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사회, 권위적인 사회의 모습이란 그 밖에서 쳐다볼 때에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삶 자체가 슬프고도 비참한 일이 된다. 하이텔 대화방에 항상 눈에 띄는 제목인 ’80년대 학번, 그들의 꿈과 사랑…’ (이 제목이던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과연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을 볼 때면 역시 80년대 학번 중의 하나인 나에게는 기묘하게도 뒤틀려 있었던 그때의 상황들이 되살아난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씩은 암담한 시대가 빚어내는 어두운 추억들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으리라. (아닐까?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의과대학이라는, 외부와 격리된 듯한 (실제로 격리되어 있다기 보다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풍지대에서 살아온 나도 막연하고 추상적이나마 ‘이러한 시대에 이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진대 (아니, 지금이라고 해서 그 고민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다.) 수많은 갈등이 적나라하게 돌출되는 환경에서 지내었던 사람들은 그 고민이 오죽하였으랴.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할런지 알 도리가 없지만, 세상 산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아침에 학교에 나가 뒤틀리는 엉덩이를 걸상에 억지로 붙혀놓고 선생님 말씀 열심히 받아적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집에 와서 별 대단치도 않아 보이는 그것들을 죽어라고 머리 속에 우겨넣고, 대학생이 되면 신천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환상만을 쳐다보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대학교란 것은 역시 대단한 신세계는 신세계였다. 수업 빼먹는다고 뭐라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침 조회도 종례도 없었다. 교실 청소할 필요도 없었고 수업 끝날 때 치는 종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것은 대자보와 최루탄과 돌멩이가 교차하는 데모였다. 무엇 때문에 저 사람들은 저렇게 싸워야하는가가 무척이나 궁금하였지만 순진한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싸우고 있는 그 사람들은 길거리의 깡패들도 아니오, 격투기 선수들도 아닌 나와 같은 학생들이며 나와 다를 바 없는 이 땅의 젊은이들인데 내가 그들과 함께 있어야 옳은 것인지, 아니면 여기 그저 구경하는 채로 서 있어야 옳은 것인지. 처음에는 그저 무심하고 사치스런 호기심일 뿐이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진 호기심은 구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고민으로 변해갔다.
마침내는 수업 거부와 시험 거부라는 안건이 거론되었고 캠퍼스 전체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파악을 할 능력이 없었던 나에게는 그저 깜깜한 혼돈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그저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것은 대세를 따르며 일신에 손해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교활한 기회주의일 수도 있고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물결에 휩쓸리는 순진한 (순수하다는 말을 차마 쓸 수가 없다.)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남들 하는 대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왜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화염병으로 위험하게 불장난을 해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의 친애하는 한 학우가 있었다. 그는 지금 나와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사랑하는 동료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그를 흔히 ‘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가 결코 ‘짱돌’ (엄청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을 우리는 속된 말로 이렇게 부른다.) 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단지 그의 성이 장씨라는 것 외에는 ‘짱’이라고 불릴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선량해 보이는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그는 이상스럽게도 불심검문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나는 약간은 범죄형(?)에 속하는데도 거의 검문 당하는 일이 없으니, 전경들의 눈이 이상한 건지?) 수업 거부, 시험 거부의 회오리가 한차례 지난 뒤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제법 큰 규모의 데모가 있었던 날이어서 교문 밖에는 전경들이 좌우로 도열하여 나오는 학생들을 수시로 검문하고 있었다. 우리의 친애하는 ‘짱’은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인권 침해적인’ 불심 검문에 무척이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교문을 나서자 전경들이 길게 도열해있는 사이를 전력질주하였다. (직접 보지 못했고 그에게서 말로만 들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 같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경들의 도열한 사이를 막 빠져나갈 무렵 전경들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볼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영장있느냐’, ‘이건 위헌이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열지 않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여러 명이 그를 둘러쌓았고 험악한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하였다. ‘짱’은 순간 ‘망했다’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조금 높아 보이는 한 사람이 나서더니 ‘그러지 말고 좋게좋게 하지’하며 부드럽게(?) 나왔다. 졸지에 얻어맞을 것만 같은 위협을 느낀 ‘짱’은 할 수 없이 가방을 열었다. 헌데, 가방을 뒤지자 원고지에 쓴 글이 나오는데 제목이 ‘한국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아닌가! 분위기가 갑자기 표변하면서 ‘어이, 여기 원본을 가지고 있어!’하고 누군가 외쳤고 두 명이서 순식간에 양쪽에서 ‘짱’의 팔을 끼었다. ‘짱’은 변명할 틈도 없이 난작 들려서 ‘닭장차’에 실렸고 경찰서에까지 가서는 결국엔 자술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의 가방에 들어있던 ‘불온 문서의 원본’은? 그것은 교양 국어 시간에 내준 ‘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을 보고 느낀 바를 적어보라’는 작문 숙제였다. 그러니 제목이 ‘한국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될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그의 숙제(불온 문서?)를 결코 돌려주지 않았고 불쌍한 ‘짱’은 할 수 없이 다시 숙제를 해야만 했다. 다시 한번 부언하자면, 억압적이고 귄위적인 사회는 일면 무척이나 희극적이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고 정치는 그들이 일이 아니라며 면학에 힘쓰라고 준엄하게 ‘일부 소수 극렬 과격’ 학생들을 꾸짖는 정치인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그들이 올바르게 정치를 했다면 학생들은 결코 돌을 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희생을 치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치가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라고 할 때에 그것이 어째서 정치인(정치꾼?)들의 전유물이겠는가? 정치는 모든 국민들의 것이다. 정치에 상관말고 공부나 하라니. 80년대를 학생의 신분으로 보내면서 돌 한번 던져보지 못한 나같이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도 있지만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 그렇다고 난 공부만 열심히 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도 못한다.) 그런 나조차도 최소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었던 것이 그 때 그 시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피흘렸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한가로이 앉아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은 모두 그들의 덕택일 것이다. 그들이 아니라면 내가 억압받고 피흘리고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래도 여전히 ‘살아남았을’ 지도 모른다.) 큰 희생을 치른 이들에게는 많은 이들이 경의를 표하였으니 자격도 없는 내가 또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에 나는 ‘짱’과 같이 작은 일이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려고 한다. 투쟁이란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삭막하게 들리지만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란 제목의 원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는 사회에서 작건 크건 간에 투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비겁한 일임에 분명한 것이다. 이 것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다소는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지금은 어떠한가? 10년 뒤에 나는 어떤 내용의 글을 쓰게 될지? 혹시 이 글 제목이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이란 이유로 짤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 나의 친애하는 동료이자 친구 중 하나인 ‘짱’ 선생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그의 이야기를 쓴다는 허락을 미처 받지 못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1993.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