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 시절 (1)

시간이란 물 흐르듯이 마디없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흘러만 가는 시간에 억지로 금을 긋고 한 시절의 끝과 새로운 시절의 시작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축하하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 시험에 합격한다고 갑자기 어느 순간에 어리어리하던 의과대학생이 유능하고 빠릿빠릿한 의사로 둔갑할 수는 없다. 어느 환자나 경험이 풍부하고 연륜이 있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를 원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다. 세상에 초보운전을 거치지 않고 능숙한 운전자가 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사가 되겠다는 어리석은(?) 꿈을 안고 막 임상에 나선 햇병아리 의사에게는 스스로조차도 자신감이 없으면서도 환자를 안심시켜야하고 신뢰를 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크나큰 짐이 된다. 그런 부담이 크면 클수록 어이없는 실수가 터져나오기 마련인 것이 누구나의 데뷔시절인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즐겁게 보내었던 예과 시절을 마칠 때,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나도 역시 착잡한 심정에 젖어야했다. ‘이제 나의 젊음은 끝이로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종말론(?)때문에 나는 예과에서의 말년을 ‘놀 수 있을 때 마음껏 놀아나보자.’하면서 체력이 닿는 한 열심히 놀면서 지내었다. 한편으로는 본과가 아무리 삭막하고 죽어라고 공부만 해야하는 지옥같은 곳이기로서니,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의 이야기 (과장이 많이 섞인)로 추측컨대는 사람 사는 곳이긴 하지만 그다지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좋은 나라는 아니라는 인상뿐이었다. 하지만 본과에 진입하여 몇 달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역시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물에 빠진 줄 알고 허우적거리다 일어나 보니 허리에 차는 물이었다는 식이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놀라운 것이어서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갈 길을 항상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마침내 본과를 졸업하고 그간 무려 12년간을 따라다녔던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게될 지경이 되었을 때, 예과에서 본과로 올라갈 때와 비슷한 ‘이제 드디어, 마침내, 말세가 도래하였도다!’하는 비감(悲感)에 사로잡힌 나는 ‘그래 지금 안놀면 언제 놀랴?’하면서 다시금 젊음을 불태웠다(?). 오죽하면 이런 노래도 있을까?


1. 노세 노세 예과 때 노세

본과 가면 못노나니

예과는 천국이요 본과는 지옥이라

(후렴)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사그리 왕창 사그리 왕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2. 노세 노세 본과 때 노세

인턴 되면 못노나니

본과는 지옥이요 인턴 되면 생지옥이라

(후렴)

… 후략…


그리하여 이 노래는 인턴 때도 놀고, 레지던트 때도 놀고, 개업해서도 놀고, 나중에는 살아서 놀아야지 죽으면 못 논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은 죽어서 진짜 지옥에 가서도 놀고 마침내는 환생해서도 또 놀자는 감동적이고도 진지한 멧돼지(?)를 담은 노래다. (제가 좀… 한심해 보이시죠?)

졸업식 전전날까지도 여행을 다녀왔었던 나는 만 하루를 거의 혼수상태로 있다가 간신히 일어나서는 졸업식장으로 기어나왔다. 졸업식이란 것이 도대체 사진 찍자고 하는 것인지 뭐하자고 하는 것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고 내일 모레부터 병원에 들어가 인턴으로 박박 기어야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별로 축하받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사실 한달 전부터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져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으니까…) 다른 학교들도 그러한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졸업하였던 의과대학은 졸업식을 두번 하였다. 한번은 본교에서, 한번은 따로 떨어져 있는 의과대학 캠퍼스에서. 이것도 이중과세라고 해야할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사진 찍을 일은 무지 많은 셈이다.

