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안함을 감출 수 없는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우리들의 훈육 대장이었다. 최소한도 ‘맞짱’을 뜬다 치면 결코 건강에 이롭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인상이었다.
‘끙…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혀, 정신을…’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 7주를 어떻게 보내나 하며 한심한 느낌이 들뿐이었다. 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군의관 훈련도 훈련이냐고 비웃고, 조롱하고, 웃긴다는 듯이 쳐다보고, 기가 차다고들 했다. 그러는 사람들은 얼마나 엄청나게 고생을 했는지는 몰라도 너무 비웃지 말고 지금은 그러려니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란다. 남의 다리 부러진 것보다는 내 발의 티눈이 더 아프다고, 모두가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한 보따리 옷과 전투화 등등을 받고 비슷비슷한 서류들에 그놈이 그놈인 사항들을 채워넣고 어쩌고 하는 동안에 밤이 되었다. 썰렁한 내무반에 드러누으니 불은 꺼지고 그다지 호감이 가지는 않는 취침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만 (트럼펫은 사실 멋진 악기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명상의 시간인지 뭔지 모모 시인의 국군 소위가 총 맞아서 장렬히 전사 했다나 어쨌다나 하는 시 낭송이 나왔다. 정말 여기가 군대는 군댄가벼. 어머니 보고 싶어서 흑흑거리는 타이밍이 지금인가?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버렸다.
그리곤 황당하고도 짜증스런 생활이 시작되었다. 국방의 의무의 신성함을 논하기에 앞서 일단 당장에 몸과 마음이 엄청 피곤한 걸 어쩌란 말인가. 한 사람을 군인으로 만드는 과정은 참으로 복잡한 과정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새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30년 동안을 내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무사고 운전(?)으로 다녔건만 군대에선 지난 30년간의 걸음걸이는 틀렸으며 양팔을 앞으로 90도, 뒤로 30도 흔들며 시선을 전방에 고정하고 호각 소리에 왼발을 맞추며 소리 높여 군가를 부르고 번호를 붙이는 새로운 방식의 걸음걸이를 권장(아니, 강요)한다. 정 그렇게 걷기 싫다면 자기 마음대로 걸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더욱 피곤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방식의 걸음마가 얼마나 씩씩하고 용감하게 보이는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깨가 제법 뻑적지근한 것으로 보아서는 최소한도 인체 공학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 듯 했다.
그밖에도 많다. 호텔에서나 하는 줄 알았던 bed-making을 자로 재가면서 하고, 밥 먹을 때 옆 사람과 어떻게 식기의 줄을 맞추는지, 어떻게 하면 내복과 양말과 손수건을 이용하여 멋지게 각이진 진열용 관물을 만드는지, (여기에 사용된 속옷과 양말등은 물론 7주 내내 사용하지 않은 채 항상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였다.) 심지어는 세수하러 세면장까지 가는 동안 수건을 어떻게 들고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했다. (세수하거나 이를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하던대로 했다.)
‘세수’는 ‘세면’이고, 아니 ‘쎄면’이고, ‘운동장’은 ‘연병장’, ‘손에 들다’는 ‘파지하다’, 그냥 ‘하다’라는 말은 ‘시행하다’나 ‘실시하다’, 오른손은 ‘우수’, 왼손은 ‘좌수’, 기타 등등. 나는 한글 전용론자는 결코 아니지만 아름다운 우리 말에 대한 그리움이 절로 흘러 넘쳤다. 물론 군대가 문학 소년을 위한 장소는 아니라는 점은 이해했지만 말이다. 의사들도 허구 헌 날 남들 못 알아 듣는 전문 용어로 잘난 척 씨부렁거리는 주제에 군대 용어가 어렵다느니 이상하다느니 말할 형편은 안되겠지만 그래도 ‘기도비닉(冀圖秘匿)’과 같은 말을 듣게 되는 순간에는 거의 눈앞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이 땅에서 대학 교육까지 마친 사람에게조차 – 아무리 한문 교육은 부실하게 받았다 할 지라도 – 낯설고 무슨 뜻인지 거의 짐작하기 힘든 지경의 말을 꼭 써야하는 지 정말 모르겠다. (지금 와서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나오기는 나오는구먼. 기도 – 원하는 것이 있어 도모함. 비닉 – 비밀히 감춤. 흠. 들키지 않게 한다는 뜻이네. 별 거 아니었잖아.)
이런 건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는 것이고 그 당시에는 우아하게도 지적인 두뇌 활동을 영위한다는 것은 몹시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반면에 비록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몸이 튼튼해 질 수는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얼핏 보고는 무척 마르고 날씬한 체격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남부럽지 않은 ‘인격’도 가지고 있었다.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허리는 굵어지면서 소화불량 걸린 멸치(?)와 흡사해지는 것이 병원에서 썩고 있는 가련한 레지던트들의 전형적인 체형인 것이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구멍을 두개 건너 뛰어 허리띠를 줄여야 하고 딱 맞던 양복 바지가 헐렁헐렁대는 것은 무척 유쾌한 경험이다.
