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력산만 과잉행동 장애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라는 병이 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주의가 매우 산만하며 참을성이 전혀 없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움직이는 아동들 중 그 정도가 심각한 경우에 붙여질 수 있는 병명인데, 쉽게 짐작이 가시겠지만, 심한 학습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필자는 의과대학생 시절 소아과 교과서에서 이 병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이에 대한 치료 중의 하나로 ‘각성제’가 투여된다는 것을 보고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이 날뛰는 애한테 각성제를 주면 어쩌자는 건가? 진정제가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실제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입증된 치료법이다.)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 두 돌이 좀 지난 필자의 아들은 비교적 순한 편이지만, 때로 전혀 말 안 듣고 오히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하고, 거의 대책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날뛰고 떼쓰고 울고, 도대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고집불통 심술보 악동으로 변하는 수가 있다.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은 이럴 때 99%의 경우 그는 졸린 상태라는 것이었다. 이는 졸음으로 인해 ‘억제 기능이 억제’되어버린 상태로서 마치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각성 정도는 낮아진 상태인 것이다.
물론 수면 부족이 주의력산만 과잉행동 장애라는 병의 원인은 아니지만, 때로 수면 부족은 그와 매우 비슷한 증상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주의력산만 과잉행동 장애의 경우, 각성제를 주어 각성 정도를 높임으로서 증상이 호전, 즉 행동이 오히려 차분해지는 효과를 보는 것이다. 그저 졸린 경우라면 잠만 재우면 되겠지만 말이다.
잠이란 것이 우리 건강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연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면 부족이 당뇨병, 비만, 고혈압, 우울증 심지어 위궤양과도 관련이 있다는 연구들이 있다. 아니, 거창하게 의학 연구 사례들을 들먹일 것도 없이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도 있다시피 잠이 부족하면 당장 얼굴부터 추레해진다.
그냥 본인의 건강을 해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도 있다. 졸음 운전은 음주 운전이나 마찬가지로 – 아니, 이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한 편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훨씬 더 – 위험하다. 미국에서 행해진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치명적인 사고의 거의 절반이 졸음 운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음주 운전은 거리에서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음주운전 측정기로 단속한다지만 졸음 운전은 어쩔 것인가? 불행히도 피곤하고 졸린 채로 운전대를 잡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미국의 성인 천 여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설문 조사에서는 절반 이상이 졸릴 때 운전하는 일이 최근 있었으며 17%는 운전 도중 실제로 졸았다고 응답하였다. 자가용이 아니면 이동할 수단이 막막한 경우가 많아 직접 운전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미국의 이야기이니 대중 교통 사정이 그보다는 나은 우리 나라의 경우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안심할 것인가?
아, 천만의 말씀이다. 독자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택시를 타거나, 심지어는 버스(!)를 탔다가 졸려 보이는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고, 어떤 때는 정말로 눈은 감았다 떴다, 고개는 꾸벅꾸벅하는 운전사를 보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모골이 송연한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실제로 버스가 강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고에서 실은 운전사의 피로와 수면부족이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던 경우도 적지 않다.
수면 부족의 문제는 어른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미국 브라운 대학의 수면 연구소 소장인 Carskadon 박사는 ‘우리의 연구 결과는 사춘기의 생물학적 변화가 청소년들의 ’수면-각성 시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생리학적으로 밤 11시 이전에 잠들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라고 주장하였다.
늦게 잠드는 청소년, 그 결과는 무엇일까? 다음 날 학교에 늦지 않으려면 수면 부족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이 수업 시간의 졸음, 집중력과 학습의 장애, 성적 부진, 의욕 상실, 심지어 학교 생활에서의 낙오, 청소년 비행 등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것은 쉽게 그림이 그려진다.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학교 시작 시간을 8시 30분 이후로 늦추는 법안이 상정되기도 했다. 청소년들에게 9시간 이상의 수면 시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이것 정말로 괜찮은지 다시 한번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야단 맞는 아이들, 한둘이 아니다. 게으르고 불성실한 놈으로 찍힌다. ’잘 것 다 자고, 놀 것 다 놀고, 언제 공부하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아주 익숙한 잔소리이다. 노는 건 잘 모르겠지만, 잘 만큼 잠을 자지 않으면 그 결과는 ’졸면서 공부하기‘ 뿐이다. 졸면서 하는 공부도 공부가 될까?
