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서 진찰실에 앉아 찾아오는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세상이 온통 아픈 사람 천지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주로 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을 보기 마련인지라, 구두닦이는 구두의 깨끗함으로 사람을 보고, 컴퓨터 매니아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 사양으로 그를 평가하며, 심지어 산부인과 의사는 환자의 얼굴은 기억 못 해도 환자가 진찰대에 누운 것을 보면 아하!하고 알아본다는 얘기까지 있다. 별로 믿고 싶지는 않은 얘기이지만 말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음식 잘 만드는 분은 ‘잘 + 많이 먹는 것’으로 인격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점수를 따기 위해서는 오직 열심히 먹는 길뿐이다. (필자에게는 무척 유리함.) 마찬가지로 의사는 그 사람이 가진 병과 그 사람을 혼동을 하게 되는 일이 왕왕있다.
헌데, 조금 눈을 돌려보면 의학적인 기준에 의해서 병이 있다, 없다를 말하기는 비교적 쉬워도, 건강하다, 하지 않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암에 걸려서도 자신은 건강하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별달리 병도 없는데 자신이 무척 건강이 나쁘다고 여기는 것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건강이라는 말의 의미가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건강의 조건, 예를 들자면 WHO가 제시한 바와 같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함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이라는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갈수록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병’이라고 하면 9시 뉴스를 방송하는 스튜디오에 느닷없이 뛰어들어서 ‘누가 내 머리에 전선을 꽂아놓았다’고 발광하는 ‘미친 놈’을 연상할지도 모르겠으나, — 정신질환자를 ‘미친 놈’으로 비하하는 것 자체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라는 논의는 일단 제쳐놓고 — 실은 정신적인 건강에 있어서의 문제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페스트가 중세 유럽을 휩쓸었듯 암, 동맥경화, 사고, AIDS와 같은 것들이 21세기를 주름잡을(?) 질병들이 될 것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실없는 소리 좋아하는 필자의 한 친구는 21세기의 3대 난치병으로 치질, 무좀, 대머리를 꼽던데, 그것도 뭐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농담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보건대, 위에 열거한 무시무시한 질병들에 필자가 꼭 한가지 추가하고 싶은 병이 있다. 그것은 바로 ‘건강염려증’이다. 의학 용어로는 hypochondriasis라는 요상한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름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이야말로 심각한 난치병일 뿐 아니라 마른 들녁에 불길 퍼지듯 엄청나게 확산되고 있는 대단한 유행병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종합병원 외래에서는 어디에나 건강염려증 환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의사 또는 일반인이 보기에도 그다지 대수로와 보이지 않는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 것이 보통인데, 어떤 병의 증상이 아닌가 걱정에 휩싸여 있다. 의사는 이런 저런 검사를 해서 특별한 병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지만 환자의 불안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며 다른 의사를 찾아가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거나 새로운 증상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의사에게 무척이나 골치 아픈 환자가 되는데, 사실상 전혀 필요가 없는 고가이거나 위험부담이 따르는 검사를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일도 있고, 자신의 ‘병’을 알아내고 고쳐줄 고명한 의사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사기꾼 내지는 돌팔이를 만나 속아넘어가기도 하는데, 대다수의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건강에 대한 염려’는 해소되지 않는다.
