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의 진료실에 어떤 중년 남자분이 들어섰다. 처음 오는 분이다. 이럴 때면 필자는 항상 셜록 홈즈가 부럽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의뢰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리한 눈으로 스캔한 후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신통하게 맞춰내는 그런 놀라운 관찰력이 있다면 어떨까. 환자를 진단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으나 최소한 참 재미나기는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셜록 홈즈가 아니라 그 옆에서 그냥 입 딱 벌리고 감탄하는 역할 전문의 왓슨 박사 수준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냥 척 보고 다 알아 맞추진 못해도 주섬주섬 물어보다 보면 대충 파악될 일. 이 환자는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필자가 흔히 보는 고혈압 환자일까. 그런 기대를 뒤엎고 ‘어떻게 오셨습니까’라는 필자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온 몸이 아파요’ 였다.
참고로 좀 배경 설명을 하자면, 필자는 순환기내과 의사이고, 심장질환 예방, 재활이 주된 관심 분야이다. 그래서 실제 환자는 고혈압, 고지혈증 환자들을 보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데, 난데 없이 ‘온 몸이 아프다’라니? 아마도 도대체 어느 과로 가야할 지 헤메다가 고혈압과 당뇨를 가지고 있어 이미 약을 복용하고 있는 중이니 관련 있는 순환기내과로 가보자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고혈압과 당뇨 조절은 문제가 없는 듯하니 거기에 대해 내과 의사가 특별히 해줄 일은 없는 셈이었다.
참으로 난감하게도 ‘온 몸이 아프다’는 증상은 도대체가 종잡을 길이 없는 증상이다. 필자가 의과대학 시절 내과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할 때 매료되었던 책 중 ‘Problem-oriented medical diagnosis’ (약칭 POMD) 란 책이 있다. 실은 별 대단한 책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증상들을 열거해 놓고 각각 그 증상의 가능한 원인들과 그에 대한 해설을 주르르 달아 놓은 책이다. 대개의 의학 교과서라는 것이 어떤 ‘병’이 제목으로 나오고 그 병에 대하여 진단과 치료가 죽 나오는 것이 보통이지만,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은 그 반대이다. ‘어디어디가 아프다’라는 얘기에서부터 출발해서 그게 무슨 병인지 진단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 POMD란 신통한 책이 그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한동안은 이 비급(?) 하나만 터득한다면 어떤 환자가 와도 다 알아맞힐 것만 같은 우쭐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는 듣도보도 못한 괴상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 말이다. 이 ‘온 몸이 아프다’ 라는 증상은 필자가 좋아라 하는 그 무림비급을 아무리 뒤져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런 증상이다.
하긴 세상이 어디 뭐 FM 대로만 사는 건가. 이 복잡한 세상, 매뉴얼에 나온 것만 알아가지고는 벌어 먹고 살기 참 어렵다. 의사 노릇을 한 십여년 이상 해먹고서야 겨우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은, 이렇게 기존의 의학지식 어디에도 그다지 잘 들어맞지 않는 증상을 – 그것도 흔히 이것 저것 여러 가지 섞어서 – 호소하는 사람들의 상당 수는 신체적인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환자 분도 온몸이 아프고, 손발이 시리고 저리고, 아픈 데는 많은데 이 병원 저 병원 가보고온갖 검사들 다 해봐도 도대체 신통한 답도 없고 답답하다는 얘기다. 필자의 경우는 이럴 경우 두 가지 질문을 해본다. ‘식사는 잘 하시냐’, ‘잠은 잘 주무시냐’. 가끔은 당황스럽게도 잘 먹고 잘 잔다는 분도 없진 않지만 이럴 경우 십중팔구는 입맛도 없고 잠도 잘 못 주무신다는 분이 많다. 이분의 경우엔 이 질문에 줄줄이 사탕처럼 온갖 얘기들이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입맛도 별로 없고 잠이 안 와서 수면제를 먹어야 잘 수 있고, 결국은 필자가 예상한대로 신경정신과에서 우울증 약도 먹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식욕이 없고 잠을 잘 못자는 것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신체 증상들이다.) 거기다가 미국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한테 갔다가 뭔가 배신감을 느끼고 크게 실망한 얘기 등등 온갖 인생의 우울한 고민거리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환자분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의사의 중요한 할 일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엄청난 진료 지연으로 인해 진료실 문 앞에서 대기 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참상이 벌어질 수도 있으므로 죄송스럽지만 이 분의 안타까운 사연들은 적당한 선에서 접을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설득력있게 보이기 위한 모든 아우라를 동원하며 그에게 얘기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증상들은, 신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생기는 것들인 것 같습니다. 우울증에 의한 증상으로 다 설명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건 천하에 없는 명의를 찾아간 들, 무슨 정밀검사를 한 들, 진단이 따로 붙여질 병이 아니구요, 마음이 편해지고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생활이 바뀌셔야 좋아질 증상입니다. 말씀 들어보니 이미 병원도 여기저기 다니실 만큼 다니셨고 검사도 할 만큼 하신 상황인데, 또 우울증에 대해서는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고 계신 상황인데 제가 따로 더 해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아프신 원인은 선생님 마음 속에 있는 거구요,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결국 스스로 찾으실 수 밖에 없습니다.”
의사가 해줄 게 없다, 네가 알아서 해결 방법을 찾으라는 말에 다소 좀 뜨악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아픈 원인이 마음 속에 있다는 말에는 공감을 하시는 듯하였다.
“그래도, 혹시나, 무슨 도움이 될만한 약이 정말 없을까요?”
이런 간절한 말을 듣게 되면 필자는 환자에게 플라시보(placebo, 가짜약)라도 주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빠진다. ‘이 약이 아주 좋은 약입니다, 좀 드셔보시면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라는 달콤하고 강력한 암시와 함께 준다면 혹시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일 가능성도 제법 있고, 그러면 필자는 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유혹을 뿌리쳐야만 했다. 가짜약이 잠시의 위안을 줄 지는 몰라도 문제의 해결은 아니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 먹을래, 파란약 먹을래’하는 모피어스가 생각난다. 필자라면 빨간약을 먹을 것이다. 궁금해서라도 말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해결의 길이 있지 않겠는가.
“제가 드릴 약은 없습니다.”
냉정한 답이었지만, 오히려 환자는 편안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마움의 표시인지, 필자의 손을 한번 잡은 후 구부정한 모습에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진료실을 나갔다. 필자가 의사로서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 분이 현실을 직시할 계기가 되었다면 필자는 의사로서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란 것이 항상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는 법. 우울한 일, 억울한 일이 한두가지이겠는가. 그 마음의 고통은 신체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나타나는 신체의 고통을 첨단의학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어떤 명의가 해결해 줄 것 인가. 자기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을 어느 누구에게 맡겨서 해결할 일이겠는가. TV에 나오는 명의를 찾기 보다는 자기 마음 속의 명의를 깨워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지.
2012. 11. 19.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 노파심에서 추가합니다만, 정말로 우울증이 있다면 그것은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병이 아니라 의사와 의논하여 적극 치료하셔야 합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혼자서 이겨내라고 한다면 그건 안 될 말이지요. 이 사례의 환자는 우울증인 것은 맞지만 이미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환자의 증상이 심리적 요인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내과 의사가 거기에 대해 쓸데없이 검사를 하고 약을 주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기도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려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