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루’ 때문에 다들 난리들이다. 필자는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지라 아침 저녁으로 운전을 하는 시간이 도합 거의 두 시간에 달한다. 그 시간 대부분을 라디오를 켜놓고 있는데, 하루 종일 뉴스와 시사, 대담 프로그램 등만을 내보내는 공영 방송인 NPR (National Public Radio)에서 나오는 내용의 거진 3분의 2 쯤은 9.11 테러 사태와 그 이후의 탄저병 소동과 관련된 것들이다. 거의 그것 말고는 하는 얘기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뿐인가, 사람들이 덜 돌아다니는 탓에 휘발유 수요가 줄어 값이 떨어지는 지경이다.
미국 사람들이 워낙 호들갑스럽기도 하거니와, 필자는 한국이란 험악한(?) 나라에 살면서 온갖 험한 일들을 겪은 탓에 (백화점도 무너지고, 한강 다리도 주저앉고, 단체 여행간 어린이들이 몰살당하고…) 둔감해진 것인지,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난리를 쳐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 산전수전 다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도 우편물 봉지에서 떨어진 흰가루 때문에, 길에 엎질러진 밀가루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소동들을 벌였다니, 이건 순전히 매스컴의 위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분명 비이성적인 행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탄저병이 그렇게 무섭다면, 교통사고가 무서워서 밖에는 어떻게 나다닐 것인가?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이 분명 수백 배 내지는 수천 배 이상 높다. 그런데도 이곳 미국에서 사람들은 우편물을 전자 레인지에 넣고, (효과가 있을지는 좀 의심스럽다)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우편물을 개봉하며, 공기가 새지나 않을지 의심스럽기조차 한 방독면까지 사들인다. 밀폐된 용기에 장갑이 달린, 인큐베이터처럼 생긴 편지 개봉 장치를 개발해 파는 업체가 등장했다. 모든 우편물에 방사선 조사를 해서 멸균을 시키는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고도 한다. 얼마나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인가! 우체국에서 일하는 것은 거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정도로 겁나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감염에 의한 질병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고, 미국 내에서 그 감염과 관련된 문제들을 총괄하는 CDC (Center for Disease Control, http://www.cdc.gov)은 일약 핵심 중추로 떠오르고 있다. CDC가 생화학 테러에 대한 대응 기구로 변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헌데, 이 탄저병 소동 이전에는 각종 감염병의 문제들이 큰 문제가 아니었는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탄저병과는 그 실질적인 규모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문제인 AIDS가 있질 않은가? 병원 감염은? 항생제 내성균은 또 어떤가? 이런 문제들 각각이 실제로는 탄저균 테러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었다.
‘마법의 항생제’ 페니실린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현대의학의 경이로운 승리에 우쭐해 했지만,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너무 일렀다. 곧바로 내성균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로 인간과 미생물의 소리 없는 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다. 현재 페니실린은 내성으로 인해 거의 쓸 곳이 없는 약이 되어 버렸다. 비관론자들은 인간은 미생물과의 경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까지 얘기한다. 미생물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키워가는 엄청난 속도에 비해, 인간이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는 속도는 턱없이 느리기 때문이다. 신약을 개발해서 실제로 임상에서 사용하기까지는 거의 십 여 년, 때로는 더 긴 세월이 걸린다.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다.
결국 재앙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광우병도 그러하다. 양의 창자 등을 갈아서 소의 사료에 넣어서 양에게만 있던 병이 소에게로 와서 광우병이 되었고, 그 부메랑이 인간에게 되돌아 온 것이다. 먹여서는 안될 것을 억지로 먹인 덕에 그 댓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병에 걸렸을 뿐 아니라 한 나라의 축산업이 괴멸되었다.
지금까지 개발된 어떤 항생제에도 듣지 않는 ‘수퍼 박테리아’는 의사들의 골치거리이다. 항생제의 압력이 거센, 병원이라는 환경 속에서 세균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그렇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번엔 탄저균 테러다. 물론 실제로 탄저균을 이용하여 대량 살상을 한다는 것은 탄저균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어서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고, 쉽게 일어날 것으로 보이지도 않지만,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이 모두가 실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재앙이다.
인류는 결국 미생물에 의해 멸망할 것인가? 이런 암울한 시나리오는 다른 소재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다시 쓰여질 수 있다. 곤충은 어떤가? 각종 해충들과 인간의 살충제와의 경쟁에서 누가 유리한가? 박테리아만큼은 아니겠지만, 곤충도 역시 재빠르게 내성을 획득한다. 게다가 인간은 DDT 같은 잔류성 강한 살충제로 환경 오염이 문제가 되면서 이미 부메랑에 얻어맞은 바 있다. 자연이 인간에게 가하는 반격은 도처에서 진행 중이다. 우린 이제 어쩌면 좋은가?
