼 쓴다고 자부하는 필자로서도 따라잡기 벅찬 최신 기술을 응용하여 재미난 화면으로 구성한 것들이다. ‘엽기’란 말이 유행은 유행인가보다. 제목부터 엽기적인 ‘엽기 토끼’.
곰 부자(실은 성별은 확인 불가능)가 사과(?)를 맛나게 먹고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오더니만 꼽사리를 끼어 같이 먹는다, 곰이 이를 보고 ‘가!’ 하고 내치려 하지만 토끼는 꿈쩍도 안 한다. 화가 난 곰, 갑자기 도끼를 꺼내들고 위협한다. 이때 엽기토끼, 맥주병을 휙 꺼내더니 갑자기 자기 머리에 퍽 쳐서 깨버린다. 찍~하고 기가 죽은 곰은 엉엉 울면서 토끼에게 사과를 깎아준다. (들고 있던 도끼로)
지금 22개월이 된 필자의 아들은 엽기토끼다. 뭐 맥주병을 들고 우리를 위협하는 건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골때리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엽기토끼다.
필자가 ‘재미있게’ 글을 쓴다고 칭찬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사실 글이란 것이 가질 수 있는 제일 멋진 미덕이 ‘재미’라고 본다면, 참으로 고맙고도 황송스러운 칭찬이다. 헌데, 불행히도 일상 생활에서의 필자는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재미없고 지루한 인간이라고 봐야 할지 모른다.
헌데, 이것도 운명인지 필자는 매우 ‘재미있는’ 배우자를 만났고, 그 웃기는 유전자를 이어받은 필자의 아들 (이하 JY) 역시 매우 웃기는 놈인 듯하다. 그리고, 필자가 비록 지금은 매우 지루하고 게으르고 심심한 인간이지만, 어렸을 적의 필자는 심심한 것은 참지를 못하는 장난꾸러기였다고 하는 전설을 고려해 보면 양쪽에서 뭔가 장난과 관련된 유전자들만 골라서 전달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떤 장난을 치느냐고요? 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로 한가지로 귀결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JY가 가장 즐기는 장난은 ‘아빠를 골리는’ – 그러니까 바로 이 필자를 골탕 먹이는 – 것이다.
‘베이비 블루스’라는 미국 만화가 있다. 우리 나라 일간지에 연재가 되기도 했고 단행본도 있고 제법 인기가 있는 만화로, 한 부부가 골때리는 딸자식을 키우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엮은 만화다. 어느 날, Y가 우리도 애를 키우는데 어디 한번 보자고 몇 권을 사왔다. 필자도 보기 시작했는데, 글쎄,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왜냐고? 그건 만화가 아니라 너무나도 ‘현실적인 현실’이었으니까!
예를 들어, 만화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로, 저녁에 애를 목욕시킨 뒤 기저귀를 채우고 잠옷을 갈아 입히려 하자, 애가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면서 천둥 벌거숭이 모양으로 날쌔게 도망을 다니고 아빠는 헉헉거리면서 쫓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필자의 집에서도 거의 매일 저녁 벌어지는 바로 그 장면이다. 필자가 기저귀를 꺼내들면 JY는 의례 도망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것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갤갤거리며 도망을 다니는데, 혹시나 필자가 쫓아가지 않으면 저만치 가서는 왜 빨리 잡으러 안 오나 기대에 차서 돌아보니,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온 집안을 누비며 추격전을 벌일 수밖에.
그렇게 한판의 추격전 끝에 마침내 JY를 잡아다가 기저귀를 채울 순간이면, 역시 곱게 기저귀를 채워주기보다는 또 한판의 격전을 벌여야 하는데, 발길질하고 버둥거리고 획 몸을 돌려 잽싸게 다시 빠져나가고 하면서 필자를 따돌리는 것이 그의 인생의 또 한가지 낙이다. 뭐 기저귀가 정말 싫다든지, 필자가 싫다든지 해서 반항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낄낄거리면서 즐기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그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마구 채이곤 했지만 (애라고 해서 장난이 아니다! 정말로 아프다!) 이제는 숙달된 조교라 요령껏 피하곤 한다.
그의 엽기성(?)은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 차차 드러나겠지만, 오늘은 특히 ‘먹는 문제’를 얘기해 볼까 한다.
필자는 식성에 관한 한 남부럽지 않게 좋은 사람이고, 배가 고프면 인간성이 매우 흉포해졌다가, 먹을 것만 들어가면 금방 인생관, 세계관이 달라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JY도 먹성이 매우 좋은 편이다. 대개 애들이 이 나이쯤이 되면 먹는 양이 줄어들어서 뭐라도 좀 더 먹이려는 부모들과 안 먹겠다는 애들 사이에 실랑이가 흔히 벌어지는 모양인데, JY는 먹을 것을 보면 쉽게 이성을 잃는 필자를 닮아서인지 그런 걱정은 별로 할 일이 없다. 실은 저녁 때 밥이 제 시간에 나오지 않으면 식탁 앞 의자위로 기어올라가 광야의 굶주린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시위를 하는 것이 보통 벌어지는 광경이다.
