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takes a village! (한 마을 전체가 필요해!)

필자는 B형 간염 환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얘기한 지난 컬럼에서 간질과 당뇨병을 비교한 적이 있다. 간질은 대부분의 경우 (예외는 있지만) 먹는 약으로 잘 조절이 되어 다시는 경련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데 반해, 당뇨병은 많은 경우에서 먹는 약 뿐 아니라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만 한다. 매일같이, 때로는 아침저녁으로 주사기로 살을 찔러대고 게다가 혈당 측정을 위해 또 별도로 손끝을 찔러 피를 뽑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간질 환자는 먹고 싶은 것 가릴 이유가 별로 없지만, 당뇨병 환자는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가 없다. 이는 정말 대단한 불편이다. 간질로는 영구적인 장애를 남기거나 사망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당뇨병으로는 눈이 멀기도 하고, 콩팥이 망가져 투석을 해야 할 수도 있고, 발이 썩어들어갈 수도 있고 기타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비교해본다면 간질은 당뇨병에 비해서는 정말 병도 아니다.

그렇다면, 간질과 당뇨병 중에서 한가지는 꼭 걸릴 수밖에 없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는가? (물론 선택이 가능할 리야 없겠지만, 그저 그렇다 치고 말이다.) 간질을 선택하시겠는가? 필자의 지난 컬럼을 어깨너머로 보았던 필자의 아내가 한 마디 했었다. ‘그래도 난 당뇨병이 낫겠다’ 하고 말이다. (거기에 힌트를 얻어 끝말잇기 하듯이 이 컬럼을 쓰고 있으니…) 여러 가지 ‘의학적인’ 고려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선뜻 ‘간질이 차라리 낫지!’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왜 그런가?

‘지랄병’이라고까지 불리어왔던 간질이라는 병에는 그 병으로 인한 신체적인 증상이나 장애 뿐 아니라 그 병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받게될 사회적인 오해와 편견에 의한 냉대와 불이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병의 ‘의학외’적인 측면은 ‘의학적’인 측면과 현실적으로 분리가 불가능한데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의학외적인 요소가 질병으로 인해 겪는 환자의 ‘고통’에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제가 당뇨병이 있어서…’라는 말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는 않을지 몰라도, ‘제가 간질이 있거든요’라고 남들에게 말하는 것은 거의 동성애자가 ‘커밍 아웃’을 결심하는 정도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다. 아니, 특별히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거의 ‘무모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고통’이라는 말과 ‘통증’이라는 말이 과연 다른 말인가? 이것이 동의어라고 생각하신다면 현대의학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된다. 필자는 쓰잘 데 없이 꼬부랑말을 쓰며 현학하고 싶지는 않지만 두 낱말의 차이점을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 불가피하게 영어로 표기해보겠다. 고통은 ‘suffering’이라고 할 수 있고, 통증은 ’pain’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두 낱말의 차이점을 논한 것은 영어권 저자들이 먼저이고 ‘고통’과 ‘통증‘이란 낱말은 이에 대한 한글 번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헌데, 이 사람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 관절의 통증은 아닐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병으로 인해 통증 뿐 아니라 손가락 관절 운동의 장애를 겪고 있는데, 그가 병에 걸리기 전에 그를 가장 즐겁게 해주던 취미가 피아노 연주였다면 어떨 것인가?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피아노를 치지 못한다는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통증을 포함한 ‘신체적인 증상 내지는 장애’의 정도와 환자가 겪는 고통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 HIV 보균자의 경우, 이런 대조는 극명하다. 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의 원인균이 되는 HIV (Human Immunodeficiency Virus)는 보균 상태에서 발병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 (때로 10년 이상)이 걸리고 그때까지 보균자는 실제로는 아무런 증상도 불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IV 보균자임이 밝혀지는 순간으로부터 그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절망감에서부터, 매우 심한 사회적인 질시와 따돌림, 당국의 감시 등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수혈로 AIDS에 걸린 노인이 ‘아내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부부 동반자살을 한 일까지 있다니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수치스러운 병’의 낙인이 주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겠다. 그 고통의 원인은 신체적인 증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장애인들에게 정말로 큰 ‘고통’을 주는 것은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겪는 ‘불편’보다 오히려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이라는 것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출산은 또 어떤가. 진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통증 가운데 가장 심한 것 중의 하나라고들 하지만 그것을 아무도 비참한 ‘고통’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산모 본인과 가족과 나아가 사회 전체가 축복해 마지않는 기쁜 과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심한 통증’일지언정 ‘끔찍스런 고통’은 아닌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애를 둘씩 셋씩 낳겠는가. (많은 산모들이 통증 그 자체보다는 의료진으로부터 받은 푸대접과 그다지 온화하지 못한 병원 환경을 끔찍스럽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현대의학은 기본적으로 질병을 신체에 나타난 어떤 기능의 이상으로 파악하며 치료의 목표를 그 기능의 이상을 초래한 원인을 제거하고 그로 인한 신체적인 증상을 경감시키는 데 두고 있기 때문에 이 범주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무기력함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학이 간질 환자들이, HIV 보균자들이, B형 간염 보균자들이 겪는 이 ‘고통’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폐렴에 걸린 환자가 있어 항생제를 썼다하자. 헌데 항생제를 쓰고 나서 열이 떨어지고 분명 호전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항생제를 쓰고 있는데도 다시 열이 오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환자는 ‘멀쩡해 보인다’. 경험 없는 의사라면 약이 듣지 않아 병이 악화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의사들의 오랜 격언에 ‘숫자를 보지 말고 환자를 봐라’라는 말이 있다. 치료의 목표는 환자가 좋아지게 하는 것이지 검사 결과 수치가 좋아지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환자가 ‘멀쩡해 보인다’ 는데 해결의 열쇠가 있고, 대개는 병이 악화된 것이 아니라 ‘항생제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열’일 가능성이 많다.

현대의학의 엄청난 기술적 발전과 그 복잡성 때문에 많은 경우에 필자를 포함한 의사들은 그 기술이 주는 정보의 홍수에 매몰되기 쉽다.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보고, ‘장기’를 보고 ‘검사 수치’를 본다. 사람은 똑같은 사람인데, 심장과 간과 콩팥과 관절 등등을 각기 다른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니 사람을 온전한 한 몸뚱아리로 보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은 판에, 나아가 환자가 겪는 ‘사회적인 고통’까지 본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도 않고, 사실 두렵기까지 하다.

많은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들이 스스로를 현대의학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많은 경우에 인간을 한 몸뚱아리로 보는 ‘전일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 경지를 넘어서서 사회적 존재로서 질병을 가진 인간이 겪는 경험까지 아우를 수 있을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질병의 사회적 의미는 그 질병의 신체적인 의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지금껏 대개의 의사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관심을 두지 못했었다는 부분은 반성해야만 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는 의사 개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 퍼스트 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은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애 하나 키우는 데는 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라는 제목의 저서를 내었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 아프리카 속담을 필자도 빌려서 얘기해보고 싶다. ’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한 마을 (사회) 전체가 필요하다‘ 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병이란 의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의사는 ‘통증’(pain)을 덜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고통’(suffering)을 덜어주기는 쉽지 않으며, ‘치료’(treat)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치유’(heal)하기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의학지식이 있건 없건 간에 다른 사람의 질병에 대해서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진정한 ‘치유자’이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참으로 ‘건강한 사회’ 만이 병든 자들에게 진짜 ‘치유’를 줄 수 있는 주체인 것이다.

200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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