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난폭자들

필자가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필자가 매일 다니는 길 중 고속도로에서 일반도로로 빠져나가는 진입로가 있었는데 차선이 둘이었다. 헌데, 어느 날 한쪽 차선에는 차가 죽 밀려 있는데, 다른 한쪽은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경우 대개 무슨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만, 마침 시간이 조금 급하였던 필자는 줄을 빠져나와 앞으로 내달리는 차를 따라 별 생각 없이 빈 차선으로 빠져나왔다. 역시나 알고 보니 공사가 벌어지고 있어 막힌 차선이었고, 이제 앞쪽에서 다시 원래 차선으로 끼여들어야 할 판이었다.

헌데, 필자의 앞에서 새치기(?)를 시도하던 이 차가 갑자기 끽-하고 서더니만 한 백인 중년 남자가 내려서 내 차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너 이러면 안 된다, 당장 차 빼라, 하면서 얼굴 시뻘개져 가면서 열을 올리는 것이었다. 필자가 잘한 일은 없지만, 자기도 나하고 똑같이 한 주제에 나에게 욕을 해대는 것도 황당했고, 혹시 무슨 인종주의자 같은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차창을 올리고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한참을 열을 올리며 욕을 해대던 그는 제풀에 지쳐 가버리고 말았지만, 얼결에 당한 필자는 정말 분하고 억울했다.

생초보 시절의 일도 기억이 난다. 차선을 바꾸려 했는데, 초보운전자라 별로 속력을 내지 못해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던 차를 급히 브레이크를 밟게 했던 모양이다. 헌데, 이 승합차가 갑자기 급가속을 해서 필자를 추월하더니 필자의 앞으로 다시 휙 끼여들며 급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아닌가! 그 운전자의 얼굴을 볼 겨를은 없었지만, 사시미 칼로 위협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그런 적의를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 날 이후 뒤창에 붙이고 다니던 ‘초보 운전’ 딱지를 떼어버렸다. 필자를 보호해준다기 보다는 ‘날 잡아잡수’하는 표적을 붙이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운전을 한 지 한 8년쯤 된다. 특별히 운전을 잘한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비교적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는 편이다. 2년 넘어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서울에 돌아온 요즈음, 미국의 길과는 달리 훨씬 역동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서울의 길에 완벽히 적응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 운전을 해보았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서울의 운전자들이 훨씬 조급하고 공격적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국민성 운운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한국 사람이 ‘빨리빨리’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꼭 미국인보다 성질이 더 급한지는 의문스럽다. 필자가 주로 운전을 한 볼티모어라는 도시는 서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도시이고, 혼잡한 정도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길은 넓고 주차 공간도 대체로 넉넉한 이곳에서 다른 차와 부대낄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정신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친 듯이 이리저리 차들 사이를 헤집으며 운전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게 눈에 뜨이고, 위에서 얘기한 정말 ‘미친 X’ 수준의 인간들도 있는 것을 보면 미국인이 한국인들보다 특별히 점잖은 운전자라 볼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람들의 운전 습관의 차이는 상당부분 운전 환경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자동차라는 것이 현대 문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동차는 인류의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는 길에서 운전하다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고 심지어 총질까지 해대는 소위 ‘road rage’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야 다행히도 총질까지야 벌어지지는 않지만 운전하다가 받는 스트레스라는 것은 정말로 만만치가 않다. 교통사고로 다치고 죽을 위험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운전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 건강에 해로운 일인 것 같다.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심장병에 걸리기 쉬운가에 대한 연구 중 유명한 것으로는 소위 ‘A형 성격’에 대한 연구가 있다. A형 성격이란 경쟁적이고 조급한 성격이다. 매우 성취 지향적이어서 어떤 일을 이루어 내려는 욕구가 무척 강하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빠르고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하는 편이어서 책임감이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또 참을성이 없어서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많고 남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이러한 ‘A형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심장병에 걸리기 쉽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와 주목을 끌었었으나 후속 연구들에서는 일치된 결과를 보이지 않아 관심을 더 끌지 못했었다.

