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란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는 먹고사는 방편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즐거움과 보람을 주는가 하면 미숙한 인간을 성숙시키기도 한다. 헌데 이것은 때로는 환멸과 괴로움의 원천이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만성 피로와 권태로움의 원인이기도 하면서, 심지어는 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철저히 망가뜨리기까지 한다. 노동이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데, 일하지 않는 인간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직업이란,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일이 즐거우면 인생은 천국’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세상이 과연 천국인지? 일이란 게 즐거운 것이라면 과연 이런 말이 유명해질 수나 있었겠는지? 조금만 뒤집어보면 아주 지독스런 역설에다가 심술궂기 짝이 없는 신랄한 풍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왜 이럴까? 왜 일이란 것은 지겹고 고된 것일까?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 지겨운 일을 하다가, 그것도 쉴 줄 모르고 미친 듯이 탈진하도록 하고 또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일도 있다. ‘일 중독’이라는 증상도 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것이다. 도대체 이건 또 왜 인가?
직업과 관련된 스트레스가 건강에 뭔가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그러하리라 생각하는 상식이다. ‘스트레스가 건강에 나쁘다’는 말을 하는데 무슨 전문가가 필요할 것인가.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을 하니 이번에는 적당한 스트레스가 있어야 하고 너무 스트레스가 없는 것도 문제라면서 괜히 튀어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은 사실상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스트레스는 건강에 나쁘다’는 말은 그저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라는 식의 ‘동어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적당한 스트레스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또 그 나름의 의미로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논란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정의하고 측정할 것인가’ 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인데,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지만 스트레스라는 말에 대해서 어떤 통일된 과학적인 정의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건강에 나쁘다’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말에 대해 소위 전문가라는 의사 등의 사람들은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아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이다. 비웃음을 사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 ‘과학적’ 증거는 실로 빈약하다. 상식적이고 당연해 보이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직업과 관련된 스트레스를 어떻게 정의하고 측정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나름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데, 아마도 (필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그리고 비교적 다양한 질병들과의 연관성을 보여준 모델은 Karasek 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업무요구도-업무결정권 모델 (demand-control model)이 아닌가 생각한다.
느닷없이 전문적이어 보이는 난해한 용어를 들고 나온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이건 내가 읽을 게 아니구먼’ 하고 페이지를 그저 넘겨버릴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Karasek의 업무 스트레스 모델이라는 말은 산업의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한번 들어보았을 가능성조차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필자는 이 모델이 직업 관련 스트레스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며, 직업과 관련된 스트레스는 전문가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관심사이기에, 이에 대해 조금 설명해 보는 것이 꼭 ‘너무나 전문적인’ 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산업공학자인 Karasek은 업무 스트레스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고자 하였는데, 업무의 바쁜 정도 또는 과중한 정도가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증상들 – 결근율, 탈진 현상 등등 – 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착안하여 뭔가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그의 결론은 ‘업무에 대한 결정권’이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에 동조하는 여러 학자들은 미국과 스웨덴 등의 나라에서 이 모델에 근거하여 수 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의 직무 스트레스를 측정하고 그와 여러 질병과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상당한 양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는데, 결론은… 역시 직무 스트레스는 건강에 해롭더라는 것이었다!
이건 농담이었다. 이러고 끝나면 누구 놀리는 거냐면서 돌이 날아 올 것 같으니 좀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업무가 좀 바쁘고 부담이 되더라도 그 업무에 대한 많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든지, 업무가 단조롭지 않고 다양성이 있을 때에는 그 업무 부담의 해로운 효과가 상쇄가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가하고 느슨한 일일지라도 자신이 그 업무에 대해 결정권이 매우 낮을 경우에는 반대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전자의 경우를 ‘능동적’인 직업이라고 부르는데 전문직의 경우 대개 이에 속한다. 후자의 경우는 ‘수동적’인 직업인데, 야간 경비직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두 가지 경우는 직무 스트레스의 정도에 있어서 중간 정도가 된다.
가장 스트레스가 높은 직업은 그럼 무엇인가? 매우 바쁘고 쫓기듯이 일하지만 결정권은 거의 없는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고긴장 직업군’의 대표적인 예로 컨베이어 벨트 작업을 하는 단순 노동자라든지, 대도시의 버스 운전사 같은 직업을 지목하고 있다. 가장 스트레스가 낮은, 느긋하게 일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천국과도 같은’ 직업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직업은 흔치 않다. Karasek 등의 연구에서는 산림 경비원, 농부, 자연과학자 중의 일부를 그 예로 들고 있는데 우리 나라 현실과 일치할지는 좀 의문스럽다.
사람이 일을 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지, 혹은 괴로울 것인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물론 이 것 외에도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일 자체보다는 직장내의 인간 관계가 괴롭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내일 짤릴 지 모레 짤릴 지 알 수 없는 직업의 불안정성이 문제일 수도 있다. 산업의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루어 왔던 요인들, 즉 작업장 내 유해물질이나 인체공학적으로 부적절한 작업 환경 등도 물론 중요할 것이다. 직무 부담과 결정권 두 가지가 스트레스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허혈성 심장질환을 비롯하여 고혈압, 우울증, 결근율, 근골격계 증상 등 다양한 질병과 연관성이 드러나고 있는 이 모델에 주목해야만 할 이유는 바로 이 모델은 직무 수행에 있어서의 자율적인 결정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작업의 순서나 내용에 있어서 자율적인 결정권을 가지며 교육을 통하여 숙련도를 증가시킴으로써 작업 내용을 다양하게 하는 등의 환경 변화는 직업과 관련된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는 더욱 중요하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꼭 일하는 사람의 자세나 태도가 잘 못 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개인의 심리와 관련된 면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스트레스가 높은 직업과 낮은 직업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직업의 속성인 것만은 아니며 작업 환경의 개선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하루 8시간씩만 일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에서 깨어 있는 시간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직장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틀림없이 우리의 건강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자신 한 몸은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일벌레형 직장인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여겨지는 시대는 지났다. 그저 주어진 대로 두말없이, 그리고 가정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사람은 결국 그 높은 스트레스 때문에 뭐가 탈이 나도 탈이 날 것이고, 결국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생산성이 저하될 수 있다. 여유가 있지만 그 여유를 나태함으로 채우지 않으면서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일하는 직장인이 가장 오래 건강하게 남아 가장 생산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직장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분초를 관리하려는 ‘신(新) 테일러주의’ 적인 움직임, 즉 이메일과 방문하는 웹사이트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외근자들의 행선지를 추적하는 등의 새로운 행태는 분명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숨쉴 틈도 없이 꼼짝 못하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직장 생활이 경영의 측면에서, 생산성에서 어떠한지는 언급하기는 필자는 분명 문외한이지만 최소한도 건강에 해로울 것이라는 점만은 얘기하고 싶다. 게다가, 잠깐의 멍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과 ‘농땡이’를 약간 보장해 주는 것이 오히려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올 지 누가 아는가?
2002/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