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막사까지 걸어서 돌아 왔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쩔뚝대고 있는데 빨리 오라고 소리질러대는 구대장을 패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닐 때면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가도 모른다더니 내가 그런 지경이었나보다.
그날 밤은 정신없이 그냥 잤다. 다음 날 아침 깨어 보니 무릎이 시큰시큰거리기는 하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을까? 좀 걱정스러웠다. 다음 주에는 행군이 있다. 이 몸을 해 가지고 완전군장을 하고 걸을 수 있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며칠 간은 영내 교육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무릎은 좀 나아진 듯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군장을 짊어지고 걷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멀쩡한 몸을 해 가지고도 자신이 없을 판인데 말이다.
운명의 날은 다가왔다. 군장에 넣으라는 이것 저것 다 빼고 개나리 봇짐 비슷한 군장을 만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어둑 어둑한 새벽, 행군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깜깜한데 다들 얼굴에 숯검댕을 칠해 세상이 유난히도 어둡게 보였다. 과연 멀쩡하게 다시 이 자리로 걸어 돌아와 설 수 있을까? 어쩐지 도살장에 끌려나가는 소가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에게는 도움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처음 몇 키로 정도는 그런대로 걸을 만하였다. 헌데 한 3분의 1 쯤 왔을까, 무릎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꾸만 뒤로 처지기 시작했고 행군을 끝까지 제대로 마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져가고 있었다. 내 몸을 지켜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군장이고 뭐고 다투어 들어 주겠다고 하는 동료들의 눈물겨운 성원(?)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낙오하였고 보다 못한 구대장이 나를 끌고 얼마간 가보려고 하였으나 내 다리는 이미 내 다리가 아니었다. 결국 앰뷸런스를 타고 막사로 돌아 왔다.
걸을 때는 모르겠더니 엠뷸런스에서 내려서 다시 걸으려 하자 너무 아파서 거의 걸을 수가 없었다. 소총을 지팡이 삼아 비칠비칠 내무실로 들어갔다. 맙소사, 완전히 다리 병신이 다 되었다. 텅 빈 내무실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온갖 종류의 불쾌한 상상이 다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서 다리 병신이 된들 누가 책임질 것이며 누가 알아 줄 것인가. 아니, 당장에 이 다리를 해서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 것인가. 부모님이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Y는 또 뭐라 할까.
병신(?)이 되어 버린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다. 혼자 있는 줄 알았던 막사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얼핏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그가 도대체 왜 낙오되어 먼저 막사로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헌데 그가 나한테 다가와 씩 웃는데 앞 이빨 한개가 반쪽이 아닌가! 나는 내 코가 석자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도 기가 막혀 연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감기에 걸려 감기약을 먹고 약간 몽롱한 상태로 걷다가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 길에 푹 파진 웅덩이에 쑥 빠지면서 앞니를 땅에 갖다 박어서 부러뜨리고만 것이었다. “나 훈련 마치고 나가면 빨랑 선봐서 결혼하려고 그랬는데 어쩌죠?” 그러고 영락없는 영구 스타일로 (사실은 영구보다는 영화 ‘마라톤맨’에서 악당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할 때 앞이빨을 드릴로 갈려버린 더스틴 호프만이 영화 끝 장면에서 씁쓸하게 웃는 장면이 떠올랐다.) 또 씩 웃는데 나는 따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 주변에는 의사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으므로 (나의 바로 앞 번호가 정형외과 전문의였음.) 부상에도 불구하고 치료마저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다음 다음 날, 나는 오른 쪽 다리에 기브스를 한채 목발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목발을 짚고 의무대에서 내무반까지 돌아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도 이보다는 쉽지 않을까? 이삼백 미터 남짓한 거리를 십여 차례 쉬어가며 비지땀을 흘리며 막사 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3층! 우리 내무실은 3층이다. 오른 다리에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기브스가 되어 있고 왼 다리로 3층까지 뛰어올라가야 한다!
이를 악물고 3층까지 간신히 올라간 나는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30년 동안을 낙천적으로 살아오고 또 삶 자체에 대해서 한번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고 무조건 생각했던 나였지만 숨이 턱에 받치어 헉헉대며 계단 난간에 기대어 몸을 가누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산다는 것 자체가 비관적으로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한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까지는 500 미터도 넘는 거리였다. 그렇다고 누가 밥을 타다가 배달을 해주겠는가.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힘으로 가서 밥을 먹어야만 했다. 십여 미터 전진하고 쉬고, 또 몇 걸음 가서는 비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고 하면서 식당까지 가니 밥을 먹고 싶은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굶어 죽지 않으려고 입안으로 쑤셔 넣는 형국이었다.
모든 일이, 지금까지 아무 느낌 없이 그저 당연하게 해왔던 모든 일상 생활들이, 안간힘을 쓰고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난관을 뚫고서야 간신히 해 낼 수 있는 극기 훈련 코스로 변해 버렸다. 목발을 짚고 한 다리로 서서는 두 손으로 세수를 할 수 없었다. 기브스를 해서 뻗정다리가 되어 있는 오른 다리에 바지를 입히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다리를 구부릴 수 없어 화장실에 다리가 다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열어놓고 볼 일을 볼 것인가. 모든 화장실을 다 시도해 본 결과 가장 끝 쪽에 있는 화장실은 폭이 좀 넓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히도 쭈그리고 앉을 필요는 없는 좌식 양변기여서 이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이 되었다.
