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형 간염 보균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

필자가 아는 한 노총각 유학생 얘기를 먼저 해보자. 공부하느라 (말하자면, 어쩌다보니) 결혼이 늦어진 그는 마침내 결혼할 여자가 생겼고 한국에 들어가 약혼을 하고 올 것이라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헌데 얼마 뒤 그가 미국에 돌아와 비보를 던지는 것이었다. 결국 ‘깨졌다’는 것인데, 물론 그가 바래서 한 일은 아니었고 파혼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병’ 때문이라는 것이다. 병? 그는 지극히 멀쩡하고 건강해 보였는데? 군대를 방위로 마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그가 눈이 나빴기 때문일 뿐이라는데…

우리 나라 전 인구의 약 7%가 가지고 있는 만성병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 생각나시는지? 이 병을 (또는 병 아닌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취업과 결혼 같은 인생의 중대사에서 거절을 당하면서 끝없이 좌절을 겪고 있다. 이게 무슨 현대판 나병인가? 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 공포의 대상이 되면서 ‘현대판 나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우리 나라 사람 거의 열 명에 하나 꼴로 가지고 있는 이 엄청나게 흔한 병과는 그 문제의 규모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 병은 바로 대한민국 공중 보건 문제에 있어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규모의 문제인 B형 간염이다. 필자가 아는 그 노총각의 경우에는 B형 간염 보균자 (‘환자’와는 다른데, 이는 잠시 뒤에 설명할 것이다.)로서 본인이 스스로 지극히 건강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B형 간염 보균자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약혼 직전에 서로 교환한 건강 진단서에서 드러난 이 문제가 상대방 집안의 반대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마치 병을 숨기고 사기결혼(?)이라도 하려고 했다는 듯이 말이다.

어느 내과 의사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한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살펴보자. (http://user.chollian.net/~handor –> 이 사이트는 현재 없어진 것으로 보임, 간사랑 동우회: http://www.liverkorea.org/ 또는 다음 기사 참조: https://www.donga.com/docs/magazine/weekly_donga/news273/wd273ee020.html) 온갖 눈물겨운 사연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간염 보균자는 간염 바이러스를 몸 안에 가지고 있으되 간염이 발병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며, 물론 본인들은 아무런 증상이 없고 생활에 지장이 없다. 헌데, 이들은 각종 기업체의 채용 신체검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결혼 상대자와 갈등을 겪고 있다. B형 간염 보균자들의 분노와 좌절은 상상을 초월한다. 군대를 멀쩡히 다녀온 사람인데 어째서 기업체에서 나를 거부하는가 하는 얘기, 취업 차별에 대해 복지부에 항의하다가 ‘당신 간염 때문에 떨어져 놓고 왜 엉뚱한데 화풀이냐’는 말만 듣고 좌절한 사람의 얘기, 애인에게 간염 보균 사실을 고백해야하는 고통…

병으로 인한 ‘낙인’ 효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물론 B형 간염 환자만은 아니다. 얼마 전, 경찰청이 도로 교통법을 개정하여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개인병력과 신상자료를 넘겨받아,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 운전자에게 의무적으로 수시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도록 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한겨레신문 5월 29일자 사설 –>이후 상황은 다음 참조: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082935)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것이 이런 명백한 ‘인권 침해’를 합리화 할 것인가?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미친 놈’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생활에서 받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 예를 들면 고부 갈등,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의 어려움, 우리 나라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인구에 회자되었던 ‘외상 후 증후군’ 등등 – 상담하기 위해 정신과를 찾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울증 등으로 평생 한 번 이상 ‘정신 질환’을 겪을 가능성은 거의 3명에 1명 꼴이라는 연구도 있다. 그들이 모두 수시로 불려가 검사를 받아야하는 요주의 대상인가? 가뜩이나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을 꺼리고 숨기려 하는 판에 이렇게 남의 진료 기록을 빼내서 보고 ‘낙인’을 찍어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면 누가 정신과 진료를 받으려 하겠는가? 아니, 정신질환과 교통사고 간에는 무슨 관계라도 있기나 있는 것인가?

이런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인권침해 내지는 차별 사례는 수도 없이 많이 있다. AIDS 환자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쉬쉬하면서 병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간질환자는 전 인구의 0.5-1%에 이른다. 필자는 의과대학생 시절, ‘지랄병’으로 불리는 간질환자에 대한 무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역설하던 한 간질 전문가 선생님의 말을 지금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다. 당뇨병과 비교해보자. 사람들은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하지만 간질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당뇨병은 망막 합병증으로 실명한다든지, 신장 합병증으로 평생 투석을 하고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심각한 문제들이 생기는 반면, 간질은 90%의 경우에서 한가지 약을 복용함으로써 평생 다시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간질이라는 병이 부당하게 사회로부터 받는 질시라는 문제를 논외로 할 때에 (실은 이것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기는 하지만), 간질과 당뇨병 중 꼭 한가지 병에는 걸려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는가? 순전히 ‘의학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간질이 당뇨병보다 훨씬 ‘나은’ 병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B형 간염이 당사자에게 엄청난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는 낙인을 찍는 질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잘못된 인식이 원인이 될 것이다.

