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y Watch’라는 미국 TV 시리즈가 있다. 참으로 허접하기 짝이 없는 연속극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쭉쭉 빠진 몸매와 잘생기고 예쁜 얼굴 말고는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젊은 남녀 해상 구조원들이 수영복 바람으로 해변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장면이고, 줄거리는 있으나 마나한 뻔한 얘기의 매우 미국적인 드라마이다. 의사인 필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그 드라마의 허접함 뿐만이 아니라 가끔씩 등장하는 심폐소생술 장면인데, 몇 번 가슴을 퍽퍽 누지르고 숨 몇 번 불어 넣으면 물에 빠져 익사 직전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콜록콜록하면서 번쩍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것도 매번, 틀림없이 살아난다!) 아, 사람 살리는 것이 저다지도 간단하단 말인가! 명색이 의사인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에서, 필자는 숱하게 심폐소생술을 해보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렇게 ’눈을 번쩍 뜨게‘ 만든 적은 단 한번도 없는 듯 싶고, 정말로 환자를 살려서 퇴원을 시킨 기억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말이다.
‘Pulp fiction’ 이라는 영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영화 자체는 전혀 허술하지 않으며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이지만, 역시 필자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심폐소생술 아닌 심폐소생술 장면이었다. 죤 트라볼타가 조폭 조직원으로 나오는데, 감히 보스의 애인과 놀아나는 건지 뭔지 약간 아리송한 시간을 보내다가 그녀가 갑자기 마약 과용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그는 심장이 멎어가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미친 듯이 좌충우돌한다. 결국 친구 – 마약중독자인 – 의 집으로 그녀를 떠메고 들어가 제발 어떻게 좀 해보라고 악을 쓰고, 그 친구가 하는 일이란 것이 주사기에 약을 재어 주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정황으로 보아 심장 박동을 촉진시키는 강심제 쯤이라고 봐야 할 듯) 이판사판이 된 존 트라볼타는 결국 부들부들 떨다가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심장에 주사기를 푹 찔러버린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뜨고 벌떡 일어나는 여인! 너무 아파서 일어났다는 듯이 말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맥락으로 보아 그렇게 ‘진지한’ 장면이라기 보다는 약간 코믹하고 풍자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뭐 사실에서 벗어난다고 꼭 트집 잡을 생각은 없지만, 어쨌거나 황당하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때 필자의 아내가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보기에도 상당히 황당해 보였는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저거, 저렇게 해도 되는 거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은 심폐소생술 도중에 강심제를 심장에 직접 찔러서 주입하는 방법이 과거에 한때 사용된 적도 있기는 하다. 별달리 효과가 없다하여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방법이지만 말이다.)
심폐소생술은 심장박동과 호흡이 멎은 죽음 일보 직전의 절박한 순간에 생명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심장박동과 호흡이 정지하면 신체는 생존에 필요한 혈액과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고, 회복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럼 다시 회생시킬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얼마나 될까? 심장박동과 호흡을 되돌리는 것이 얼마 안에 이루어져야 완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은 최대한으로 보아도 불과 5분 내외이다.
인체의 모든 장기 중에서 산소공급이 중단되었을 때 가장 먼저 손상을 받는 것은 뇌, 그 중에서도 대뇌피질이다. (대뇌피질은 우리가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는 등의 고차원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주체이다.) 이 수분 남짓한 시간 동안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 대뇌 피질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받게 되고, 설사 그 이후에 심폐기능을 회복한다고 해도 영구적인 뇌손상으로 인한 휴유증을 피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하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20분 남짓 이상이 경과하면 뇌 중에서도 보다 기본적인 기능, 즉 숨쉬고 심장박동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담당하는 뇌간(腦幹)마저도 손상되므로 식물인간으로라도 소생할 기회마저 희박해지고, 바로 사망하거나 혹시 심장박동을 일시로 되돌려 놓았더라도 뇌사상태를 거쳐 결국 심장도 멈추게 된다.
결국, 시간은 겨우 몇 분 정도이다.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쓰러져서 호흡과 심장박동이 정지했을 때 그를 병원으로 옮긴 이후에야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면 – 그가 병원 응급실 문 바로 앞에서 쓰러진 것이 아닌 다음에는 – 살려낼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는 것이다. 119 구급대를 불러서 구급대원이 와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면서 병원으로 옮긴다면, 아닌 것보다는 낫겠지만, 역시 쓰러진 직후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은 그저 흘러가게 된다.