훈련 내용에 대해 얘기하는 건 보안에 위배된다니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남들도 다 아는 얘기가 아닌가. 남들 다 하듯이 박박 기기도 하고 가스도 마셔보고 군장 메고 낑낑거리면서 걷고 했다. 늙은이들이라고 많이 봐주는 듯한 기분은 들긴 했지만 하여간에 할 건 다 했다. 그러니 군의관이라고 너무 그렇게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지는 않으셨으면 한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시간은 목욕 시간이었다. 그 엄청난 가뭄 중에서도 목욕물을 맘대로 썼으니 우리가 대접을 받은 것인지 국민들이 우롱 당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뭄으로 고통받았던 분들에겐 죄송한 말씀이지만 허구 헌 날 박박 기고 구르는 생활 중에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더운물로 몸을 씻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3주 째였던가? 그 주 일요일에도 역시 100여명의 우리 훈육대 후보생들이 한꺼번에 목욕탕에 몰려들어가 (우리 구대장의 표현을 빌면 ‘개떼 같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바글바글대는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리우는 노래, 바로 생일 축하 노래였다. 과연 누가 생일일까? 하지만 누군들 그게 무슨 상관이랴. 노래 소리는 두 사람,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합쳐지고 마침내는 뿌옇게 김이 서린 비좁은 목욕탕 속에서 벌거벗은 111명의 남자들이 목청껏 부르는 2부 남성 합창이 되어 찌렁찌렁하게 울려퍼졌다. 난 그 이전에 그토록 감동적인 생일 축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듣지 못할 것이다. 생일을 맞은 그 사람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이 되리라.
군대에서는 여러가지 즐겁지 못한 상황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꼭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엄청난 훈련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기후 조건등과 같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소하고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세끼 밥 먹으러 갈 때마다 호각을 불어 발을 맞추어 걸어가는데 공교롭게도 나의 위치는 인솔자 바로 옆이었다. 나의 왼쪽 귀 바로 옆에서 빽빽거리고 호각 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 때문에 나는 밤마다 귀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귀울음에 시달려야 했다. 호루라기 소리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소리라고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통틀어 최고의 독종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은 남극에도 가고 적도에도 간다. 심해에도 우주 공간에도 가고 사막에도 가며 독충과 맹수가 우글대는 정글에도 간다. 그리고 군대에도 간다. 하여튼 못 갈 데 빼고는 다 간다. 인간의 이 탁월한 환경에의 적응력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뭔가 즐거운 일을 찾아내어 위안을 삼는 것이다.
평소에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던 것들을 유심히 보면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은 예상치 못했던 체험이었다. 어느 날 밤, 하루 종일 훈련에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완전 군장을 메고 다리는 후들후들거리며 입에선 단내가 나고 머리 속에는 오직 주저 앉아 쉬고만 싶다는 생각 뿐인 지경이 되도록 행군해와서는 마침내 막사 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유난히도 별이 총총한 하늘에 오리온 별자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매년 겨울이면 쉽게 하늘에서 찾을 수 있는, 이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았던, 아니, 실은 쳐다본지도 엄청 오래된 이 낯익은 별자리가 그토록 장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생전 처음 가져보는 생각이었다. 가뿐 숨을 내 뿜으며 내 몸이 별이 가득 박혀 있는 하늘 속으로 깊숙히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흘린 땀이 차갑게 식도록 고개를 치켜들고 서 있었다. ‘그래, 가끔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쳐다보자!’ 서울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새벽에, 특히 겨울에 잠자리에서 선뜻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기란 영웅적인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뭐 별 수가 없질 않는가. 우거지상이 되어 간신히 막사 앞에 나가면 체조를 한다고 윗옷을 벗으란다. 그 때 막사 안에서 품어가지고 나온 마지막 온기마저 허무하게 달아나 버리고 인정 사정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한겹 내복은 있으나 마나, 광야에서 헐벗고 서 있는 기분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우리가 훈련 받은 곳은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언제나 마찬가지인 어느 날 아침, 오늘도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나 하는 우울한 생각에 젖을 무렵 문득 동쪽 하늘을 보았다. 아직 채 동이 트지 않은 어스름한 하늘에 동쪽 하늘만은 붉은 색을 띄며 밝아져 오고 있는데 비행기 한대가 꼬리에 하얀 선을 달고 동쪽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그 한 줄 비행기 구름은 지평선 너머에서 비추이는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야… 예쁘다!’