수업시간에 조는 것이 과연 순전히 불성실함 때문일까? 아니면 의지력 부족? 부분적으로는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잠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 정말로 졸릴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무엇이던가, 바로 눈꺼풀이 아닌가! 강한 의지로 수면 부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제발 한시 바삐 그 착각에서 벗어나시라고 당부하고 싶다.
헌데, 아마도 이 사회는 그 소위 ‘정신력’, 그리고 때로는 약간의 약물의 도움(?)으로 졸음과 피로를 이겨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대히트를 친 모 드링크제 광고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힘들지~?’ 하면서 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학생에게 드링크제를 내미는 것이다. 다정한 격려는 좋지만, 졸리면 자야 하고 피로하면 쉬어야 한다. 이 당연한 삶의 지혜를 무시한 대가를 우리가 지금 여러 가지로 치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필자는 극심한 만성적 수면부족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몸소 체험한 사람이다. 병원의 인턴, 레지던트 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밤에 당직을 섰다면 다음 날 낮에 쉬거나 최소한 일정을 조정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겠지만 이들 전공의들은 그렇지 못하다. 다음날도 똑같이 일을 한다. 그러면서 이틀 사흘에 한번씩 밤 당직을 선다. 밤을 꼬박 새우는 한이 있어도 다음 날 똑같이 일을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고개가 떨어지고 무릎이 푹푹 꺾이고,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컴컴해지기만 하면 당장에 코를 골고, 심지어는 수술 중에도 존다. 아무 의욕도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고 머리 속에는 그저 잠 한번 실컷 잤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우리 나라만 그런 줄 알았더니 외국도 그런 모양이다. 영국에서 전공의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들고 있었던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저는 60시간 째 깨어 있고, 당신을 수술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고귀한 사명감’ 운운할 상황이 아니다.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그 시절에 환자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하고 화내고 무례하게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정말 그래서는 안 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왜 그렇게 짜증을 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죄송스럽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친절함과 예의를 끝까지 지켜내는 참으로 존경스러운 동료도 있으니 필자가 뭐라 한들 그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훌륭한 인품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평범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인내와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현대는 참으로 불면의 시대이다. 특히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밤이 깊어도 좀처럼 잠들 줄을 모른다. 길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대고, 교통 체증은 한밤중이라고 예외가 없다. 편의점과 할인 매장은 24시간 운영되고,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뭔가 더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희생되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인 것이다. 운동을 하겠다고, 영어실력을 키우겠다고 한다면 어디서 더 시간을 만들 것인가.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남보다 부지런해야 성공한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를 25시간으로 만들 수는 없다.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별 것 아닌 일에 서로 치고 받고 싸운다. 아니, 훨씬 더 끔찍한 짓들을 어이없이 저질러 버린다. 앞사람이 공중 전화를 오래 쓴다고 흉기를 휘두르고, 부부 싸움하다가 가스를 틀고 불을 질러 버린다.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을 넣고 눌러 버리는가 하면, 자동차는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박는다. 멍하니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한순간도 가만있지 못하면서 계속 무슨 일인가를 정신없이 하지만, 한가지 일에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왜 이런 일들이 마치 전염병과도 같이 만연한 것인가? 필자는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배후’에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혹시는, 그것이 바로 수면 부족은 아닐까?
필자는 오래 전에 읽은 미카엘 엔데라는 작가의 ‘모모’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도둑’들이 사람들에게 찾아와 ‘시간을 아낄’ 것을 권유하고 그 제의에 넘어간 사람들은 미친 듯이 더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시간은 점점 더 모자라게 되고 생활은 황폐해지면서 삶의 즐거움을 하나씩 잊어가게 된다.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까맣게 모르면서 말이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잠자는 시간은 절대로 버리는 시간이 아니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히 지켜야만 하는 삶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인 것이다. 잠을 잃어버린다면 남는 것은 ‘졸면서’ 살아가는 고달프고 정신없고 황폐한 인생뿐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삶의 일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잠들 줄 모르는 불면의 사회가 달콤한 잠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자고 싶어도 마음대로 잘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니 말이다.
2001.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