도저히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고 거의 정신병의 수준이라고 생각되는 환자도 있는데, 그 정도라면 의사로서는 어떻게든 만나지 않았으면 싶은 환자이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병이 있는 경우도 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 정도의 비교적 사소한 지병(?)일 수도 있지만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체적인 질병과는 별도로 건강에 대한 지나친, 또는 비현실적인 염려 그 자체가 하나의 심각한 병이며, 그것도 무척 고치기 힘든 중병이라는 사실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건강염려증이 몇몇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건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적지 않은 사람에서는 그 관심이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신문, 잡지, TV 등, 어떤 대중 매체를 보더라도 소위 건강 정보라는 것이 빠지는 법 없는 인기 아이템인데, 어떤 경우에는 내과 전문의입네 하는 필자가 보고서도 ‘이런 것도 있었나?’하는 것들도 적지 않을 정도로 무척 수준 높은(?) 정보들을 주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아니면 필자가 너무 무식한 것일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건강에 대해서 가장 무식한 사람이 의사일지도 모른다. 건강관에 있어서 의사와 일반인 사이에 그만큼 높은 벽이 있다는 뜻이다.) 헌데, 이 정보들의 엄청난 양 자체만 해도 정보 소화불량에 걸리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내용 선정에 있어서의 무절제함이란 참으로 가공할 정도여서,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연구의 결과를 그대로 전한다든지 하는 정도는 차라리 양반이고, 명백한 오류를 주저없이 저지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대중 매체에서 쏟아지는 의학 정보가 대중의 건강관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가 의료사회학의 흥미로운 연구 주제로서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것이겠지만, 무분별한 정보의 홍수가 대중에게 악영향을 미치리라는 짐작은 누구나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건강염려증을 조장하고 있다고 보아도 그다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모든 음식점들이 저마다 TV에 나온 적이 있노라고 대문짝만하게 써 붙이고 있는 것을 흔히 보는데, 방송에 한번 나고 나면 그날로 손님 드는 것이 달라진다고 할 정도로 그 효과가 대단하다고 한다. TV에 한 의사가 출연하여 그의 전공하는 분야의 질병들에 대한 정보를 전하고 나면 그 효과는 당장에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다음 날 그 의사의 외래에는 ‘내가 바로 그 병’이라고 자처하는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는데, 심지어 신문을 스크랩해서 들고 들어와서는 ‘선생님, 제가 바로 이 병이에요’ 라고 호소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정말로 그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열에 아홉 정도는 실제 그 병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중들이 과연 그 많은 양의 복잡스런 의학정보, 그것도 제대로 걸러지지도 못한 설익은 정보들을 제대로 소화해 내리라고 생각하기 힘들고, 그 정보들이 대중의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정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쓰레기 정보가 많아지고 그 엄청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유용한 것을 골라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인터넷과 비슷?)
어떤 경우에는 의사들 자신이 건강염려증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필자에게 걱정스런 표정의 한 환자가 찾아왔다. 1년 전 필자의 전임자에게서 ‘삼첨판부전증’이라고 들었는데 1년쯤 후에 다시 검사해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심장의 구조에 대해서는 사실 고등학교 생물에도 나오는 것이지만(그것도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를 비교해가면서), 수능 시험을 이미 보신 분들은 다 까먹었을 터이니 이해를 위해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인간의 심장은 좌우 심실과 좌우 심방의 네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개의 판막이 있다. 판막의 역할은 일종의 check-valve로써,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인데, 이것이 좁아지거나, 혹은 피가 새는 경우가 있다. 삼첨판은 우심방과 우심실 사이에 있는 판막이다. 헌데, 사람의 몸이란 게 항상 완전무결한 것이 아닌지라, 삼첨판과 같은 복잡한 구조의 판막은 멀쩡한 길가는 사람 데려다가 검사를 해 보아도 열에 서넛 정도는 새는 것이 발견될 정도이다.
사실 이 환자도 참으로 멀쩡한, 환자 아닌 환자여서, 못 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일 정도였는데, 심장에서 잡음이 들린다는 이유로 심초음파 검사를 해 보니 삼첨판에서 피가 새는 것 때문에 잡음이 들린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헌데, 심초음파 검사라는 것은 엄청난 첨단 기술이 집약된 도구여서 ‘칼라 도플러’라는 기법을 통해 그야말로 ‘눈꼽만큼’의 피가 판막에서 새는 것까지 잡아내는 것이다. 이 환자, 아니 이 멀쩡한 사람의 경우에도 그러하였다. 이걸 과연 병이라고 해야하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상황이었다. (이걸 ‘도플러 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은 1년 전 그 말을 들은 뒤로 걱정이 되어 그 좋아하던 운동도 1년 동안 삼가면서 조심조심 살았다는 것이다. 지금 ‘눈꼽만큼’ 새는 판막이 나중에 잘못될 가능성이 ‘눈꼽만큼’ 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벌벌 떨면서 산다니 세상에 그런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고 얘기를 해주니,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재차 괜찮냐고 확인하였다. 그런 걱정할 거면 교통사고 무서우니 길에 나가지도 말아라, 그냥 잊어버리고 살아라, 운동이고 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등등 좀 더 과격하게(?) 얘기를 해주니 나중에는 안심이 되었던지 얼굴이 확 피면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병주고 약주고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라고나 할까. 의료 분쟁이라는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는 의사로서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일단 다 환자에게 이야기해주고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사태’에 대해 다 얘기를 해 줘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어, ‘접시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까지 다 얘기를 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으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더 많이 생길 것인가.
