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최근 한 종교단체가 ‘복제 아기’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이 사실로 과연 검증이 될 것인지, 사기극으로 끝날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 원고가 지면에 실릴 때쯤에는 또 다른 결과가 나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단체가 ‘인류의 영생을 위해서’ 인간 복제를 한다고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기억까지 복제해서 복제된 인간의 뇌에 이식’하겠다는 공상과학소설 수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진실성을 의심케 한다.

우선, 제발 상식 이하의 논쟁은 집어치우자. 인간복제를 막아야 된다는 사람들 중에는 ‘히틀러가 되살아 날 수도 있다’는 식으로 겁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실은 인간 복제가 인류 영생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한심스러운 헛소리에 불과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유전적으로 같으면 정말 똑같은 인간이 되는지. 유전적으로는 동일한 두 인간인 일란성 쌍둥이가 같은 인간인가? 한날 한시에 같은 유전정보를 가지고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거의 같은 환경 하에서 성장한 일란성 쌍둥이라도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완전히 별개의 인간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체세포를 떼내어 자기와 똑같이 생긴 인간을 만들었다고 그게 자기 자신인가? 심지어 ‘자기의 기억까지 복제’ 해 넣는다 – 물론 현재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분명한 일이다.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똑같이 행동하면서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복제인간 부대’ 같은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과연 현실화될 것인가? 공상과학 소설에 나왔던 일은 다 이루어졌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해왔다면서 마치 가까운 장래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듯한 공포 분위기를 잡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는 최소한도 필자의 살아 생전에는 그런 꼴(?)을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의 생각이 옳을 지 틀릴 지는 필자가 늙어 죽을 때까지 지켜보아야 할 터이니 확인하는 데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1980년대에 컴퓨터 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한 때 의학계에서는 환자를 진료하고 진단하는 데 컴퓨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유행’했었다. 즉 컴퓨터로 환자를 진단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의사의 판단력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유행은 곧 사그러들고 말았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데에는 수량화할 수 없는 데이터의 중요성이 매우 컸던 것이 문제였고, 수량화할 수 있는 각종 검사 수치들과 같은 것도 해석이 그다지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그 환자가 가진 조건에 따라서, 어떤 집단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수시로 달라질 수가 있다는 등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수없이 많은 정보들 중에서 어떤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무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여전히 인간의 경험적인 직관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컴퓨터를 이용한 진단 시스템은 현재로서는 극히 한정된 범위에서만 활용되고 있으며 이런 저런 다양한 경우에 모두 대처할 수 있는 ‘범용’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고 이의 개발을 위해 노력하려는 움직임조차 거의 없는 상태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인간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현실로 구현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그릇된 환상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에덴 동산으로 되돌아가서 발가벗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으로’ 되돌아가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멀리, 이미 갈 만큼 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해서, 과학은 무조건 끝없이 발전해야만 하는 것인가? 과학이 발전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여야만 할 것이다. 과학은 어디까지 발전해야만 하는가? 어디까지 발전하는 것이 인류를 위해서 가장 바람직할 것인가?

필자는 단순히 인간 복제에 찬성한다 안 한다는 논쟁을 하기보다는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가 이제 스스로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의 능력을 지니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라는 점, 그래서 인류가 이 위험천만한 양날의 칼을 안전하게 다루어 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해야만 할 때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인간을 복제해서 장기를 떼어 쓴다든지 하는 것은 사실 현실성이 없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도 합법적으로는 말이다. 이것을 사실상 ‘살인행위’이다!) 그보다는 인간의 유전자를 일부 지녀 거부반응 없이 이식이 가능한 장기를 생산하는 돼지를 만들어 낸다든지, 줄기세포를 성장시켜 장기로 만들어낸다든지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방향이 대세가 될 것이다. 또 자기 자신을 복제해서 자신의 ‘분신’이라고 착각하면서 흐뭇해하는 것은 일부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들의 뒤틀린 욕망에 불과한 것이지 불임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책도 아니다. ‘진짜’ 자식을 가지고 싶은 동성애 부부가 체세포 복제를 해서 자식 아닌 자식을 가지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논란 정도만이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논란은 비단 복제 인간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망가진 장기들을 자유자재로 갈아 끼우면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기술이 현실화가 된다면, 인간은 도대체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뇌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장기를 이식 받거나, 심지어 인공 장기로 대체하게 된다면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과연 어디인가? (이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낯익은 상황인데, 추억의 명작(?) 만화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지 않는가? 영원히 죽지 않는 ‘기계몸’을 찾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우주 여행을 계속하는 소년의 이야기 말이다.)

기본적인 대전제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 중요한 대전제란 ‘인간은 죽는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의식할 수 있는, 그러나 초월할 수는 없는 존재’라는 것이 되지 않을까. 인간이 영원히 살겠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실현이 된다면 그 순간이 바로 인류의 최후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의학은 이제까지 인간이 어떻게 건강히 오래 살 것인가 만을 생각해왔고, 수명을 연장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것은 의학과 생명과학의 숭고한 사명이었고 그것이 절대선이라는 데에 추호의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었다. 과연 인간이 언제까지 살아야만 하는지, 언제 죽어야만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던 것이다. 죽음이란 것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지금까지는 당연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하게 언제 어떻게 죽어야만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실은 이미 그런 고민들은 시작되었다. 모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은 뒤 중태이던 한 환자를 보호자가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퇴원을 시키겠다고 하자 의사는 일단 만류를 하였으나 결국 제지하지 못하고 퇴원을 시킨 후 환자가 사망하자 담당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된 일이 있었다. ‘소중한 생명을 지켜야 할’ 의사가 사망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환자를 퇴원시켰음을 문제삼은 것인데, 의사가 친권자가 원하지 않는 치료를 ‘강제’할 권한이 없다는 점에서 분명 사법부의 판단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필자가 의사라서 의사 편을 드는 것이 아니고, 이 사건 이후에 중환자실 등에서 회복의 희망은 없는 상태에서 생명 연장 치료만을 하고 있었던 수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치료를 포기할 권리’를 침해 당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괴로움을 받았던 것은 잘못된 한번의 법적 판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근본적인 문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항상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의 결여이다. 분명 어떤 경우에는 적절한 선에서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환자가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며, 단지 생명만을 연장하는 치료를 강제하는 것은 결코 ‘생명의 소중함’을 지킨다는 미명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고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단세포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의학적인 치료란 기본적으로 ‘질병의 자연경과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연의 상태라면 일어나게 될 죽음을 억지로 가로막는, 즉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이 그 목표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자연을 거스르는 일을 시작했다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판단하는 것도 고스란히 사람의 몫인데, 이 판단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소리만 하고 있다면, 마치 신의 영역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면, 이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위에서 든 것과 같은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인류가 인간 복제를 통해 영생을 추구한다는 뒤틀린 욕망까지 내비치고 있는 지금, 과연 인간은 이미 무서울 정도로 커져버린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서는,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의학이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과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경지에 이르러 인류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지만, 분명 지금 이미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도 역시 고민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2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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