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살도 몇 먹지 않은 주제에 이런 소리하면 좀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란 나이를 먹어가면 먹어갈 수록 ‘왜’, ‘어째서’ 라는 질문을 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아이에서부터 어른이 되어가고, 마침내는 어른이 되는 지경을 넘어 늙어가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 무렵이 되면 (하지만 나는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떨어져 나가도록 머리를 흔들며 부정하려고 애쓴다. 내친 김에 얘기지만 나이 30이 뭐가 많단 말인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는 경우의 가지 수는 늘어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경우는 무척 줄어든다. 아예 그런 생각을 할 마음조차 먹지를 않는다. 그리곤 생각한다. ‘음… 난 역시 현명해…’ 보다 완벽한 바보가 되가는 건지 삶의 지혜를 터득해 나가는 건지 도대체 구별이 안 된다.
우리가 이렇게 되는 이유는 (아니, 저만 그런 거라고요?) 아마도 세상엔 너무 감당해 내기 벅찬 일들이 많고 그 하나 하나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때론 사람을 완전히 탈진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서론이 무척이나 거창했다. 이런 식으로 한 열 페이지쯤 쓴다면 이걸 읽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진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글이란 빈정거리든지, 웃기든지, 독설을 퍼붓든지, 쌍욕을 하던지, 아니면 하다 못해 야하기라도 해야 읽을 맛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내가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현실적인 이해를 한 것은 꽤나 이른 나이였다고 한다.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전설에 따르면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를 (아버지였나?)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죽고, 할머니도 죽고, 아빠도 죽고, 엄마도 죽고, 누나도 죽고… 그리고 메리(혹시 전에 필자가 백일장에 올린 ‘친애하는 짐승 여러분’이라는 글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옛날에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다.)도 죽고… 다 죽고 나면 나 혼자서 어떻게 살아…?” 하더니만 서럽게 엉엉 울더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 죽는 생각만 하고 저도 죽는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으니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어린 나이에 더 이상의 생각을 어찌 했겠는가. 어쨌든 그 때 세상에 혼자 남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서럽고 슬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진다(?). 하지만 이내 ‘왜 죽는가?’ 또는 ‘어째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건가?’ 하는 의문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것들은 금방 ‘왜 사나?’로 바뀌었고 그런 고민도 잠시였다. 삶이란 그런 의문들을 언제까지나 가슴에 품어두도록 나를 놔두진 않았다. 너무나도 생각할게 많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많아서 그런 순진한 의문들이란 금새 보다 현실적인 다른 질문들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지금 눈앞에 기름이 잘잘 흐르는 스테이크가 있다면 나는 왜 불쌍한 소들이 나의 앞에 스테이크가 되어 나타나기 위하여 희생되었는지 고민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필자는 무척 식욕이 왕성한 편으로 남의 살이라면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이다.)
세월은 흘러 나는 수없이 많은 삶과 죽음이 찰나에 교차하는 병원이라는 생존의 현장에 인턴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던져졌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다시 한 번 나는 할 말이 없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같은 사람인 의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천천히 되새기기에는 너무나도 상황이 빠르게 바뀌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지금은 사람의 생명이 같은 사람인 의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단지 겉보기에 그럴 뿐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결정을 내려져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결정이 신참 중의 신참인 나 같은 인턴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나는 대개의 경우는 그저 누군가에 의해서 내려지는 결정을 집행하는 사람일뿐이었다. 그러므로 더욱 더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결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어떤 환자에 대해서 더 이상의 치료를 하기를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는 때였다. 그렇게 치료를 포기한 환자 중 일부는 집으로 보내졌는데, 이것은 한국적인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해서 환자가 ‘객사하지 않고 집에서 운명하시기를’ 바라는 보호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조금 경향이 바뀌어가는 느낌도 든다.) 그렇다면 앰뷸런스를 타고 집에 갈 때까지 목숨을 부지한 후, 집에 도착해서 운명하시게끔 해야한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누군가 의사가 따라가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이런 경우, 이 일은 인턴의 몫이었다.
이렇게 환자를 수송하는데 의사가 따라가는 일을 우리 의사들 사이에서는 은어로 ‘배달’이라고 불렀다. 배달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만 생각하고 환자를 짐짝 취급하는 거냐고 화내지 마시기 바란다. 이건 그저 의사들끼리 사용하는 은어일 뿐이니까. 막간을 이용해서 잠깐 딴 소리를 하자면, 우리 한민족은 그야말로 ‘배달민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배달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중국집의 ‘철가방’을 비롯하여 미국의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게 ‘가스통을 짊어지고 질주하는 한국의 무서운 폭주족’이라고 오해받는 프로판가스 배달 아저씨, 연탄 배달, 피자 배달, 도시락 배달, 세탁물 배달, 그것도 모자라 환자까지 가가호호 배달을 해주니 이 어찌 배달민족이라고 아니할소냐! 에고… 헛소리 그만 뚝!