그저 팔다리나 열심히 주무르면서 기다릴 것인가. 팔다리라도 열심히 문지르면 혹시나 혈액순환에 좀 도움이 되거나 ‘기가 통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손끝을 따면 어떨까. 옛날 얘기에 나오는 효자들을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넣기도 했다는데, 그러면 사경을 헤메던 병든 어머니가 깨어나기도 했다던데… ‘기사회생 우황청심원’을 넣어보면 어떨까…
민간요법이라고 무조건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심장박동과 호흡이 멎은 상태라면 이런 방법들은 너무나도 무기력한 방법들임에 틀림없다. 의식을 잃은 사람의 입에 함부로 무언가를 넣는다면 오히려 기도로 흘러 들어가 더 명을 재촉하는 결과마저 초래할 수도 있다.
심폐소생술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의학계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이다. 참으로 온갖 진기명기(?)의 경연장이라고나 할까. 위에서 얘기한 바대로 잠시 쓰여지다가 폐기처분된 방법이지만 강심제를 직접 심장에 찔러 넣는 흉악한(?) 방법에서부터, 미국의 드라마 ‘ER’에도 가끔 등장하듯이 (이 드라마는 고증(?)이 매우 철저한, 사실감 넘치는 의학드라마이다. 의사인 필자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정신없이 빠르게 상황이 전개되곤 한다.) 아예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직접 손으로 쥐어짜는 끔찍스런 방법도 쓰여진다. 가슴을 손으로 누르는 힘 뿐 아니라 손을 뗄 때의 힘까지 이용하기 위해 빨판을 이용해 심장 마사지를 시도하는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진지하게 연구하느라 애쓴 사람들에겐 좀 미안한 비유이지만, 하수구 막힌 것 뚫을 때 쓰는 도구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심장 부위와 배를 동시에 누르는 방법이 소개된 적도 있다. 심장 박동이 멎었으나 잠깐 의식이 남아 있었던 환자에서 ‘기침을 시킴’으로써 환자를 20 여분동안 살려 놓았다는, 거의 믿거나 말거나에 가까운 사례마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일단 환자가 병원에 도착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의 경험에는 이미 심장과 호흡이 멎은 상태에서 응급실에 실려온 사람을 살려낸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거의 없는 것 같고, 기억에 아직도 대부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심폐소생술로 사람을 살려낸 몇 번 되지 않는 기억은 모두 ‘거의 눈앞에서’ 환자가 심정지 또는 호흡 정지를 일으켜 즉각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했었던 경우이다.
심폐소생술에 있어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빨리 즉각적으로 시작하느냐가 성패의 가장 큰 갈림길임은 틀림이 없다. 의료 수준에 있어서 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조차도 돌연사(突然死)를 치료하는데 (앞뒤가 안 맞는 말인 것 같지만 달리 적절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성과를 거둔 것은 심폐소생술의 기술이라기 보다는 심폐소생술을 보다 즉각적으로 개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려는 노력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공항 등 공공장소에 설치된 자동 제세동기(除細動機, automatic external defibrillator, AED)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의학드라마에서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 손잡이 두개를 가슴에 대고 ‘퍽’하면 몸이 들썩거릴 정도의 전기충격이 가해지는 그 기계 말이다. 아니, 그 끔찍스런 물건을 공공 장소에 그렇게 놔두어도 되나? 시카고 오헤어 (O’Hare) 와 미드웨이 (Midway) 공항에 이 기계를 설치한 후 10개월 동안 공항 내에서 돌연히 쓰러져 심정지에 이르른 14명 중 9명의 목숨을 구해내었다. 그것도 뇌손상 없이 ‘멀쩡히’ 회복될 정도로 말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미국 전역에서 하루에 600 여건 꼴로 일어나는 돌연사의 생존률은 대략 5 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미의회는 금년 5월, 전국의 공공장소에 제세동기를 설치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의 첫해에 3천만불의 예산을 투입할 것을 승인하였다.)
과로사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되어 있는 우리 나라, 갑자기 쓰러져서 허망하게 숨을 거두는 사례는 남의 얘기가 아닌 우리 주위의 얘기이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길만한 위험요인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겠지만, 일단 그런 불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생사의 기로에서 소중한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전 사회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신속하게 출동하여 응급상황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고 최단시간 내에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응급체계의 유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한 기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위에서 든 예와 같이 공항, 터미널, 대형 빌딩 등의 공공 장소에 제세동기를 설치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심폐소생술에 대한 교육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갑자기 쓰러졌을 때, 무기력하게 팔다리나 주무르면서 구급차만 기다릴 것인가? 학교, 군대, 하다 못해 예비군 훈련, 민방위 교육, 기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가족과 동료를, 또는 생면부지의 남일지라도, 생사의 기로에서 다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와 함께 생을 누릴 수 있도록 최후의 도움을 줄 이 기술을 배울 기회를 마련해야만 할 것이다.
2002/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