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에서의 단상

    나카하라여
    지구는 겨울이라 춥고 어둡네.

    그럼
    안녕히

                      - '공간', 구사노 심페이 (草野心平)

무진장 목이 말랐다. 물주전자를 통째로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는데도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계속 괴로워하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헌데 실제로 정말 목이 말랐던 것이다. 더듬더듬 주변을 더듬어 물주전자를 찾아 이번엔 진짜로 벌컥벌컥 마셨다. 옆자리에선 누군가 코를 골면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골치가 약간 띵해 오면서 어제의 기억들이 살아난다.

10월로서 병원에서 전공의로서의 나의 근무는 끝이 났다. 지금부터 1월까지는 그저 전문의 시험 준비를 위하여 공부만 들입다 하는 기간이 될 것이고 무척이나 즐거운 것은 그래도 월급은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병원이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외친다면 나도 그럼 법대로 하자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출근 시간은 있어도 퇴근 시간은 없었던 – 그리고 8시간 이하로 일하는 날이라곤 토요일과 일요일밖에 없었던 – 1년차 시절에 시간외 수당이란 걸 받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기타 등등… 에고, 이런 얘긴 관두자.) 아무튼 내과의 수석 전공의들은 전공의 생활의 실질적인 끝을 기념한다는 명분 하에 이곳 청평에 MT랍시고 우르르 떼거지로 몰려와 어제 광란의 밤(?)을 보내었던 것이다.

MT 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다 늙어서 무슨 놈의 MT를 가냐고 그런다. 아니, 내가 늙다니? 이마가 좀 넓어지고 허리 치수가 좀 늘어났기로서니, 늙었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정말로 마지막 젊음을 불사르기라도 하듯(?) 등산에, 족구에다가 (조명 없는 족구 야간 경기는 정말 색다른 맛이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으니 오늘 아침의 이 뻑적지근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어차피 다시 잠이 들기는 틀린 것 같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밖은 아직 어슴 새벽이고 차가운 공기가 옷 속으로 싸하니 밀려든다. 청평 호반에는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멀리 산들은 그 사이로 아스라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가 묵은 곳 앞에는 호수 한 가운데에 무인도인 둣한 섬이 하나 있었고 (물론 이것이 원래부터 섬은 아니었겠지만) 단풍이 물들어 울긋 불긋하면서도 군데 군데 아직도 초록의 자취가 섞여 있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산봉우리는 희뿌옇게 보이질 않고 있다.

발길을 돌려 산책로를 따라서 걷다 보니 낙엽이 쌓인 길로 접어든다. 퇴락한 낙엽의 갈색이 영롱하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춘기 소녀처럼 쪼그리고 앉아 고운 빛깔의 낙엽을 몇개 주어서 지갑에 고이 넣었다. 오늘 무슨 바람이 들어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 걸까?

걷다보니 누군가의 무덤에 도달했다. 비석도 없는 무덤인데 그래도 누군가 보살피는 것인지 무너져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엔 누가 누워 있을까?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산의 양지 바른 곳이란 모두 묘지로 가득 차게 되지 않을까? 전에 나는 죽으면 화장해서 재를 강에 뿌리리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죽음을 생각하기엔 아직 너무 젊은 모양이다. 며칠 전, 전공의 협의회의 일을 맡아보고 있는 나의 동료 한 사람이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장기 기증 서약’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서식이었다. 전공의 협의회 주관으로 의사들의 장기 기증자 등록 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나는 그 서식을 작성하여 그에게 넘겨 주었다. 이로써 나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장기 이식 진료실에 등록이 된 것이다.

다시 호반으로 돌아왔다. 나의 동료들은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에 잠들었을른지도 모른다. 집념의 갬블러들이 어찌 이런 기회를 놓치겠는가. 밤새도록 눈이 빠져라고 패를 쪼다가 조금 전에야 지쳐 골아 떨어졌으리라. 주머니에 손을 넣자 공중 전화 카드가 손에 잡힌다. 아마 몇 천원 정도는 남아 있을 터였다. 에라, 이 거 오늘 다 써버리자. 공중 전화기로 다가가 001로 시작되는 기나긴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으흠하고 목을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신호가 한번 울리자 마자 바로 옆에 있었던 듯 전화기를 받아 든다. 철커덕하고 전화기의 숫자가 줄어든다.

