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이란 게 다 그런 모양이다. 얼핏 보기에는 조화롭고 완벽해 보이는 것도 조금 파고 들어보면 불량 조립 장난감처럼 아귀가 안 맞고 엉망진창인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큰형님으로 거들먹거리고, 남의 나라 인권이 어쩌고 잘난 척도 꽤나 많이 하고, 민주정치의 표본이라고 스스로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 소동이 벌어지자 미국인들은 무척 당황했다. 낡디 낡은 투개표 시스템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알 고어가 (어찌 보면 좀 치사해 보일 정도로) 그런 맹점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와중에,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그 민주주의,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국민의 의사를 묻는 투표 민주주의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하는 엄청난 회의까지 일었다. 오죽하면 ‘constitutional crisis’, ’ 헌정(憲政)의 위기‘라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그러나, 결국은 ‘그래도 지금까지 잘 돌아왔는데 왜 자꾸 난리냐’ 면서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대세였던 모양이다. ‘미제’라고 다 잘 만든 건 아닌 모양이다. (‘일제’ 탓에 ‘미제’의 신화가 깨진지 이미 오래되긴 했지만)
필자는 이제 미국서 생활한지 겨우 9개월 남짓 되었으니 미국을 알면 뭐 얼마나 알겠는가. 하지만 그런 필자의 눈으로도 당장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미국이 정말 ‘개판’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미국식 도량형(사실은 English unit 또는 inch-pound system)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에서는 우리에게 낯익은 미터법은 거의 쓰이질 않고 있다. 온도도 섭씨가 아닌 화씨가 주로 쓰인다. 화씨 몇 도가 어느 정도인지 금방 감이 안 온다든지, 키가 얼마냐고 할 때 몇 피트 몇 인치라고 얘기하려니 막막하다든지 하는 것은 금방 겪는 일인데, 그저 단지 외국에서 살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해서 불편한 것만이 전부가 아님은 조금만 캐보면 알 수 있다.
필자는 운전 면허 시험 원서를 적어내면서 거기에 키를 몇 피트 몇 인치로 적어내라는 난에 약간 당황했지만, 미국식 단위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도량형 환산표가 붙어 있는 수첩을 가지고 온 지라 ‘까짓 것, 계산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고 수첩을 펴고 계산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세상에, 1피트는 12인치였던 것이다. 10 인치가 아니고! (나만 모르고 있었나?)
뭐, 세상 모든 것이 딱 10 단위로 맞아떨어지라는 법은 물론 없다. 1분은 100초가 아니고 60초 아닌가. 하루는 24시간이고, 1년은 100일이 아니고 365일이며, 게다가 한 달은 30일이 됐다가 31일이 됐다가 28일도 되었다가 심지어 어쩌다가는 29일이기도 하고, 한마디로 X 꼴리는 대로(?) 아닌가. 좋다 이거야, 그러려니 하지 뭐.
하지만, 그러고 나서 집에 와 도량형 환산표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실로 점입가경이었다. 피트 위의 단위로 많이 쓰이는 거리 단위가 ‘야드’인데, (미식 축구 할 때 몇 야드를 전진했느니 어쨌느니 한다.) 1 야드는 3피트이다. 3? 느닷없이 웬 3? 그럼 약 1.6 킬로미터인 ‘마일’은 뭔가 떨어지는 숫자일까? 천만의 말씀! 1 마일은 5280 피트이고 1760 야드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거 누가 이따위로 만들어 놨어!’ 하고 욕이 나오려고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암산을 잘 해서 그런지 아무 불평이 없다. (미국 사람들이 암산을 잘 하긴 뭘 잘해! 암산은 한․중․일이 캡인 것 같다. 워낙 구구단에 정통(?)하기 때문이리라.)
