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마디로 컴퓨터 게임에는 일자무식인 사람이다. 그게 내 체질인지, 아니면 둔하기 짝이 없는 운동신경과 발뒤꿈치같이 무딘 센스 탓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게임을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게임을 증오(?)한다고나 할까… PC라는 신통한 물건을 만지게 된 것이 한 5년밖에는 안되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써볼까, 우짜면 좀 더 일을 편히 하는데 쓸 수 있을까 등등 이모저모로 고민하며 시간을 보 낸 끝에, 컴퓨터에는 아래아 한글과 도스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무식~한 (!) 사람들이 꽤 있는 나의 직장에서는 뭔가 해결이 잘 안 되는 문제가 있으면 나를 찾는 지경이 되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 고…) 예를 들면 “왜 내 컴퓨터에서는 hwp쳐도 아래아 한글이 안 뜨지?” 하고 엄청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바보야…(이 말은 물론 속으로) 아무데서나 쳤다고 되니? 그러려면 autoexec.bat에 path 중에 c:\hwp를 넣어줘야지…하고 현학적인(?) 대답을 해 준다든가, 워드프로세서와 타자기를 구별 못하는 가련한 나의 친구가 쳐넣는 줄줄이 끝에 다 엔터를 쳐서 나중에 문단 조정을 하다가 엉망이 되는 광경을 보고 “콤퓨터를 돌도끼 쓰듯 한다”며 잘난 척하면서 갈군다든지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으휴… 써놓고 보니 내 자신이 너무 가증스럽다… 이 글을 읽으시는 컴 도사님들 저를 어엿비 여기소서…)
헌데, 이렇게 실은 쥐뿔도 모르면서 (이~씨~ 누구 쥐뿔 본 사람 있어? 있으면 다 덤벼!) 아는 척하길 즐기는 내가 컴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만 나오면 찍 소리도 못하고 깨갱깨갱하면서 도망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게임이다!
나의 직장에는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PC가 있는데, 그 하드디스크에 누군가 게임을 깔아 놓는다면 그 파일은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게임 파일만 지워버리는 인간 바이러스, 바로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PC의 하드디스크의 소중하고도 제한된 공간을 하찮은 게임 따위로 낭비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일견 무척 정의로와(?) 보이는 대의 명분 하에 오늘도 이 바이러스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실은 나는 게임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게임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다면 누가 믿을까?
인베이더! 벌써 15년쯤 전의 일일까? 이 지구를 침공해오는 우주인들에 맞서 싸우는 이 원시적인 게임은 지금이라면 아마도 다섯 살 먹은 어린애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조잡한 것이었지만 아케이드형의 게임 (맞나? 실은 정말 잘 모르는디…)의 시조라 할 이 게임기는 순식간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이 게임의 한판을 다 깨본 적이 없다. 나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오는 가증스런 문어 대가리들을 향해 손에 쥐가 나도록 쏘아대지만 결과는 항상 한판을 채 깨기 전에 나의 무참한 패배로 끝나고야 마는 것이다. 이런 한심한 실력으로 어찌 지구를 지킬 것인가! 친구들은 ‘움직이면서 쏘라’고 우정어린 충고를 해주곤 했지만 내 머릿속의 CPU는 멀티태스킹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된 것인지, 왼손과 오른손은 따로 움직여 주질 않았고 나는 결국 직접 게임을 하기보다는 게임하는 남의 등뒤에 서서 그들이 지구를 사수하는 장렬한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곤, 그 뒤로 항상 그러하였다. 갤러거라는 보다 세련된, 한 단계 발전한 인베이더가 출현하였지만 나에겐 역시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그들은 흔히 오락실로 발을 옮겼고 나는 어지러운 모니터 화면의 빛과 굉음 속에 파묻힌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정말로 어쩌다가 게임기 앞에 한 번 앉을라치면 나의 한심한 실력을 본 동네 꼬마들이 몰려들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었고 나는 다시 조용히 물러나 앉아 그 꼬마들의 경이로운 솜씨를 감상하곤 하였다. 그 현란하고 아름다운 세계… 환상이 있었고 모험이 있었지만 나는 그 매혹의 세계를 애써 등졌다.
