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진료실에서 벌어지는 낮익은 한 장면.
“뒷목이 뻣뻣해지고요, 눈도 피곤하고, 속이 갑갑한 게 소화도 안되고요, 허리도 아프고, 뭐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리고 피곤해 죽겠어요. 아무 의욕도 없구요.”
“요즘 과로하셨습니까?”
“과로야 항상 하지요. 근데 검사 결과는 이상 없나요?”
“별 이상은 없고요, 좀 푹 쉬시는 게 좋겠는데요.”
“아유! 쉬긴 어떻게 쉬어요! 무슨 좋은 영양제 주사 같은 거 없을까요?”
한국인의 노동 시간이 세계 최장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한 시장조사회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주당 평균 55.1 시간을 일해 세계 평균치인 44.6 시간보다 10시간 이상 더 일한다는 것이다. (한겨레 2001년 6월 6일자 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한국인은 정말로 근면성실한 국민이다. 사실 일벌레로 소문난 것은 일본인들이고, 과로사라는 것을 서양 의학계에 처음으로 알린 것도 일본이어서, ‘카로시’(karoshi; 過勞死)란 말이 하나의 용어로서 문헌에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부지런함은 일본인들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다.
그간 과로 후에 갑자기 쓰러져서 숨진 사람들의 소식이 대중매체에 보도되면서 과로사라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니며 끔찍하게도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이 인식되면서, 과로사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산업재해’라고 하면 무슨 특수한 화학 물질을 다루는 노동자에게나 생기는 희귀한 질병, 또는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진폐증,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사고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반인들에게, 그 ‘산업재해’라는 으스스한 낱말이 모든 사람에게, 블루 컬러 노동자들 뿐 아니라 화이트 컬러, 그것도 말단 사원들 뿐 아니라 중간․고위 관리직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일이다.
필자가 갑자기 산업재해라는 말을 써서 어리둥절할 독자도 계실 것이다. 분명, 소위 ‘과로사’는 산업재해이고, 그것도 상당히 흔한 산업재해이다. 과로사라는 말은 의학용어라 볼 수는 없으며 명확하게 정의내리기에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과중한 노동 부담으로 인해 뇌혈관질환이나 심장질환이 발병(또는 기존 질병이 악화)함으로써 사망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1997년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전체 사망재해자 2742 명 중, 업무상 뇌혈관 및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근로자는 699명이었다. 거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애개개, 겨우 699명? 우리 나라에서 한해에 죽는 사람이 수십만 명인데, 그까짓 걸 가지고 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다음의 법령을 잠깐 살펴보자.
뇌혈관 및 심장질환에 대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전략…)
…’만성적인 과로’라 함은 근로자의 업무량과 업무시간이 발병전 3일 이상 연속적으로 일상업무보다 30% 이상 증가되거나 발병전 1주일 이내에 업무의 양, 시간, 강도, 책임 및 작업환경 등의 일반인이 적응하기 어려운 정도로 바뀐 경우를 말한다.
너무 읽기에 딱딱할 터이므로 대부분을 생략하고 필요한 부분만 보여드린다. 한국인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일상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판국에 ‘일상 업무보다 30% 증가’ 운운함이 적절한 것인가? ‘일반인이 적응하기 어려운 경우’란 것은 또 도대체 무엇인가? 결국 장시간 노동이 그다지 별날 것도 없는 한국의 사회 통념에 비추어 ‘야, 저렇게 지독하게 일을 했으니 병이 나지’ 하는 정도로 아주 명백한 경우, 그것도 급작스럽게 업무부담이 증가한 경우가 아니면 산업재해로 인정받아 보상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 든 진료실에서의 한 대화와 같이 과로로 인해 생기는 사소해 보이는 – 그러나 방치하면 결국 큰 병으로 이어질 – 건강상의 문제들을 겪고 있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절로 떠오를 것이다.
그럼, 법을 고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산재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도록 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인가? 오, 천만에! 살인자를 잡아서 사형에 처한다고 모두가 행복할 것인가?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다. 과로사는 ‘보상’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예방’해야만 한다. 필자가 이 예를 든 것은 과로사가 나타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뿐이다. 게다가, 죽은 사람만이 문제이겠는가? 죽지는 않더라도 과로로 인해 질병이 발병 내지는 악화되어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예방을 해야 하는가? 실은 매우 간단하다. 과로를 안 하면 된다. 이상 끝.
…이라고 끝을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속편하겠는가? 불행히도 현실은 그것보다 훨씬 골아프다. 우리는 몸이 불편해도 맘대로 쉴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몸바쳐서 일을 하고, 밤이건 휴일이건 할 일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리고 불평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이다. 정말로 중병에 걸리지라도 않은 다음에는 피곤하니 쉬겠다고 하는 것은 제 한 몸 밖에 모르는 몰염치한 행동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중병에 걸린 다음에 쉬어서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정말로 크게 고장나서 쓰러지기 전에 미리 미리 과로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퍼맨이 되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쉼 없이 뛰고도 다음 날이면 또 벌떡 일어나 다시 기운차게 일하는 사람, 잠은 너덧 시간이면 충분한 사람, 그러면서도 정력이 넘치고, 술은 말로 퍼마셔도 끄덕 없이 다음 날이면 멀쩡하게 나타나는 사람, 일요일이고 휴일이고 없는 사람, 필요하기만 하다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밤을 꼴딱 새워가면서 일하는 무서운 집념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가?
필자는 의사로서, 말리고 싶다. 환상에서 벗어나자.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타고난 체력으로 그렇게 엄청난 일들을 해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대개는 잠시일 뿐이다. 10년, 20년을 그렇게 일할 수는 없다. 모든 이들이 대단하다고 우러러보겠지만 속으로는 자기 몸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회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제에 보약에, 뭐든 신기한 효험을 발휘하여 자신을 철인으로 변신시켜줄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과로사 문제에 관한 한 답은 한가지 밖에 없다. 과로를 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지금 경제가 이 모양인데! 허리띠 바짝 졸라매고 더 뛰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자, 흥분하지 마시고, 잠시 달리 생각해보자. 분명 이제는 융통성 없는 일벌레보다는 창의력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사람이 필요한 때이다. 창의력이란 분명 일정량의 ‘게으름’을 필요로 한다.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먼 산도 한번 바라보고, 냇물에 발 담그고 잠시 장난도 쳐보고,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해보는 여유가 없이 좋은 생각, 뒤통수를 강타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리 없다.
법적으로는 노동 시간의 단축이 필요하고, 고용주 측에서도 장시간 노동은 장기적으로는 결코 진정한 생산성 향상의 길이 아니며, 세계적인 추세가 이제 장시간 노동이 아니라 짧은 시간 일을 하더라도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질 높고 창의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데 대한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일중독’과 ‘성실함’은 분명 구분되어야 하고 ‘일중독자’를 존경할 만한 인물로 만드는 일도 그만두어야 한다.
또, 과로와 업무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만성적으로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규명이 이루어지고 이에 근거하여 노동 환경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과로하면 몸에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지만 놀랍게도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는 매우 빈약하다. 연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서구에서는 ‘과로’라는 것이 병원의 전공의 같은 일부 특수한 직종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여서 ‘과로’의 악영향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 이는 일본과 우리 나라의 특수한 현상인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업무 스트레스 연구회’ 라는 관련 의사, 예방의학자, 산업보건 관계자들의 모임이 생겨서 업무 스트레스를 어떻게 측정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의욕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필자가 바로 이 단체의 회원이어서 염치 불구하고 선전을 하였으니 애교로 보아주시길!)
2001. 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