졸업식은 끝나고 가족들의 따뜻한 축하를 뒤로하고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병원으로, 나의 인턴으로서의 첫 근무지인 응급실로 옮겨야 했다. 첫날 근무의 교대시간이 오후 여섯시였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불안한 마음에 미리 좀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에라, 나도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시간에 맞추어 나가기로 하였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되었고, 나는 황망한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난 인젠 죽었다… 흑흑, 어머님, 아버님, 소자 이만 떠나옵니다… 부디 만수무강 하시오소서…

응급실에 들어서보니 펼쳐지는 상황이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똥오줌 못 가릴 것이 뻔한 신참 인턴들이 우왕좌왕하고 있고, 조금이라도 돌보아주다가 가야 마땅할 전임 인턴들은 진작에 거미 새끼 흩어지듯 뿔뿔히 도망가버린지 오래였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한다고 친절하게 일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대시간보다 훨씬 먼저 와서 일하고 있던 친구들에게는 무척 미안하기는 했지만 미안해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환자들은 무지무지하게 들이닥쳤고 바빠서 죽을 틈도 없었다. 아구… 제발 좀 그만들 오시라고요… 아무래도 응급실 앞에 커다랗게 써붙혀야 할까보다. ‘여기 있는 의사들은 면허 딴지 한달이나 됐음.’

한밤중을 넘어서 새벽이 되어서야 밀물처럼 몰려오던 환자들의 물결이 멈추었다. 휴-하고 한숨을 돌렸지만 곤두서버린 신경때문에 짬이 났는데도 도저히 눈을 붙힐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최소한 18시간을 버텨야하니깐 잠을 자두어야하는데… 하지만 잠이 안 오는데 어쩌랴.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근무하고 있었는데 각자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억지로라도 자보려고 침대에 누었지만 마음만 뒤숭숭하고 잠은 안 와서 그저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당직실의 전화벨이 울리자 네 명이 동시에 놀란 토끼마냥 튀어 일어났다. 그리곤 허탈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야, 제발 이러지 좀 말고 교대로 자도록 하자. 그래야 쉬는 사람은 쉬고 일하는 사람은 일할 것 아냐.”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리하여 시간을 정해서 교대로 자기로 했지만 어쨌든 누워있어도 잠 안 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억겁처럼 기나긴 24시간 근무를 마친 나는 무거운 다리와 구두 속에서 빵빵하게 부어버린 듯한 발을 터덜터덜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즉시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어보니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났지만… 젠장… 응급실이 아니라 우리 집이잖아… 전화기의 벨소리를 죽여놓고 또 혼수상태.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날 오후였다. 윽… 몇 시간 있으면 또 출근해야한다! 이게 사람 사는 거냐, 귀신 삽질하는 거냐?