넓이는 또 어떻구? 뭐 1 피트가 12인치인 것만 알면 1 평방 피트가 144 평방 인치인 건 금방 알 수 있고, 1 평방 야드는 9 평방 피트인 것도 그렇다 치고, 근데, 1 평방 마일은 뭐, 640 에이커에 278784000 평방 피트에 3097600 평방 야드라고? 완전 돌아버리겠네, 이거.
그래, 어디 내친 김에 무게까지 한번 보자. 1 파운드 = 453.6 그램 = 16 온스. 악… 이번엔 16진법?
부피로 가보면 게다가 더 골때려지겠지? 어디 보자, 1 입방 야드 = 27 입방 피트 = 46656 입방 인치. 아, 실생활에는 온스, 파인트, 쿼트 같은 단위가 주로 쓰인다고? (어? 온스가 여기도 또 나오네?) 그래, 어디 이건 좀 낫나 한번 보자. 1 갤런 = 4 쿼트= 8 파인트 = 128 온스. 뉴스에 ‘원유 1 배럴 당 몇 달러’ 어쩌구 하고 나오는 ‘배럴’은 얼만가 볼까. 얼씨구? 석유 1 배럴은 보통 42 갤런이지만 31에서 42 갤런까지 다양한 정의가 있다구? 이~ 씨, 장난하는 거야 뭐야?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도 않지만, British gallon과 US gallon은 다르다!) 아! 화난다!
그만 됐다, 됐어. 결론은 하나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뭐 죽 살펴보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긴 하지만, 필자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단순히 어떤 단위에 대해 감이 없다는 정도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며 거의 원칙이 없다 해도 좋을 만큼 제멋대로인 것이 미국의 도량형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사람은 과연 환산표나 전자 계산기 없이도 단위간 환산을 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것이 10으로 나누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은 ‘획일주의’라고? 일주일도 10일로 바꾸자고 해보지 그러냐고? 문화적 차이에서 온 차이일 뿐이고 익숙치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그런 헛소리를 하기 전에 잠깐만 다음 산수 문제를 한번 풀어 보시라.
가로 15 ft 3 3/4 in, 세로 21 ft 7 1/2 in 인 방의 면적은? 어떻게 계산하실 거유? 악~ 소리 나오지? (이왕이면 평방 야드로?) 보고 있으면 심난할 터이니 자세한 문제풀이는 안 하겠다. 다만, 4.667 m 와 6.591 m 였다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들 것이다. 이래도 문화적 차이 운운할 것인가? (어차피 계산기 쓸 거 아니냐구요? 쩝… 그렇다 치더라도 어느 쪽이 간편한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도량형이 10진법을 따르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소수점 표기 (decimal system) 대신 분수를 쓰는 관습마저 있어 이런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저 어려운 걸 어떻게 가르치나?
참으로 그나마 다행인 것은 1 달러는 그래도 100 센트라는 것이다. 1 달라가 12센트라든지 뭐 그랬으면 어땠을지, 정말 생각도 하기 싫다.