나를 보고 속없는 사람들은 힘든 훈련 안 받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부러워했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속으론 부글부글 끓었다. 실제로 훈련하는 데에 따라다니기라도 해야 수료를 시켜주겠다니 팔자 좋게 누워만 있을 형편도 아니거니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당장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힘들겠다면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힘들긴요, 뭘.” 하면서 애써 씩씩한 척 미소지어 보였다. 또 다른 사람이 다리가 아프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기브스해 놓은 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아프지요, 우하하하!” 하면서 명랑하게 대꾸해주었다. (속으론 ‘으악! 사람 살류! 나 죽어!’ 하면서 말이다.)
그냥 입실(입원과 같은 말이다.)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입실 일자가 너무 많아지면 퇴교를 시켜버린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판국에 그럴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죽을 힘을 다해 목발질을 해서 세끼 밥 먹으러 왔다갔다할 수밖에.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혀 쓰라리고, 팔에는 알이 백이고, 성한 왼다리마저 아파왔다.
이번 주말이면 처음으로 외박을 나가게 되는데 이 몸을 해 가지고는 도저히 집까지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데리러 와달라고 부모님께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오후,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는 목발을 짚은 나를 보고는 오히려 이만하기 다행이라 안심이라는 듯한 표정과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이 반반쯤 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맞으셨다. 전화를 받고는 얼마나 걱정을 하셨으면…
‘사격 때 한발만 더 맞추어서 차를 타고 돌아왔었더라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을 것을…’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평생에 없이 암담한 주말이었다. 아버지에겐 3주 정도만 기브스하고 다니면 별 후유증 없이 깨끗이 나을 거라며 안심을 시켜드리려 애썼지만 정작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나는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다음 주면 유격 훈련이다. 이 몸을 해 가지고 거길 따라가면 또 무슨 황당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다음 날, 아버지는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 않으시고 그냥 가셨다. 작은아버지가 차로 나를 학교까지 다시 데려다 주셨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아무도 외박에서 아직 복귀하지 않았었다. 텅 빈 내무반에서 나는 갑갑하기 짝이 없는 심정으로 Y에게 편지를 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멀쩡한 다리를 가지고 돌아갈께. 꼭.’ 그건 내 스스로에게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난 아직 많은 세월을 살아가야만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가소로와서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심각했다. 이런 일은 당해보지 않고는 이해가 안 된다.
월요일 아침, 남들은 40킬로 가까운 거리를 완전군장하고 행군해 가야 하건만 나는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이것 또한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차속에서 흔들거리며 ‘난 꼭 멀쩡한 몸으로 돌아간다. 멀쩡한 몸으로.’ 하며 속으로 주문이라도 외듯 되풀이하면서 절박한 심정을 달래고 있었다.
목발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K라는 친구는 총이 쓰러지면서 발등을 쳐서 골절이 되어 역시 기브스를 하고 있었다. 약간 통통한 몸매의 이 친구는 이게 무슨 다이어트할 기회라도 된 듯 밥 굶기를 밥먹듯 했다. (우리 목발 부대에게 있어서 밥 한 번 먹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위에서 얘기한 바 있다.) 서로 무표정하게 굳어있는 얼굴 속에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며 산길에서 이리저리 요동치는 앰뷸란스의 불편한 자리에 몸을 맡기고 흔들린지 한참만에 우리는 우리가 일주일을 보내야 할 산꼭대기의 막사에 도착하였다.
허름하게 쓰러져가는 듯한 막사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썰렁한 냉기가 흘러나온다. 이건 막사가 아니라 숫제 냉장고였다. 실내 온도 섭씨 7도? 냉장고의 냉장실이 섭씨 4도 아닌가? 냉장고가 맞긴 맞네?
몸뚱아리 멀쩡한 사람에게도 열악한 환경임이 분명했지만 목발에 의지한 나에게는 ‘열악’을 넘어서는 조건이었다. (열악보다 더한 건 ‘으악’인가?) 군대에는 장애자를 위한 시설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겠지) 우선 바깥에서 내무실을 들어가려 할짝시면 약 50 센티 정도 되는 턱을 한발로 점프해서 올라가야만 했다. 옆에는 손으로 잡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만일 뛰어오르다 발이 턱에 걸리는 날이면 면상을 콩크리트 바닥에 갖다 박아버릴 판이었다. 내무실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깊숙이 파 놓은 배수로를 건너야 했는데 멀쩡한 다리로는 한발짝 폴짝 뛰면 될 것이 나에게는 건널 때마다 가슴 졸이게 만드는 장애물이었다. 모든 일상생활이 위험 천만한 곡예요, 그야말로 ‘유격’이었다. 식사시간이면 식당까지 이제까지보다 더욱 거리가 멀고 좀 더 험난하게 굴곡이 있는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가지 더 괴로운 것은 식판과 수저를 나 혼자서 챙길 수도 설거지를 할 수도 없어 매 끼니마다 같은 내무실의 동료들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맙게도 그들은 아무 소리도 않고 열심히 나를 보살펴 주었지만 자기 한 몸 추스리기도 빠듯한 그 어려운 상황에서 남까지 돌봐주어야 한다는 것은 큰 짐이었으리라. 아침이면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 연병장에서 아침 점호를 해야 했는데 여기에 도달하려면 양쪽 다 난간이 없어 잡을 데 없이 외발로 뛰어 내려가야하는 계단 (잠깐 균형을 잃으면 액션 영화의 스턴트맨이라도 되는 듯이 저 아래까지 데굴데굴 굴러 떨어질 판이다.)을 내려가야 했다. 깨어나자마자 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곡예를 한 판 치르면 온 몸의 힘이 쭉 빠져버리곤 했다.