사실 이 또래 애들의 부모들끼리 만나면 온통 ‘자기 애가 안 먹어서’ 걱정이라는 얘기뿐인데, 우리 애는 밥때를 지나치면 이성을 잃는다고 하면… 자식 자랑이 늘어졌다고 할지 모르겠다.
헌데, 주로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보면 가히 엽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나 Y나 특별히 토종의 식성은 아닌데, 물론 ‘한국적 식단’도 좋아는 하지만, 뜨뜻한 국물이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간다던가, 김치를 못 먹고는 못 산다던가, 모든 음식에 고추장을 넣어야 한다던가 (KAL 국제선에서 아무 메뉴에나 무조건 나눠주는 튜브 고추장!)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게다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니 꼭 그런 음식들이어야만 한다면 참으로 골아픈 노릇일 것이다. 헌데, 왜, 어찌해서 JY는 아무도 특별히 권하지 않는 토종의 식사를 가장 좋아하는 것인지! (그렇다고 미국 음식을 안 먹으려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기본적으로 먹을 거라면 일단 사죽을 못 쓴다.)
미역국에 밥을 확 부어 넣고 숟갈로 척척 말아먹는 애기, 보통 배추 김치는 매워서 못 먹긴 하지만 백김치에는 ‘광분’하면서 끝없이 집어 먹는 애기, 된장국 사발을 들고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고 하~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애기… 이런 애기 보셨나요? 글쎄, 어째서 JY가 고국 떠난 지 십수년만에 한국 음식 먹어보는 재미교포처럼 이렇게 신토불이형 음식에 열광하는지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아마도 그가 좋아하는 품목 중 가장 엽기적인 것은 마늘짱아찌일 것이다. 어느 날 식탁 위에 놓인 것을 먹겠다고 떼를 쓰길래 어디 한번 먹어봐라, 설마 지가 먹어보고 나서 또 먹겠다고야 하랴, 하고 줘봤더니, 웬걸, 야, 이런 희안한 맛이! 하는 표정으로 끝없이 먹겠다고 덤비는 것이었다.
한국 음식점에 있는 생마늘과 중국집 식탁에 놓인 생양파도 먹겠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 되나 먹여 보고 싶은 궁금증은 몹시 나지만 부모된 도리로서 차마 그럴 수 없어 말렸었다. 먹여보면 과연 어떻게 될까?
또 한가지는 ‘뼈에 달린 고기’인데, 강아지도 아닌 것이 뼈에 붙은 고기를 뜯거나 닭다리를 들고 뜯는 모습에는 황당한 웃음을 금할 수 없는데, 필자는 JY가 왕갈비에 붙은 고기를 물어뜯어 이빨자국이 선명히 남은 모습 (죠스가 나타났다?) 을 캠코더로 포착할 수 있었다. 길이 보존하여 장가갈 때 선물로 줘야지. 헌데, 정말 무시무시한 것은 그 애기 죠스같은 이빨로 필자를 가끔 물어뜯는다는 것이다. 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애정의 표현(?)인 것 같기는 한데, 악!하고 비명을 지르게 아프다. (학대받는 부모? Parent abuse?)
다른 방면으로 골때리는 것은 역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턱없는 ‘건강식 취향’인데, 한동안은 삶은 당근에 사죽을 못 쓰더니만, 요즘은 시금치, 도라지, 고사리 같은 나물을 보면 우아! 하고 단말마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정신없이 집어먹는 것이나, 국에 들은 양배추나 미역같은 건더기 건져 먹기에 열중하는 것만 해도, 건강에 무척 신경 쓰는 중년 취향(?)인데, 게다가 향이 들은 요구르트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플레인 요구르트(한국에서는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플레인 요구르트를 보통 수퍼에서 보기 힘든데, 미국에는 흔히 있다. 먹어보면 그냥 시큼하기만 하지 별 맛이 없다.)만 먹겠다고 한다든지,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안 먹겠다고 주장하는, 거의 애기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저버린 듯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다시 한번 밝혀두는데, 필자나 Y는 그에게 이러이러한 걸 먹어야 한다고, 혹은 이러이러한 건 먹지 말라고 강요한 적은 전혀 없다!
필자는 어릴 적 무척 입이 짧았었다. 한동안은 소시지와 계란 밖에 안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뭐 그래도 결국 멀쩡하게 크긴 했지만, JY는 아빠의 어린 시절 편식을 닮지 말고 부디 골고루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길 빈다.
2001.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