그래도, 미국 사람들 다 별 불편 없이 살고 있으니 그냥 너도 따라 살라고? 음, 알았어, 알았어, 그러지 뭐. 하지만, 미국 내에서도 미터법을 쓰긴 써야 것는디… 하면서 초조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유는 많은데, 자연과학, 의학, 공학 등 학문 분야에서는 이미 미터법이 천하통일을 한 상태이니 미터법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무엇보다도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터법을 쓰고 있어,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 우리는 이렇게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해도 막상 물건을 팔아먹다든지 할 때에는 미터법 표기가 필요해진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 – 인치-파운드 시스템을 사용해왔던 대표적인 세 나라 – 에서 ‘1 인치’의 실제 길이는 1958년까지 ‘약간씩’ 차이가 났다. 실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닐지 모르나 정밀을 요하는 분야에서는 큰 문제였다. 1958년에 이르러서야 1 인치가 ‘표준화’되었는데, 그 표준화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1 인치를 25.4 mm로, ‘미터법으로 정의함으로써’ 통일하는 것이었다. 인치-파운드 시스템이 미터법과 ‘쌍벽을 이루는’ 도량형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현재 인치-파운드 시스템은 미터법을 이용해 정의되어 있고,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도량형은 오직 하나, 미터법뿐이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을 상대로 행해진 조사에 따르면 대상자의 75%가 1 리터가 1000 밀리리터인 것을 알고 있었던 반면 학생들 중 6%, 교사들 중 50% 만이 1 쿼트가 32 온스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 갤런이 231 입방 인치임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Richard P. Phelps라는 교육 분석가는 인치-파운드 시스템을 버리고 미터법만을 교육한다면 수학을 가르치는데 1년에 82일을 절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미국의 도량형과 관련된 가장 충격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은 Mars Climate Orbitor 사건일 것이다. 1999년 9월 화성궤도를 돌다가 화성에 착륙할 예정이었던 미국의 우주선 Mars Climate Orbitor는 최저고도 설정 잘못으로 추락했다. 1억2천5백만 달러가 한순간에 우주먼지가 된 것이었다. NASA는 개발팀들 중 일부는 미터법을, 일부는 feet-mile 단위를 사용했던 탓에 생긴 착오로 인한 사고라는 발표를 하였다. 이쯤 되면 좀 불편하고 번거로운 정도라 할 순 없다. 정말 장난이 아니다!
<a href=”http://www.cnn.com/TECH/space/9909/30/mars.metric.02/index.html”>CNN의 관련 기사</a>
그런데, 왜 못 바꾸는가? 법령만 공포했다고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1975년에 이미 Metric Conversion Act를 발표하여 미터법 채용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가시적인 효과는 아직도 미미하다.) 그 수도 없는 도로의 표지판들을 다 바꾸는 일만 해도 만만치 않다. 모든 상점 진열대, 상자와 설명서에 있는 표기, 저울, 자, 계량 용기, 교과서, 도대체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게 뭘까? 게다가 거의 전국민들을 재교육시켜야 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과 노력…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도 사람들은 끝없이 계산 착오를 저지를 것이고, 우주선 아니라 더 한 것도 떨어질지 모른다.
지난 컬럼부터 엉뚱한 소리를 줄줄 늘어놓다가 끝에 가서 의료문제와 말도 안되게 억지로 이어 붙이는 걸로 아주 포맷을 정했나?… 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계실지 모르지만, 이것, 바로 우리 의료체계의 왜곡과 비슷한 문제가 아닐까.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이렇게 일이 엄청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별 수 없다. 단추 다 풀고 처음서부터 다시 꿰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풀어갈 밖에. 세상에 진짜 지름길이란 없는 법이다.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다. 대개들 조금씩은 아귀가 안 맞는다. 하지만 좀 심하게 안 맞는 것, 정말 안 되겠다 싶은 것은 대가를 좀 치루더라도 바꾸어야만 한다. 원래 그랬으니까, 남들도 다 그러고 사니까, 그런 핑계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삐거덕거리면서 안 맞는 아귀를 우격다짐으로 집어 넣어가며 살아 왔는지. 어쩌다가 가끔씩 이거 너무 한데, 하면서 어찌 해볼까 잠시 생각을 해보지만 엄두가 안 나고 너무나 까마득해 보여 그냥 포기하고 잊어버린 적이 얼마나 많은지…
자, 후손들에게 ‘가로 15 ft 3 3/4 in, 세로 21 ft 7 1/2 in 인 방의 면적은?’ 같은 말도 안 되는 계산 문제를 풀게 할 것인가? (미국 살지 않으니 상관없는 일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에, 他山之石!) 의료문제, 길이 안 보이니 그냥 대충 넘어가자고 할 것인가? ‘아니다!’라고 이젠 단호하게 마음 먹어보자. 사실, ‘쇠고기 한 근 주세요’ 하던 것이 사실 얼마 오래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쇠고기 600 g 주세요’ 가 별로 어색하지 않은 것을 보면 희망이 영 없는 것은 아닐 터.
-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