“Hello?”

지금 내가 전화를 거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구나. 목소리를 잠깐 가다듬느라 약간 뜸을 들이고 내가 말했다. (목소리 좌~악 깔아서)

“나야…”

뜻밖의 일은 때로는 예상되었던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모양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들뜬 것처럼 들린다. 그녀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푸근한 마음이 된다.

“지금 여기는 말야, 물안개가 좍 깔려가지고… 후후… 쥑인다는 거 아녀…”

“음…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좀 고약한 일이지만 그래도 어느 날 그녀가 나의 뜻하지 않은 전화를 받고 난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서 나를 생각하다 잠이 들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다. 눈 앞에 펼쳐진 새벽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그녀에게 전달해 줄 만큼 내가 시적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국제 전화란 한가로이 수다를 떨기에는 좀 적합치 않은 도구다.

전화를 끊고선 호반의 벤치가 밤 이슬에 젖은 것도 모르고 한참을 새벽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엉덩이가 축축해 오지만 뭐 어떠랴. 지금 이 순간, 난 행복하다. 평화로움, 고요함, 세상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에 혼자 깨어 있는 듯한 고즈넉함이 나를 감싸고 시간의 흐름도, 오늘 다시 서울의 번잡함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지금부터 최소한 1월 중순까지는 엉덩이에 무좀 생기도록 책상 머리에서 책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곤 그 후에는 입대하게 된다는 것도, 이 모든 사실들을 깜빡 잊고 그저 시리도록 차갑고 맑은 새벽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몸뚱이가 어찌 되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차가운 땅에 묻히건 불 속에서 재가 되어버리건 또는 누군가 나의 콩팥과 심장과 폐와 간과 각막과 췌장을 송두리째 도려내건, 아니면 나의 시체가 해부학 교재가 되어 의학도의 손에 해체되어 버리건 나는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복잡스런 장례 절차와 묘비와 장송곡, 흰 국화 다발, 검은 옷, 내세에의 기약, 피어 오르는 향의 내음, 그 모든 것들은 죽은 이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리라. 영혼이란 것이 존재할 것인가? 유물론자인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는 않는다. 죽음이란 끝일 뿐, 그 뒤의 어떤 의미가 존재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겐 어리석은 짓이다. 설사 영혼이 공중을 떠돈다 치더라도 내가 죽은 후 그 영혼이 생전에 깃들었던 몸이 어떻게 쓰일런지가 그 영혼에게 그렇게 중요할까? 희생과 봉사를 위해 장기 기증자 등록을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토록 숭고한 박애주의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아침에 오늘의 할 일을 위하여 준비하듯이, 지금, 아직 죽음을 생각하기엔 너무나 젊은 지금, 나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고자 함이었다. 그 어떤 엄청난 결심과 고민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너무 키가 자라버려 못 입게 된 어릴 적 입던 옷을 누군가에게 줘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하지만, 난 살고 싶다! 내 심장과 간과 허파와 콩팥으로 죽어가는 다른 누구를 살리기 보다는 내가 그것들을 오래 오래 쓰고 싶다. 세상은 추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무척이나 흔치 않은 일이기에 오히려 이 세상은 더욱 눈물 날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잠깐 동안 세상의 아름다움을 엿보고자, 잠시의 행복에 웃음짓고자, 사랑하는 이와의 기나긴 이별 속에 한 순간의 만남의 기쁨을 맛보고자 우리는 그 많은 고통과 번민, 절망과 환멸의 바다 속에 기꺼이 우리를 내던지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읊었듯이 ‘지구는 겨울이라 춥고 어둡’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살아간다.

나는 새벽 공기에 나의 볼이 차가와 질 때까지 거기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머리 속은 하염없는 단상들로 뒤죽박죽이 된 채로, 하지만 가슴 속은 뿌듯한 채로. 상념들… 주변이 고요하면 머리 속은 번잡스러워지게 마련인가 보다.


1994.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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