그 뒤론 게임보다 중요한 일들도 많이 있었다. 게임의 세계를 등지고 학업에 정진한 탓인지(?) 나는 남들이 동경하는(?) 대학의 알아주는 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곤, 한 학우를 만나게 되었다. 게임의 황제! 친애하는 나의 친구… 그는 진정한 게임의 황제였다. 그는 가끔 나를 끌고 오락실에 가곤 하였는데 물론 나는 할 줄 아는 게임이 없지만 그의 화려한 플레이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 당시에 “황금 도끼”인가 뭔가 하는 게임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것은 두 사람이 같이 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 것을 같이 하자고 졸랐다. 나는 내가 같이 해봤댔자 일생에 도움이 안 되며 방해만 될 것이라고 하 였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마침내 그에게 이끌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선 세 명의 전사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는 비키니 갑옷을 입은(!) 팔등신 금발 미녀를 골랐고 나도 슈발제네거 비스무레하게 생긴 우람한 사나이를 골랐다 (주제에!) 마왕(이 게임에 많은 캐릭터가 나오는데 자세히는 모른다. 그냥 그러려니하고 이해하시기를…)에게 잡혀간 왕과 왕비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길을 떠났다. 방방 뜨는 비키니 아가씨가 덤벼드는 마왕의 부하들을 처치하는 동안에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주로 죽지 않으려고 도망다니는 일이었다. 죽을 뻔한 나를 금발 미녀가 여러 차례 구해주고 계속 길을 재촉하던 중 어이없는 일이 생 겼다. 발을 잘못 디뎌(?) 절벽으로 떨어져서 개죽음…. 크… 첨부터 다시… 여러 번의 시행 착오를 거치면서 약간의 무공(?)을 익힌 나는 조금씩 한 몫을 해내는 전사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호흡이 잘 맞지는 않았다. 나의 친구는 기분 전환을 위해 전사를 바꿔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슈발제네거 대신에 도저히 힘쓸 것 같이 생기지 않은 꼬부랑 할아버지를 선택했고 의의로 할아버지의 도끼는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우리는 이제 무적의 팀이었다. 비키니 아가씨는 검술, 점프, 발길질, 옆차기, 돌려차기 등 화려한 무공으로 마왕의 강력한 부하들을 하나 하나 꺼꾸러뜨렸고 꼬부랑 할아버지는 투박하지만 위력적인 도끼질로 적들을 난자하였다. 마침내는 마왕의 성!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 해 흉폭한 마왕과 싸웠고 난장이 요정들로부터 받은 마법 호리병들을 일시에 터뜨렸다. 드디어, 마왕은 쓰러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지친 우리들은 땀을 닦으며 게임의 전 코스를 완주한 플레이어만이 볼 수 있는 재미난 화면을 즐겼다. 하지만 우리는 곧 무척 바빠졌고 아쉽게도 환상의 복식조는 다시는 왕과 왕비를 구할 기회가 없었다.
테트리스! 이 별 것도 아닌 게임이 나를 다시 한번 게임의 세계로 불렀다. 나는 나의 컴퓨터에서 (당시는 AT에 허큘리스 카드) 테트리스를 즐겼는데 역시 소질이 없어서인지 잘 하지는 못하지만 꽤 즐겼고, 밤이면 천장에서 회전하는 벽돌 쪼가리들이 쏟아지는 환상에 빠지곤 하였다. 후에 486에 VGA 카드를 달고 헥사테트리스를 실행 시켰을 때의 그 경이로움이란! 칼라 모니터란 오락을 위한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우쳤다. 허큘리스 시절의 천장에서 떨어지던 흑백 벽돌들의 환상은 이젠 오색 영롱한 칼라 벽돌들의 환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요사이, 나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몸보다도 마음이 더 빨리 늙어버린다는 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아마 나는 이제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기엔 너무 마음이 늙은 것이 아닐까? 시뮬레이션이니 롤플레잉이니 하는 낮설은 용어가 등장하고 게임 전문 잡지까지 있는 세상이지만 난 컴퓨터의 세계 안에서도 그 밝고 영롱한 세계를 등지고 어둡고 침침한 반대편에서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게임이 사람들을 중독시키며, 고립시킨다고들 하지만, 어딘가에 중독되고 미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일이 아닐까. 게임을 하다가 현실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 버린다면 그건 전적으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아닌가. 게임의 세계는 상상력과 모험, 색다른 경험과 짜릿함이 가득찬 곳이다. 성숙한 자제력과 동시에 젊은 마음, 동심의 세계(?)를 간직한 사람만이 진정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언젠가 게임의 황제가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그건 아마 내가 은퇴해서 할 일이 없어진 다음이 아닐까? 백발 노인이 되어 게임의 황제가 된 나를 상상해 본다. 가상 현실 속의 모험의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헬멧을 벗고 땀을 닦으며 파안대소하는 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1994.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