내가 처음으로 이 ‘배달’을 가게 된 것은 신경과를 도는 5월이 되어서였는데, 처음으로 가게 된 것이 장거리 배달이었다. 청주까지 가게 된 것이다. 나의 주치의는 총애하는(?) 인턴을 먼 곳으로 보내는 것이 마음 아팠던지 그의 인턴 시절 배달 경험담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는 눈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 겨울날에 강릉까지 다녀오게 되었는데 강릉에 도착해서 환자를 집안에 들여놓고 다시 돌아오려는데 폭설이 퍼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앰뷸런스 운전기사의 운전하는 모양이 영 불안했던 터에 눈덮힌 대관령을 그 앰뷸런스를 타고 넘어갈 생각을 하니 끔찍하더란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환자 가족이 수고하셨다면서 찔러준 촌지 봉투가 잡히는데 체면상 꺼내서 세어볼 수는 없지만 주머니 속에서 세어보니 네 장인 것이 확실하였다. 에라, 까짓 거, 비행기 타고 가자! “기사 아저씨, 먼저 가세요, 저는 따로 갈께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굉장히 염려스러운 표정의 앰뷸런스 기사 아저씨가 떠나고 나자 갑자기 휑한 겨울 바람이 그의 옷섶을 파고들었다. 아뿔싸! 그는 내복도 안 입고 와이셔츠 위에 흰 가운 하나 걸치고 있었을 뿐인데 때는 엄동설한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흰 가운을 입고 강릉 시내를 활보할 수도 없지 않는가.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덜덜 떨면서 가운을 손에 말아쥔 채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헌데 공항에 도착해서 돈봉투를 꺼내보니 넉 장은 넉 장인데 오천원짜리 넉 장이 아닌가! 택시비와 비행기 표 값을 치르고 나니 동전 몇 개가 남을 뿐이었다. 거의 동태가 되기는 했지만 얼어죽지 않고 그가 병원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지동아, 알겠니? 부디 너는 이 못난 선배의 전철을 밟지 말고 꼭 입을 옷을 챙겨가거라.”
주치의 선생님의 따뜻한 염려를 뒤로하고 환자와 함께 청주로 떠났다. 염려 붙들어 매시라고요. 꽃피는 화창한 오월인데 뭐가 걱정이냐고요. 환자는 갓 스무살이 넘은 아가씨였다. 다발성 경화증 (multiple sclerosis)이라는 다소는 생소한 신경계 질환으로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고 최근 병세가 크게 악화되어 중환자실에서 인공 호흡기 신세를 지고 있었다. 회복의 가망은 안 보이고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고향인 청주의 작은 병원으로 옮기려는 것이었다. 말이 병원을 옮기는 것이지 사실상 치료를 거의 포기한 셈이었다. 나는 청주가 초행길이지만 그녀에게는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었다. 나의 임무는 가끔씩 그녀가 숨을 쉬나 안 쉬나(!) 살피고 분비물들이 입 안에 고이거나 하면 제거해주는 정도의 일이었다. 만약에 숨을 안 쉰다면? 하지만 걱정 없다. 내 손에는 앰부 (ambu: ambulatory bag, 손으로 쥐어짜서 숨을 불어 넣어주는 도구)가 들려 있으니까. 좀 심각한 순간이지만 헛소리를 한마디만 하겠다. 세상에 사람이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절대로 죽을 염려가 없다. 심장만 부지런히 뛴다면 말이다. 숨은 안 쉬어도 누군가가 대신 (혹은 기계가 대신) 쉬어줄 수 있지만 심장은 대신 뛰어 주지는 못한다.
환자의 상태는 큰 변동이 없어서 다행히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저 한가로이 흔들리는 앰뷸런스에 몸을 맡기고 졸지나 않으면 그만이었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번잡스런 병원의 일들에서 잠시 벗어나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한때는 예뻤을지도 모를, 그러나 지금은 꺼칠하게 엉망이 되어버린 그녀의 얼굴, 그리고 거의 초점을 잃은 흐리멍덩한 두 눈과 입가에 무방비 상태로 흘러내리는 침을 보면서 젊은 나이에 참 안됐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심드렁한 느낌이었다. 앰뷸런스는 금새 청주에 도착하였고 앰뷸런스가 우리 병원 소속이 아니고 청주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나는 고속버스로 돌아와야 했다. 그 병원 쪽의 의사가 나와서 환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그래도 배달원이 아니라 의사로서 따라온 것이니 그녀에 대해 몇 가지 사항들을 인계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나를 거들떠 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들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그때, 남루해 보이는 환자의 아버지가 나를 붙잡더니 꾸깃꾸깃한 지폐 몇 장을 나의 손에 쥐어주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어쩐 일인지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이 몰려들었다. 나는 애써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빠져 나왔고,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웬지 모를 감상과 ‘이 세상 모두 덧없다.’는 느낌에 시달려야만 했다. ‘도대체 배달이란 것은 갈게 못되는군.’ ‘사는 게 뭔지, 젠장…’
하지만 나는 나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배달을 가야만 했다. 한 번은 거의 사망하기 직전의 환자를 태우고 가게 되었다. 나의 손은 계속해서 앰부를 쥐어짜야만 했다. 헌데, 채 절반도 못 가서 나는 환자가 이미 절명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뭐 손을 쓸 도리도 없었다. 창피스런 이야기이지만 대개의 앰뷸런스라고 하는 것은 수액병을 (속칭 링게르 병) 달아 놓기 위한 고리가 달려 있는 것 외에는 봉고차과 다를 바가 없는 것들이다. 환자의 가족은 “아직 괜찮으신 건가요? 돌아가시진 않았나요?”하고 계속 나에게 물었고 나는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시체에 계속 숨을 불어 넣으면서 “예, 예.” 해야 했다. 그리곤 집에 도착해서 환자를 방에 내려놓자마자 “운명하셨습니다.”