사람들은 점점 건강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을 잃어가고, 반면 얼토당토 않은 건강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면서, 건강은 의사가 ‘판정’해주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병원마다 ‘건강 진단’으로 자신이 건강하다는 확인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그러나, 이 ‘건강 진단’이란 실속 없는 ‘종합 선물 세트’같은 것이어서, 그 구성에 있어서 상당히 신중을 기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환자에게 피해만 줄 가능성도 있다.
건강 진단을 하게 되면 의례 혈액 검사를 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CBC(complete blood count)라 하여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이 정상 수치인지 보는 것이 있다. 기본적인 검사라 모든 건강 진단에 이 검사 항목이 들어 있을 테지만, 실제 이 검사가 유용한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논란이 있다.
예를 들면 백혈구라고 하는 것은 감기가 들렸다던가 하는 사소한 병 때문에도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만, 검사에서 이 수치가 높게 나오면, ‘염증성 질환’, ‘혈액 질환’ 등등 웬지 공포스런 말들이 결과지에 찍혀 나오게 될 것이고, 검사를 받은 사람은 불안감에 떨며 다시 피를 뽑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CBC라는 검사가 과연 별 증상이 없는 사람에게서 숨어 있는 병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어차피 피 뽑는 거 별로 비싸지도 않다면 검사 한 가지쯤 더해서 손해날 게 뭐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별로 필요치 않은 검사를 추가로 했을 때의 엄청난 비용하며, 검사를 함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추가
비용과 불안감을 생각해 볼 때 그렇게 속편히 생각하고 치워버릴 일이 아니다.
건강 진단을 해서 다 괜찮다고 하면 과연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도 문제다. 모든 병을 건강진단으로 잡아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CEA(carcinoembryonic antigen)라는 검사는 대장암과 같은 암에서 수치가 올라간다고 하여 소위 ‘암 표식자’로서 임상에서 이용되는데, 모든 암에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는 진단적인 가치는 없으며, 암 수술 등의 치료받은 환자에서 치료 효과 평가나 재발 여부를 추적하는데 유용한 정도이지만, 많은 건강 진단에서 남발되고 있다. 이것이 정상이라고 ‘나는 암 걱정 없다’라고 안도감을 가질 일은 결코 아니다. 그릇된 안도감을 조장해서 잘못된 생활 습관을 고치는데는 소홀하게 한다면 오히려 해를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건강은 의사가 발급하는 진단서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의사가 모든 것을 판정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푸코가 얘기한 ‘의학의 정치적 의식화’일까? 이것도 권력이라면 권력일지, 의사가 붙이는 ‘건강’, ‘질병’의 딱지는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의사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셈인데, 이 칼이란 것이 배배틀리고 휘청휘청하는, 아주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어서 함부로 휘두르다가는 남은 물론 자기 모가지도 성하게 붙어 있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것인데, 그렇다고 놓아 버리자니 배운 재주가 그것 뿐이라 밥을 굶겠고…. 하릴없이 칼자루를 부여 잡고 있는 필자의 등줄기에도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건강염려증이란 이 엄청난 현대의 돌림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건강·불건강의 판정이 일반인들에게는 접근 불가능하고 불투명한, 의학이라는 정교한 지식 체계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됨으로써, 각 개인이 스스로의 건강 상태를 규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상실하게 된 사회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997.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