첫째로, 전염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염성과 관련이 있는 ‘e 항원’의 유무에 따라서 채용시 신체검사 합격 불합격을 판정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B형 간염은 일상 생활의 접촉을 통해서는 감염되지 않는다. 주 감염 경로는 산모로부터 태아로 전염되는 ‘수직 감염’과 성관계 등 ‘매우 밀접한 접촉’이다. 술자리에서 잔을 돌리면 감염의 우려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실제로는 그다지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는 없다. 아니, 설사 술자리에서 잔을 돌리면 감염이 될 수 있다고 친다 하더라도, 술자리에서 잔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 취업을 막는 결격 사유라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또 요즘 세상에 누가 면도기나 칫솔 따위를 같이 쓴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은 B형 간염 예방주사가 일반화되어 있다. 결국 직장에서 전염성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예방주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B형 간염 예방접종은 매우 안전하고 효과적인 예방책이다. 설사 ‘밀접한 접촉을 하는’ 배우자라 할 지라도 사전 검사와 예방접종 등 충분한 조치를 취한다면 이는 분명 극복하지 못할 것 없는 문제이다. 산모에서 태아로의 수직감염도 예방조치를 취함으로써 막을 수 있다.

두번째로, – 필자의 생각에는 보다 중요한 원인이라고 본다 – 간염 보균자는 생산성이 떨어지고 비용 증가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즉, 간염이 발병하여 결국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될 수 있고, 나아가서 과로로 인해서 발병했다면 산업 재해냐 아니냐의 문제까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근거 없는 차별이다. 건강한 상태의 간염 보균자가 과연 얼마나 발병의 위험성이 있는지도 의문인데다가, 설사 ‘정상인’ 보다 다소 발병의 위험성의 높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취업을 가로막을 만한 정당성을 가질 정도인지는 심히 의문스럽다고 하겠다. 간염보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 철폐 운동을 하고 있는 한 내과 의사 (위에 나온 인터넷 사이트를 만드신 분)의 항변은 이러한 차별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직원이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있으면 회사의 비용이 증가합니다. 부모 중에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있는 사람은 고혈압이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입사할 때 부모가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있는 지 물어보지 않습니다. 연좌제도 없어진 마당에 부모 형제의 병력까지 따져 채용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구요? 비용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B형 간염바이러스 보유자만 채용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당합니다.

부모나 형제의 경우가 적절하지 않다면 본인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 (중략) …

아시다시피 담배를 피우면 나중에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폐암, 방광암, 식도암 등의 암 뿐 아니라 급성심근경색증, 뇌졸중 등의 위험도 훨씬 높고 폐기종, 만성기관지염 등의 병에 걸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회사로서는 비용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흡연자를 위하여 회사는 흡연공간을 제공해야합니다. (국민건강증진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당연히 청소인력도 더 필요하겠죠? 마구 버리는 꽁초 때문에 변기나 하수구가 막혀서 건물관리비용도 증가할 것입니다. 이런 비용증가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지출되는 실질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운다고 회사에 입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러는 곳은 있을 지도 모릅니다.) …’

필자는 한발 더 나아가서, 설사 그 ‘비용증가’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라 할지라도 이것이 채용시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이 아니긴 하지만. 만일 B형 간염 보균자가 정말로 앞으로 발병하여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가정한다면, 그때는 그들은 사회가 보호해주어야 할 ‘장애인’으로 대우받아야 할 것이고 국가가 기업체에 보조금을 주어서라도 취업에 차별을 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어야만 할 것이다. 장애를 이유로 고용을 차별하는 것은 엄연히 법에 저촉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이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 유지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를 흔드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뭐라고 가르치는가? 약자는 마음껏 짓밟아도 좋다고 가르치는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적어도 야만의 세계가 아닌 문명 사회라면 사회적인 약자도 이 사회 안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은 ‘비용’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린, 이 사회가 모두를 위한 사회가 되도록 하기 위한 일인 것이다. 간염 보균자니까 안 된다, 딴 데 가서 알아봐라는 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얘기를 할 것인가?

지금 문자 그대로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남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 우리의 아이들, 가족과 친구들의 문제이다. 진정 우리 사회가 눈꼽만큼의 이성이라도 남아 있는, 털끝만큼의 희망이라도 남아있는 사회라면 B형 간염 보균자에 대한 (그리고 여타 질병에 기인한) 부당한 차별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적지 않은 분들이 이 문제를 위해 헌신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며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도 이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20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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