그러나 나를 가장 황당하게 한 것은 역시 화장실이었다. 여기는 원조 재래식 ‘푸세식’ 화장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허벅지까지 기브스해놓은 오른 다리가 완전한 뻗정다리인 내가 무슨 수로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볼 것인가? 일주일간 ‘굳히기 작전’? 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인 듯 했다. 언젠가는 치루어야 할 대사이거늘, 도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굳히기 한판으로 며칠을 버티던 나는 어느 날 저녁,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산이 임박한 산모의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나는 해내었다. 그것은 곡예나 묘기라는 말만으로 묘사하기는 좀 아까운 진기명기요, 인간승리였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로 내가 엄동설한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오래간만의 배설의 원초적 쾌감을 맛보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나는 자칭 타칭 목발 유격대가 되었다. 훈련을 받는다는 것을 불가능했지만 최소한 참관을 해야한다니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기는 해야겠는데… 고것이 쬐끔 힘들었다. 멀쩡한 사람들도 헉헉거리면서 올라가야하는 가파른 비탈길,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진창길, 자갈길, 비바람이 몰아치는 길을 가야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파왔다. 기브스로 싸놓은 부분만 빼고는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같은 처지의 동료가 있어 서로 조금이라도 의지가 되었다. 물론 서로 도와줄 형편은 안 되었다. 가파른 길을 목발질로 힘겹게 올라갈 때 힘에 부쳐 뒤로 쳐지면 안타까운 얼굴로 다시 따라 올 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려 주는 것이 서로 해 줄 수 있는 전부였으니. 우리 두 사람의 목발은 모두 결국은 목발 끝에 달려 있는 고무가 다 닳아서 없어져버려 나무가 삐죽하게 튀어나와 살벌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은 어떤 모습인지 전혀 상상이 안 가실 것이다. 나도 목발이 그렇게 된 것은 처음 보았다.)
고통스런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갔다. 하루를 남겨 놓은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비바람에 몰아치고 있었고 안개, 아니 구름으로 몇발자욱 앞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런 날 산악 훈련을 하랴. 누구더러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라고. 설마, 설마, 하고 있는데 그래도 집합이란다. 군인들에겐 역시 안 되는 일이 없나보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표어인 ‘하면 된다’라는 말이 이 사회에서는 금과옥조인 게지.
우의를 입고 빗속을 뚫고 줄줄 미끌어지는 진창길로 변해 버린 비탈길을 허우적 허우적거리면서 몇 번을 미끌어져 진창길에 굴러버릴 위기를 간신히 넘겨가며 기어 올라가보니 교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만 갑자기 우의를 벗는다. ‘에고, 갈 데까지 가는구나.’ 생각하기가 무섭게 우의를 빨리 벗으라고 난리다. 삽시간에 옷은 쫄딱 젖고 세찬 골짜기의 바람이 완벽하게 몸을 냉동시키기 시작했다.
차라리, 목발 신세가 아니면 쪼그려 뛰기 100번, 온몸 비틀기 100번을 해서라도 몸이 얼지 않게라도 하지. 발가락은 아예 감각이 없었고 이빨은 마주치기 시작했다. ‘이건, 악몽이다. 그래, 그냥 꿈이야…’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30분쯤 지났나하고 시계를 흘낏 보면 분침은 야속하게도 고작해야 3분 남짓 돌아가 있었다. 결국은 시계 보기를 포기했다. 목숨이 모질어서인지 그래도 얼어죽지 않았고, 국방부 시계의 건전지가 강력해서인지 어쨌거나 시간은 갔다. 결국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 차를 탔다. 남들은 지금부터 또 40 킬로를 하루 종일 걸어서 돌아와야 하는데 황송스럽게도 차를 타고 돌아오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속을 다 갉아먹어 빈 껍데기만 남은 느낌의 무기력한 몸뚱이를 부여안고 그래도 살아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힘든 훈련을 이겨냈다는 뿌듯함도, 나도 이만큼은 강하다는 승리감도, 그 어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종류의 느낌도 난 가질 수 없었다. 난 그저 올 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속으로 되뇌일 뿐이었다.
‘그래, 난 멀쩡한 몸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그 무엇도 나를 더 이상 다치게 하진 못했어…’
그리곤, 엄청난 졸음이 쏟아졌다.
1995.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