조금은 익숙해지면서부터는 다들 틈만 나면 잠도 자고 여유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잠귀가 밝은 나는 상당히 불리하였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는 잠이 깨어버리기 마련이고 도대체 또 무슨 일일까?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게다가 울리는 전화를 머리 맡에 놓고서도 씩씩거리고 자는 이들에게 어떻게 당할 것인가. 어쩌는 수 없이 전화에서 가장 먼 곳에서 자고 있는 내가 기어 내려와서 받아야지. 그런 전화일수록 나를 찾는 전화인 일은 드물고 대개는 전화통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찾는 전화이기 일쑤였다. 전화기 노이로제에 걸려버린 나는 집에서는 내 방의 전화기는 아예 소리를 꺼놓고 지내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덧 응급실에서 보낼 날도 며칠 남지 않게 되었다. 환자가 무척 드물게 오던 어느 날 밤, 우리는 의논 끝에 한 사람을 집에 보내주기로 하였다. 우리 네 명 중 한 명은 여학생, 아니, 여의사였는데 그 친구는 다른 과에서 역시 고생하고 있을 우리의 또 다른 친구와 결혼한지 몇 달 되지 않는 사이였다. (너무 복잡하게 설명했나? 그러니까 과커플인데 신혼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의 남편이라고 -같은 인턴 처지에 – 과연 집에 들어와 있을지는 의문이기는 했지만 하여튼 신혼이니까 보내주기로 한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눈물겨운 우정이죠?) 그리곤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세 명이 응급실을 사수하기로 한 것이다. 헌데, 새색시가 한편 미안해하면서도 다른 한편 기쁨에 들떠 집으로 가버린 후, 환자 한 사람의 상태가 나빠졌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내과 당직 주치의는 보호자와 의논한 끝에 집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집에서 운명하시길 원한 것이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환자의 목숨을 부지시키려면 누군가 의사가 집까지 따라가야만 했는데 집이 지방이어서 갔다 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한 명이 또 가버리면 둘밖에 안 남는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부르터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만화영화 뽀빠이에 나오는 부르터스와 인상착의가 비슷한데 그보다는 조금 선량하게 생겼다고 보면 된다. 우리 동기 중에는 뽀빠이와 올리브도 있었다. 비록 서로 별로 친하지 않지만…) 친구가 따라가기로 하고 나와 당시 강가딘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왜 그가 그런 별명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다른 한사람이 응급실에 남기로 하였다. 둘이서는 초조한 가운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고 빨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신환이 없어서 응급실은 완전히 적막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둘이 멀뚱멀뚱 앉아있던 끝에 강가딘이 느닷없이 침묵을 깨고 한마디 하였다. “야… 그래도 정말 아무 일도 안 생기네?” “아니, 이 화상아! 재수 없는 소리를!” 그는 흡!하고 입을 막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쩌랴. 그 순간부터 엄청난 일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꼭두새벽에 신환이 마구 밀려들고, 멀쩡하게 누어있던(물론 겉보기만 멀쩡한 거겠지만) 환자가 갑자기 심장이 멈추어버리질 않나, 깡패가 술먹고 싸움하다가 들어와서는 난동을 부리질 않나… 우리 둘은 그야말로 응급실을 사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날이 밝고 우리의 부르터스가 그때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런 끔찍한 일이… (아침에는 환자들 채혈 등 할 일이 많아서 매우 바쁘다.) 밤새도록 쉴새없이 일한 우리 둘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아… 이젠 틀렸다… 드디어 여기서 장렬히 전사하는구나… 알라모 요새를 지키며 최후까지 인디안과 싸우던 기병대원들이 이런 비장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때, 거의 침침하게 감겨오는 나의 시야에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낮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앗… 부르터스… 어디 갔다 인제 왔어?” “얘가 정신이 있나 없나? 내가 가긴 어딜가?” 그는 초췌해진 나머지 거의 인간의 몰골이 아닌 우리 둘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휴… 이젠 살았다… 거기에다가 그 순간에 집에 갔던 우리의 새색시가 뜻하지 않게 뽀송뽀송한 얼굴로 다시 출근한 것이다. “걱정되서 도로 왔어… 히… 나 이뻐?” “그려그려, 에구, 이쁜 거…” 아참… 남의 마누라한테 내가 왜 이려… 그리하여 우리는 응급실을 하루 동안 무사히 사수할 수 있었다.

고되었던 응급실에서 한달 동안 숱한 역경을 같이 헤쳐온 우리 네명은 다시 각기 갈길로 흩어지게 되었다. 불행히도 나는 고난의 가시밭길인 일반외과로 가게 되었다. 모두들 힘내라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강해져가고 있었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고생길을 헤쳐나가는 것은 그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항간에도 유명해진 인턴에 관련된 격언 중에 ‘인턴은 삼신(三神)이다. 자는 데 귀신, 먹는 데 걸신, 일하는 데 등신.’ 이란 말도 있지만 정작 더 값진 말은 잘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인턴에겐 삼복(三福)이 있어야한다. 스케쥴 복, 주치의 복 (주치의는 인턴의 바로 위의 직속 상사가 된다.), 그리고 파트너 복.’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파트너 복이 아닐까? 헌신적으로 일하고, 어려운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친구를 아껴줄 줄 아는 동료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모른다.


199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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