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 연재 컬럼을 통하여 이미 ‘먹거리’ 문제에 대해 한차례 언급한 적이 있고, 채식주의에 대해서도 잠시 얘기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 나라에 거의 열풍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채식 붐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는 마당에, ‘한번 울궈먹은’ 주제일지라도 거듭 얘기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하여 주제를 그리 정하였다. 어찌되었거나 먹거리 문제는 우리의 건강에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이 최근의 채식 열풍은 한 방송사의 화제의 다큐멘터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꽤 여러 해 전의 ‘이상구 박사’의 ‘엔돌핀 열풍’을 연상케 한다. 당시에도 채식을 적극 권장하는 내용의 방송이 나가자마자 당장 장안의 두부, 야채 등이 품귀현상을 보이기까지 했던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지금도 낙농업계에서 ‘망했다’고 탄식을 하고, 채식 전문점이 성시를 이루는 정도라 하니 매스컴의 엄청난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케한다.
필자는 솔직히 말해 그 문제의 다큐멘터리 중 한편 밖에 보지 못하였지만, 간단히 요약해서, 그리고 조금 과장하면 ‘채식을 해야 산다, 육식은 죽음이다!’라는 정도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헌데, 뭔가 좀 더 할 말이 있을 것만 같다는,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 좀 먹어도 괜찮다, 콜레스테롤도 몸에 필요한 거다’ 뭐 그렇게 뻔한 딴지를 걸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필자 자신도 (분명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육식 위주의 식사는 분명 건강에 좋지 않다고 믿고 있다. 곡물을 재배하여 인간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먹여서 그 고기를 다시 먹게 되는 지극히 낭비적인 과정을 통해서 인류는 소중한 자연의 자원을 낭비, 남용하여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환경적 관점으로 보아도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할 필요성은 상당히 설득력있지만, 그 전에 이미 건강 문제 한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해야할 이유가 된다.
육류로부터의 과다한 콜레스테롤과 포화지방산의 섭취는 동맥경화와 명백한 상관 관계가 있으며, 적절한 식이를 통해 동맥경화를 예방할 수 있음도 분명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들만큼은 필자가 보기에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끝난 게임’이다. 동맥 경화가 무엇인가, 뇌졸중, 협심증, 심근경색, 등 혈관이 좁아지고 막히는 데서 비롯되는 온갖 겁나는 병들의 원인 아닌가. 기타 여러 가지 정황 증거들로 보아도 인간에게 과도한 육식은 적절치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맥경화는 모든 동물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개나 쥐와 같은 동물은 동맥경화를 좀처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질은 물에 녹지 않는다. (‘물과 기름’!)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는 혈액 내에서 이 지방질을 운반한다는 것은 특별한 방법을 필요로 한다. 결국 포유류는 (다른 종류에 대해서는 필자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냥 넘어가자.) 지단백(脂蛋白)이라는 특별한 종류의 단백질로 지방질을 둘러싸서 혈액 내에서 운반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쪽으로 진화를 해왔는데, 동물의 종류에 따라서 이 지단백의 조성에 차이가 있다. 헌데, 개나 쥐의 경우 소위 ‘좋은 콜레스테롤’이라고 불리우는 ‘고비중지단백 콜레스테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엔간히 기름진 것을 먹어도 혈관에 기름이 낄 염려가 없다.
개의 조상은 다름 아닌 늑대 아닌가! 늑대가 어떤 식사를 좋아하는지 직접 물어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겠는데, 필시 육식을 즐기리라 짐작된다. 개들은 그런 늑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럼 쥐는? 글쎄, 잘은 모르겠다. 워낙 목숨이 모진 놈이라 그런 게 아닐까? 필자는 수의사가 아니고 사람 의사다. 너무 따지고 묻지는 마시길. 요새 애완견들은 건강에 신경 써주는 주인 밑에 있을 터인데, 건강에 신경 쓴다고 채식을 권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엔간해서는 동맥경화에 걸리는 일은 없다니 말이다.
