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아픈가, 마음이 아픈가?

필자가 의사 노릇을 하면서 매일 매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환자가 자기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다고 하는 걸 들어주는 일이다. 백사람이면 백사람이 조금씩 다른 뭔가를 호소하고 있는 걸 듣노라면 참 다양하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한가지만 고백하건대, 필자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증상 중에서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셋에 하나도 안 되는 것 같다.

아니, 도대체, 의사라는 작자가 어떻게 뻔뻔하게 그런 소리를… 그러고도 벌어먹고 살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할까. 필자는 필자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다는 아닐지 모르지만) 의사들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많은 환자들이 의사한테 자기의 온갖 고통을 호소해도 의사가 들은 척 만 척 무시한다고 화를 내지만, 필자는 그것은 의사가 매정하고 비인간적이어서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그 때 환자가 호소하는 각종 증상들에 대해서 의사가 이해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원인이라고 본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의사가 모른다고 하면 도대체 환자는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 의사는 어찌되었든 간에 환자가 호소하는 것을 해결해주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되면 의사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필자는 심장내과를 전공한 의사로서 매일같이 ‘가슴이 아프다’는 환자를 만난다. 가슴이 아플 수 있는 병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목숨과 상관이 있을 수도 있는 병이라면 협심증이나 심근경색과 같은 심장병들일 것이다. 필자의 우선적인 관심은 그 가슴이 아프다는 사람들이 과연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를 감별하는 데에 쏠리게 된다.

우선 통증의 양상을 살펴보게 되는데 어떠한 때에 통증이 생기는 지, 특히 운동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지속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와 같은 것이 중요한 고려점이 된다. 운동과 전혀 관계가 없고 지속 시간이 너무 짧거나 너무 긴 경우에는 일단 협심증일 가능성이 떨어진다. 즉 전형적인(?) ‘협심증은 아닐 것’ 같은 환자라면 ‘가만있다가 괜히 가슴이 꼭꼭 찌르는데 순간적으로 그러고 말고 운동하는 건 아무 지장이 없다’ 든지, 아니면 정 반대로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한데 운동하니 오히려 괜찮다’ 든지 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몇 가지 검사를 해보아 이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비교적 자신 있게 협심증은 아닐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협심증이 아니라면 환자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심장병은 ‘별로 안 아프면서 학교만 결석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병은 아니다. 이 글을 보시는 독자 여러분들은 부디 심장병에 걸리지 않으시길 바란다. (그리 되면 필자가 굶어 죽게 되는 것 아니냐고요? 원 별 걱정을 다…)

헌데, 역설적이게도 협심증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필자의 고민이 꼭 끝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 그래요, 그럼 별 것 아닌가보군요, 하고 환자가 그냥 알아서 가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럼 왜 아픈 거냐고 묻기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원인이 뭔가를 생각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슴 아픈 원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놀랍게도 심장 때문에 아픈 것 말고도 십 수 가지 이상의 원인을 열거할 수 있다. 식도에서 기인한 통증, 늑막에서 오는 통증, 갈비뼈와 그 주변의 인대, 근육, 관절에서 오는 통증 등으로 대별할 수 있는 데 뭐 장황하게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통증들은 또 그 나름대로 특이한 양상이 있어 환자의 증상이 이에 부합하는지를 잘 물어보는 게 우선 해야할 일이다.

헌데, 참으로 곤란하게도, 이리 저리 살펴보아도 도대체 왜 아프다고 하는 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도 어쩌다가 가끔이면 좋겠는데, 필자가 돌팔이라 그런 것인지, 괴상한(?) 환자만 필자에게 찾아오는 것인지, 안타깝게도 그렇게 잘 모를 경우는 참으로, 참으로 자주 생긴다. 환자는 뭔가 속시원하게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 필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참으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아, 이렇게 다 까놓고 얘기하다가는 실력 없고 아는 것 없는 돌팔이로 찍혀서 환자가 다 떨어질 지 모르니 이쯤 해두고 지금부터는 조금 아는 척도 해보자. 아니, 아는 척을 한다기 보다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쉽지 않을 때는 과학은 잠시 잊어버리고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의사가 아닌 일반인이 가질 법한 상식의 수준에서 생각을 해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그래야만 그나마 그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심인성 흉통’이라는 것도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말인데, 심인성(心因性)이라 함은 심장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 아주 헷갈리는 설명이 될 터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마음에서 오는’ 통증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그것도 미국 사람들이라고 꼭 알아들으리란 보장이 없는, 아주 유식한(?) 꼬부랑말로 하면 ‘cardiogenic’과 ‘psychogenic’으로 겨우 구별이 되는 말이다. Gen-이란 생겨난다는 뜻이고, cardio- 는 심장, psycho- 는 마음이란 뜻이다. (미친 사람 ’싸이코‘가 아니고!)

이것도 조상의 지혜(?)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의 심(心)자가 ‘마음 심’자 인 것은 우리의 마음과 심장이란 것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 하다. 아니, 우리 조상의 지혜만은 아닌 듯 한 것이 영어로도 heart라고 하면 ‘심장’도 되고 ‘마음’도 되고 하는 걸 보니 우리 조상 뿐 아니라 남의 조상도 꽤 지혜로운 것 같다.

정말 마음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왜 그런지는 필자도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슬프고 울적하고 화가 나면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은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오죽하면 마음 아프다는 말과 가슴 아프다는 말이 크게 다르지 않은 뜻으로 쓰이고 (영어로도 heart-broken이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이 사람의 마음은 가슴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믿었겠는가!

화병이라는 말은 누구나 아실 것이다. 참기 어려운 것을 오랜 세월 억지로 참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꾹꾹 눌러 삭인 사람들이 화병에 걸린다고도 한다. 그 사람들이 여러 가지 증상을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주요 증상 중 하나가 바로 가슴이 응어리 맺힌 듯 갑갑하고 아픈 것이리라.

화병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수많은 스트레스들은 그것이 우리가 견디어 내기 힘들 정도이거나 또는 적절히 해소되지 못하고 쌓였을 때 뭔가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가 꽤 흔하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아플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소화가 안되고 체하고 배아플 수도 있다. 오죽하면 ‘골치 아프다’는 말이 있는가. 말 그대로, 복잡하고 해결 잘 안 되는 일이 있으면 머리가 아플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 사촌이 땅을 사면 아플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배이기도 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러한 해소되지 않은 스트레스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슴 아픈’ 증상이 아닐까. 필자가 여기에 대해 엄밀하고 과학적인 설명을 할 재간은 없지만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흉통에 대해 필자가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주로 이런 얘기들이다.

이때 필자가 조심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 우선 ‘신경성’이란 말을 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신경’과 무슨 관련이 어떻게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부정확한 말을 쓸 수는 없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신경성’이란 말의 뉘앙스는 ‘당신 신경이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다’라면서 환자의 심리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듯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증상을 느낀다고 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실제로 속상하고 가슴 아프고 답답할 일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차는 있겠으나 누구에게나 견딜 수 있는 한계란 것이 있고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면 결국 그것은 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험한 세상에서 가슴 아프지 않고 살아가려면 감정도 없는 목석 같은 인간이 되거나, 아니면, 도를 닦아서 도사 내지는 신선이 되던가, 그 둘 중의 하나여야만 하는 걸까.

세상이 누구에게나 더 살기 편하게 되고 조금씩이라도 즐거운 일도 많아진다면, 가끔 가슴 아프고 답답할 일이 있더라도 그 어려움을 같이 나누고 이겨내게끔 북돋아주는 사회라면, 필자에게 찾아오는 그 원인 모를 가슴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은 조금 줄어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0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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