그러나, 필자는 미생물들이 아무리 거세어져서 항생제라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게 된다고 해도 인류가 멸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가 그들을 끝없이 괴롭히고 수없이 많은 목숨을 앗아간 역병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불행히도 사실은 인류 전체로 보면 일부에만 해당되는 얘기이다. 아직 지구상에는 그 전염병들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숱하게 있다.) 어디 의학의 발전과 항생제의 개발 덕분이었던가? 의사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겠어, 라고 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의학의 발전이 전염병 퇴치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질병의 기원’이라는 명저를 저술한 토마스 매퀀이라는 학자가 제시한 자료를 보자. 19세기에서 20 세기초에 걸쳐 결핵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영국과 웨일즈에서 1838년 결핵에 의한 사망률은 10만 명 당 400명에 달하였다. (이 숫자가 금방 감이 안 오신다면, 오늘날의 가장 비중이 큰 사망원인 너덧 가지, 즉, 모든 종류의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각종 사고 등등을 다 합친 것 이상의 숫자라고 하면 얼마나 심각했는지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1940년대 초에 이르면 이는 8분의 1 수준인 10만 명 당 50명 수준으로 떨어진다. 의학이 발전했으니까, 결핵약이 나왔으니까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결핵치료는 스트렙토마이신이 나온 1947년이 되어서야 겨우 시작되었다. 결핵 치료제가 그 이후 사망률을 더욱 감소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무시무시했던 결핵의 위세를 결정적으로 꺾은 것은 결핵치료제 이전의 다른 무엇인가의 힘이다.
그 ‘무엇’은 과연 뭔가? 영양 상태의 개선, 주거 환경의 호전 (공기를 통해서 전염되는 결핵은 좁고 환기가 나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쉽게 전파된다.) 등이 항결핵제 개발 이전에 이미 결핵의 기세를 상당 부분 잠재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항결핵제는 소용없는 물건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일단 발병한 결핵의 치료에는 이 약들 말고 믿을 것이라곤 정말로 없다.)
다른 많은 전염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 유럽 인구의 4분의 1 을 몰살시켰다는 가공할 페스트가 잠잠해진 것이 항생제가 있어서였던가? 아니다. 대부분의 전염병들은 의학의 발전으로 본격적인 치료법이 개발되기 이전에 생활 조건, 위생, 환경, 영양 상태의 개선으로 그 위세가 이미 한풀 꺾였었다.
현대의학이 소용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도 천연두의 퇴치만큼은 현대 의학이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여전히 항생제는 분명 위급할 때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학의 최고의 무기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매우 아껴서 써야 할 귀중한 무기이다.)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인류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한은 미생물에 의해서 인류가 망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하지만 분명 단서를 달았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한’ 말이다.
탄저균으로 몇 사람을 죽이고 몇십 명을 병에 걸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집단 살상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탄저병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연 상태에서는 어쩌다가 한 명씩 환자가 발생하는 것이고 대유행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많은 양의 탄저균 포자를 흡입해야만 하고, 밀폐된 공간에 뿌려서 몇 명을 감염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차별하게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을 살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도 오랜 동안 공중에 떠 있을 수 있게, 쉽게 폐로 들어가도록 적절한 크기로 정교하게 가공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언론은 온통 테러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만 떠들고, 어떻게 하면 테러로부터 목숨을 지킬 것인지만을 얘기하지 왜 테러가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테러라는 것 자체가 사라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하고 있지 않다. 아무리 돈을 들여 방사선으로 우편물을 멸균한다 한들, 어떤 강력한 보안 조치를 취한들, 아프가니스탄, 아니 그뿐 아니라, 이락이고 어디고 맘에 안 드는 나라들을 폭격으로 죄다 쓸어버린들, 길게 드리운 테러에 대한 공포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피부를 소독약으로 씻어낸들, 장을 항생제로 세척을 한 들, 인간을 무균 상태로 만들 방법이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테러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 길을 모색하고, 평화 공존의 지혜를 생각해 내야하지 않을까.
공상과학 소설을 쓴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언젠가는 인간이 항생제로 미생물을 죽이기보다는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의 장 속에는 천문학적 숫자의 세균들이 인간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잘 살고 있지 않은가.
2001.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