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이 돌아와 버렸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는데 주치의의 이야기로는 집에 도착하여 앰부로 인공 호흡 시키는 것만 중단하면 바로 사망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막상 집에 도착하여 인공 호흡을 중지하고 기도에 넣었던 관까지 제거하였는데도 환자는 계속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환자의 가족들은 심각한 얼굴로 “언제쯤 돌아가실까요?” 하고 물었고 도저히 ‘지는 잘 모르것는디유~ 지는 암것도 모르는 인턴인디유~’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엄숙하게 “두 시간 이내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등줄기에는 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이내 부리나케 그 집을 빠져 나왔다. 병원에 와서도 나는 다음 날 그 환자가 두 발로 걸어 들어와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이놈아, 네가 생사람을 죽이려 들어?” 하면서 덤벼드는 환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 남은 수속 절차를 마무리하러 온 가족들을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을 때 나는 순간 무척 당황하였다. 하지만 가족들은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 “선생님 가시고 나서 금방 운명하셨습니다. 어제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큰 쥐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에 이 빌어먹을 놈의 ‘배달’이란 도대체 할 짓이 못된다. 시간이 지나 나는 인턴을 마치고 주치의가 되었으며 이번에는 내가 나의 후배인 인턴을 배달보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2년차가 되어서 나는 어떤 병원에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가 전공의 선발 시험 철이라 모든 인턴이 시험보러 가버리고 레지던트들만 병원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녁에 응급실에 한 젊은 남자가 도착하였다. 머리가 좀 아프고 열이 약간 나고 있었지만 환자가 약간 안절부절 못 한다는 것밖엔 별달리 이상한 것이 없었고 그저 감기 몸살이라 해도 전혀 틀릴 것이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려보낼까 입원을 시켜서 경과를 볼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원을 시켰는데 나중에 그때 자칫 집으로 돌려보냈었다면 정말 큰 일이 났을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다음 날 출근해서 그 환자에게 가보니 환자는 간데 없고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에는 필시 환자가 뭔가 잘못된 것이고 주치의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기 마련이다. 어제 저녁에는 멀쩡했던 환자가 오늘 아침에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기도 하는 것이 병원이다. 알아보니 그는 중환자실에 가 있었다. 급히 내려가 환자를 보니 한마디로 ‘으악’이었다. 그는 반 혼수 상태가 되어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발버둥치는 환자를 붙잡고 천신만고 끝에 요추 천자를 해서 뇌 척수액 검사를 해서 뇌막염이라는 진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항생제를 투여하였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들이 다른 큰 병원으로 가겠다고 막무가내였다. 결국 가게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인턴이 없으니 ‘배달’을 나갈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전무후무하게도 2년차 레지던트인 내가 가게 된 것이다.
그를 싣고 다른 병원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또 한없이 무거워 졌다. 이런 중환자를 데리고 다른 병원으로 불쑥 들어가서는 나는 도대체 무슨 욕을 들어먹을 것인가. 환자가 어떻게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환자 가족들이 나를 가만 놔둘까,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난무하고 있던 참에 나는 문득 환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좀 전까지 인사불성이던 환자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어디죠?” 환자가 멀쩡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럴 수가. 투여한 항생제가 앰뷸런스 타고 오는 동안에 극적으로 병세를 호전시킨 것이었다. 환자를 보내려던 그 병원에는 이미 도착하였지만 이미 환자는 멀쩡하게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그 병원에서는 뭐 이런 환자를 데려 왔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고 가족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병원을 안 옮기는 건데…” 하고 가족들은 아쉬워했다. 그래도 나는 그곳에 환자를 내려놓고 올 수밖에 없었다. 좋아지는 환자를 뒤로하고 오려니 나도 참 아쉬웠다. 환자 가족들은 두 번 세 번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세상에 오래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기네 그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 한번 상념에 잠겼다. ‘가끔은 할만한 배달도 있네…’
나는 지금도 내가 ‘왜’ 이놈의 골치 아픈 의사라는 직업을 때려치우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실은 이제는 생각하기도 좀 귀찮아진다. 대신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 보면 어쨌거나 간에 이젠 의사 노릇 외엔 벌어먹고 살 재주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어쩌랴. 아니면, 혹시 배달에 재미 들려서 그런가? (그럴리가!)
199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