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생리학을 위한 시간이다. 해부학은 우리에게 신체의 구조를 알려 주었지만 그것은 아직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해부학이 시체를 해부하는 학문이 아니며 시체 해부는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은 생리학과 생화학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산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을 이해하고자 함은 아니다. 해부학은 무려 7학점짜리의 엄청난 괴물로서 (연관 과목인 신경해부학, 조직학, 태생학을 합하면 무려 14학점이다! 휴…) 가련한(?) 의대생인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생리학과 생화학으로 인해 우리는 차겁고 어두운 카데바(cadevar, 시체)의 세계를 떠나 비로소 따뜻한 체온을 지닌 인간의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생화학이 눈에 뵈지도 않는 화학반응과 어지럽게도 돌아가는 각종 싸이클들로 우리를 질려버리게 한데 반해서 생리학은 보다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물론 첫 시험을 보았을 때 우리를 배신하였지만…)
우리는 인체의 미시적인 부분으로 끝없이 들어갔다. 세포 하나하나에 모세유리관으로 만들어진 전극을 꽃아 넣고 나트륨과 칼륨이 세포 안팎을 들락거리는 복잡스런 현상에 관해서, 근육이 어떻게 수축하는지, 심장은 어떻게 피를 뿜어내는지, 헤모글로빈은 어떻게 우리 몸 구석구석에 산소를 공급하는지, 소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사실과, 원리와, 현상과, 이유들이 난무하였고 사람의 몸은 냄새나는 고깃덩어리에서 차차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파이프라인, 막강한 호스트 콤퓨터에 연결된 방대한 광통신망, 엄청나게도 정교한 피드백에 의한 자동제어 시스템을 가진 최고의 정밀기계로 변해갔다. 흔히 ‘콤퓨터같은 사람’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콤퓨터는 인간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도 가지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기존의 지식을 통한 분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포도주가 가장 좋은 술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알코올은 체내에 들어오면 그 양의 약 10배 정도의 수분을 배출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알코올이 체내에 수분을 보존하는 항이뇨호르몬의 작용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9% 정도의 알코올 농도를 가진 술이라면 그 열배의 수분을 배출시키면 술에 포함되어 있던 수분을 그대로 배출시키게 되어 정확한 균형을 유지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농도가 높은 소주를 마시면 수분이 모자라는 상태가 될 것이고 맥주를 마시면 수분이 넘치는 상태가 될 것이다. (흐… 실은 아무거나 먹어도 취하기는 마찬가지지 뭐…)
마침내는 생리학 실습 시간에 신장생리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이 행해졌다. 실험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 운명의 사다리가 그려지고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가련한 모르못트 (모르못트 (marmot)는 실은 잘못된 말입니다. 실제로는 돼지쥐(?), guinea pig이지요. 아는 척 좀 해봤음…)를 선발했다. 선발된 실험 동물들 중에서도 희비의 쌍곡선이 있었으니 각 실험조마다 선발된 4명의 학생들은 각각 1리터의 맹물, 1리터의 맹물과 이뇨제, 1리터의 맥주, 그리고, 흐아… 1리터의 뇨산 (Urea, 짐작하실런지 모르지만 이것은 소변의 주성분이죠… 윽…)을 각각 마시고 소변을 모아 그 성분을 비교해 보기로 한 것이다. 맥주에 당첨된 실험동물은 ‘그래도 난 복이 많은 놈이야’ 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뇨산으로 물고문도 아닌 소변 고문을 받게된 실험동물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우 반항하였다.
헌데, 우리 옆방에선 여학생이 이 실험동물로 선발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그대로 실험을 할 것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과 그래도 봐줘야되지 않느냐는 기사도 정신(?)에 투철한 일파, 또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관찰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매우 아카데믹한(?) 학파 간에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유일한 여성 실험용 동물인 이 가련한 여학생은 자신의 운명을 놓고 벌어진 설전을 보다 못해 마침내 분연히 일어섰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의학의 발전을 위해 몸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뇨산이 아니라 똥물이라도 마시겠다. But, 그러나… (소변 수집용 통을 들어 보이며) 이걸 보라. 입구가 좁질 않는가. 이솝 우화에도 나온다. 까마귀가 황새의 긴 부리를 비웃었지만 가는 목을 가진 물병에 담긴 물을 황새는 여유있게 마실 수 있었지만 까마귀는 그러지 못하질 않았는가…
나는 정말 이솝 우화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이게 그 상황에 대해 적절한 비유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결국 새로 한 명의 남자 희생양을 선발해야했다. 누가 여자를 약한 자라고 했던가! 물고문을 방불케한 실험이 끝나고 나서 맥주 마신 쥐들은 1000 cc는 감질난다고 한잔 더, 뇨산 마신 쥐들은 입가심하러 한잔, 물고문 당한 쥐들은 기분 나빠서 한잔하러 가는 바람에 다음 날 수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던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가끔, 자기가 국민학교 때 허재와 같이 농구한 적이 있다는 둥, 유남규와 탁구 쳐봤다는 둥 별로 자랑거리 같지도 않은 이상한 자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도 생리학 이야기가 나온 이상은 이런 비슷한 이야기 하나 해야 할까보다.
우리 실험 조를 가르치는 생리학 교실 조교 선생님이 있었는데, 곱상한 동안(童顔)에 조용조용한 말씨의 천사 조교로 인기가 좋았던 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바로 이 땅에 컴퓨터를 만진다는 사람치고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 했다면 완전히 간첩으로 몰릴 것이 틀림없는, v3의 안철수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86년도이고 브레인 바이러스를 진단, 치료하는 vaccine.com이 나온 것이 88년도인가 그러니까 안철수 선생님이 아주 유명한 때는 아니었겠지만 의대 안에서는 컴퓨터에 대단한 실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컴퓨터에는 완전한 까막눈이어서 뭐가 대단한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유명해질 줄 미리 알았으면 그때 사인이나 받아둘껄, 흐…
이제 잡담을 그만 마쳐야 될 시간이 된 것 같다. 생리학은 우리에게 인체의 오묘함과 신비로움을 가장 먼저 깨우쳐준 학문이다. 이젠 정상적인 사람의 생리보다는 병든 사람의 비정상적인 생리때문에 더욱 고민하는 형편이 되었지만 정상을 모르고서는 비정상에 대한 이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고귀함을 깨우쳐 주었던 생리학이라는 학문에,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애쓰셨던 은사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동료들을 위해 실험동물이 되었었던 친구들에게도 감사한다.
이솝 우화로 우리를 무지한 우리를 깨우쳤던 그 여학생이 드디어 얼마 전에 결혼했다고 하니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1994.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