아침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갈 때쯤이면 해는 솟아 막사 앞 잔디밭을 비춘다. 누렇게 마른 잔디 위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고 그 위를 비스듬하게 햇빛이 비추면 잔디밭은 보석이 흐트려져 있기라도 한 듯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언젠가 서울에서 아침에 강남 쪽에서 강북 쪽으로 한남대교를 건널 적에 다리 왼편에 있는 한남동 산동네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의 유리창이 때마침 비추는 아침 햇살을 반사하여 산동네 전체가 반짝반짝거리는 광경을 보았던 일을 기억하였다. ‘그래, 세상이란 아름답고, 인생이란 그래도 살만한 것이다.’
편지, 군대에서 사는 낙 중에 편지를 빼 놓을 순 없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다가 내가 집을 떠날 때 아버지가 부엌의 조그만 창을 통해서 내가 걸어가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계셨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남몰래 눈물 글썽이기도 했다.
Y가 열심히 편지를 보내준 덕에 훈육대 안에서도 무척이나 편지를 많이 받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군대 오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E-mail을 주고받았던 생각을 하면 참으로 원시적으로 서로 의사 소통을 하고 있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기상 시간 전 새벽에 남의 눈에 띨까 사주경계하며 공중전화까지 가서는 그녀의 목소리를 잠깐이나마 듣는 재미라도 없으면 무슨 낙에 군대 생활을 하랴. 물론 그렇게 도둑놈처럼 조마조마하면서 할 말도 다 못하고 전화를 하고 나면 허탈함에 그리움은 더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우리는 사격 훈련을 받게 되었다. 권총 사격에서 나는 물경 빵점을 맞았다. 이따만한 표적지에 총알이 지나간 흔적조차 없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서부 영화에서 허리께에서 빵빵 쏴대도 백발백중 다 맞아서 자빠지는 일은 도대체 뻥이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다. 영화 ‘언터쳐블’에서도 인질을 잡고 있는 갱의 머리를 권총으로 날려버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린 것 같다.
하여간에 창피한 꼴을 당한 나는 다음 날 소총 사격에서는 의외로 성적이 좋았다. ‘그래, 군의관이 총 잘 쏴서 뭐하냐, 군의관이 총 쏴야 할 정도면 망한 전쟁이지.’하고 그냥 쏴대는데 신기하게도 잘 맞았다. 남들은 스물 몇 발 씩 쏘는 영점 조정을 나는 아홉 발만에 마치고 마침내 전투 사격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표적이 제까닥 올라오면 쏘아 맞추는 것이다. 250 미터 밖의 표적은 가물가물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20개를 다 맞춰 만점을 받으면 마치고 돌아갈 때 차태워서 보내준다던데 (사격장에서 막사까지는 꼬박 두 시간은 걸어야한다.) 혹시 어떻게 안 될까?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사선에 올랐다. 그러나 첫발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래, 내 팔자에 무슨 얼어죽을 특등 사수냐.’ 그야말로 마음을 비우고 그 다음 발부터는 별 생각 없이 쏴대는데 표적이 계속 발랑 발랑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다 쏘고 나니, 이런 젠장, 첫 발만 빗나가고 나머지는 다 맞추었던 것이다. 한끝 차이로 차타고 편하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야간 사격까지도 마치고 나니 날은 완전히 깜깜 어두워졌다. 손전등으로 발 밑을 비추어 가며 나아갔다. 행군이란 선두에서 하는 것이 제일 힘이 덜 드는 법이다. 맨 앞사람이 빨리 가려고 한발 더 나가면 뒷사람들은 따라 붙으려고 줄줄이 한발씩 더 나가고 한 100명쯤 뒤에 가면 간격이 백걸음은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맨 뒤에 따라가면 거의 구보를 하게된다. 이날 나는 초반에는 앞에서 몇째 번 정도에서 비교적 여유 있게 가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서 골목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른 것이었다.
“엇, 이 길이 아닌게벼?”
그래서, 뒤로 돌앗. 졸지에 맨 꽁무니에 붙은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구 뛰다시피 따라가야만 했다. 발 아래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자갈길을 뛰면서 얼핏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위험하다. 한 발만 헛디뎌도 다친다!’
하지만 쳐지지 않으려니 별 수가 없었다. 뒤쪽에선 “선두 천천히!”를 외쳐댔지만 어느 망할 자식들이 앞에서 가고 있는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때 오른 발목이 조그만 돌 위에서 휙 꺾어지면서 발목과 무릎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나의 몸은 순간 휘청하면서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통증에 정신이 아찔하면서 낭패감이 들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오른 무릎에 통증이 왔다.
‘빌어먹을… 괜찮을까?’
막사까지는 아직 반도 못왔다.
1995.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