헌데,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에서는 ‘저비중지단백 콜레스테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 ‘나쁜 콜레스테롤’은 혈중 농도가 높아지게 되면 결국 혈관벽에 기름이 끼게 만들어 동맥경화를 초래하게 된다. 즉, 개나 쥐와 같이 좀처럼 동맥경화가 생기지 않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 내지는 원숭이들은 동맥경화에 취약하게끔 유전적으로 설계가 되어있고, 따라서 육식을 많이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의학적인 연구에서는 인간의 병을 연구하기 위하여 동물에서 인간의 병과 유사한 병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소위 ‘동물 모델’ 질병을 만드는 것인데,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모델에서 흔히 사용하는 동물은 무엇일까? 바로 토끼다. (원숭이면 제일 좋겠지만 너무 비쌀테니!) 불쌍한 토끼는 잘 아시다시피 초식동물이고 기름기 많은 것을 먹는데 전혀 대비가 안 되어 있다. 토끼에게 콜레스테롤이 듬뿍 든 먹이를 먹이면 별로 어렵지 않게 혈관벽을 엉망으로, 약간 험하게 표현하면 ‘걸레로’ 만들 수 있다. 필자는 동물 실험을 하지 않으니 동물 애호가 여러분들은 가련한 토끼를 학대한다고 필자를 비난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하여간에 결론은 인간은 육식을 많이 하게끔 만들어져 있지는 않은 동물이라는 것이고, 그 순리를 어겨서 좋을 일이 없을 거라는 얘기다. 육류 소비가 점차 증가하고, 허혈성 심장 질환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한국에서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럼, 뭐가 더 할 말이 있다는 것인가?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채식을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얼마 전, 필자의 집에는 아내의 외국인 친구들 몇 사람이 놀러왔는데, 이들 중에는 이슬람 교도, 채식주의자 등이 섞여 있었다. 아내는 이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다가 거의 장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먹을 게 없네, 먹을 게 없어!”
지글거리는 갈비구이나 불고기를 준비할 수 없어서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미역국에는 멸치 국물, 된장찌게에 들은 고기 몇 점, 김치에 들은 새우젖… 나물 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완전 채식주의 식단을 짜는 것은 거의 새로운 경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평생을 먹을 완전한 균형을 이룬 식단을 짠다는 것은 상당한 공부와 철저한 계획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외식은 채식 전문점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채식주의자들이 육식 많이 하는 사람들보다 분명 건강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이 건강한 것이 ‘단지 고기를 안 먹기 때문’이라고만 한다면 다소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건강에 대해서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하고 그것에 많은 시간과 돈과 힘을 투자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냥 하루하루 살기 바빠서 그냥 되는대로 아무 거나,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먹는 사람들하고 같을 수가 있는가. 고기 한점을 먹고 안 먹고가 죽고 사는 문제라기보다는 그렇게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정성과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육식은 나쁘다, 채식이 좋다, 목 아프게 외쳐봐야, 결국은 먹고 살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결국 한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어떤 식사를 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문제는 실상 단순히 육식이냐 채식이냐를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채식을 한다고 하면 유전자 조작 콩은 괜찮은 것인가, 채소에 뿌리는 농약은 괜찮은 것인가, 등등 의문은 끝이 없다. 도대체 뭘 먹어야 한단 말인가? 값싼 유전자 조작 수입 콩 말고 우리 콩을 먹고, 농약 안 뿌린 유기농 채소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조금 더 형편이 나은 누구는 좀 더 돈을 주고라도 더 좋은 것, 아니 정확하게는 ‘좋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을 사먹을 수 있겠지만, 생계가 빠듯한 다른 누구는 그저 가장 값싼 것을 찾아야만 한다. 먹고 나중에 어찌될 지는 나중 일이니 말이다. 남들이야 뭘 먹건 나만은, 내 식구만은 좋은 것 먹고 건강을 지킬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절박하고 삭막한 세상이 아니라, 시장에 가서 무엇을 집어들어도 괜찮은, 좀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간에 누구나가 건강에 좋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필자가 너무 이상주의자일까?
2002.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