보다 최근의 연구들에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결과들을 볼 수 있는데, 다소 막연하고 포괄적인 A형 성격이라는 개념 대신 성격상의 특정한 측면이 심장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대적인 성격’ (hostility)을 가진 사람들이 심장병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동차와 심장병이 무슨 상관이기에 이런 얘기를 하는가? 서울의 거리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A형 성격 내지는 적대적 성격의 전형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슬금슬금 기어나가는 차들, 느리게 가는 앞차를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운전자들의 조급성은 대단하다. 경쟁심 또한 엄청난 것이어서, 거의 프로 레이서를 방불케 하는데, 끼여드는 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서 옆 차선의 차가 깜박이만 켰다하면 갑자기 가속 페달을 밟고 돌진한다. 그런 덕분에 많은 운전자들은 깜박이를 미리 켜지 않고 기습적으로 휙 끼여들지 않는다면 차선을 제때 바꿀 수 없다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끼여들겠다고 미리 신호를 보내는 것은 ‘적’들에게 작전 계획을 노출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일까.

받을 테면 받아보라고 막무가내로 머리를 들이미는 쪽과 끼워주지 않으려고 돌진하는 쪽이 아슬아슬하게 격돌하는 장면을 보면 – 실은 필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흔히 그런 장면을 연출하게 되지만 – 영화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던 깡패들의 담력 대결, 즉 정면으로 서로 차를 달리다가 겁을 내서 먼저 방향을 튼 쪽이 진다던가,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에서 손을 마주잡고 있다가 먼저 놓고 도망가는 쪽이 지는 것 같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같은 대결 장면이 떠오른다.

모든 운전자들이 공감할 새삼스런 얘기이겠지만, 운전하다 보면 화나고 혈압 오를 일을 한 두 번 겪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평소 점잖던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갑자기 쉴 틈 없이 쌍욕을 쏟아내는 사람으로 돌변하는 황당한 경우도 적잖이 보게 된다. 필자도 무슨 도를 닦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필자가 아는 어떤 사람은 필자에게 ‘저러는 사람들 언젠가는 다 환자가 되서 너를 먹여 살려줄 거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의사된 도리로 그런 생각을 해도 윤리적으로 괜찮은 건지 확신이 안 서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지 어쩔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필자가 심장병 환자들로 인해 먹고 사는 것이 사실이라고는 해도, 남들이 환자가 되는 것을 기뻐할 수야 있겠는가. 만일 ‘내 앞에 끼워주기란 없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거리를 누비는 운전자라면 그 적대감이란 것이 심장에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필자로서는 무척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새 사람들이 의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데, ‘내가 의사들 주머니 불려 줄 수야 있나’라고 생각하시던 지 말이다. (아, 이것도 별로 권할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그렇다면 운전을 안하고 살면 어떨까?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퇴근은 물론이고, 장을 보려 해도, 하다 못해 비디오 하나를 빌리러 가려 해도 차를 운전해서 가야만 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운전을 하지 않고 살기는 매우 힘든 일이겠지만, 대중교통이 훌륭한 (훌륭하긴 뭐가 훌륭하냐며 분개할 분들도 있겠지만 뉴욕 같은 극소수 대도시를 제외한, 대중교통이란 것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나머지 미국 전체와 비교한다면 정말이지 훌륭하다.) 서울과 같은 곳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자전거를 타면 어떨까? 차가 다닐 길을 닦을 것이 아니다. 지독스런 교통지옥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차선을 줄이고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본다. 자동차를 위한 길을 닦으면 닦을 수록 교통 정체는 더욱 심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라고 한다. 그 엄청난 수의 자동차들이 써대는 휘발유와 그들이 뿜어대는 공해는 또 어찌할 것인가.

움직이는 흉기, 자동차를 타고 길거리를 누비는 거리의 난폭자들 사이를 헤집어야 하는 지금의 현실에서야 엔간해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닐 생각을 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좀더 여건이 갖추어져 자신의 두 다리로 페달을 밟으며 상쾌하게 자전거로 출근할 수 있는 서울의 거리를 꿈꾸어본다. 우리의 심장을, 마음을 병들게 할 적대감으로 가득 찬 전쟁터 같은 출퇴근길이 아닌, 몸과 마음과 환경을 모두 튼튼하게 해주는 거리, 정말 멋지지 않는가!

200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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