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의사 폐업이 일단 끝이 났다. 물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평상시부터도 욕을 배불리 먹고 있었던 의사들은 이 기간 동안 참 욕을 많이도 먹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이미 사람들이 의사를 욕하면서 그렇게도 들먹인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바 있다. 헌데, 사태가 진전되면 될수록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다른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허준! 맙소사! 우리 나라 국민들이 TV 드라마에 쏟는 관심과 애정이란 것은 참으로 각별한 것이어서 인기 있는 연속극의 경우 불치의 병에 걸린 주인공을 살려야 하네 마네, 주인공 남녀가 맺어져야 하네 마네 하는, 실은 시시껍절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실로 진지하고 열띤 토론에 붙여지고 심지어는 이런 ‘여론’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각본을 바꾸는가 하면, 아예 시청자들의 의견을 들어봐서 주요 줄거리를 정하는, 첨단 인터액티브 방식(?)으로 드라마를 이끌고 나가는 경우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의사가 환자를 내동댕이치고 거리로 나서는, 유사이래 없었던 이 사건에 전국이 기절초풍하고 있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계속 방영이 되었던 드라마 ‘허준’은 대중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고 의사를 욕하는 사람들 열에 아홉은 허준의 이름을 들먹거렸다. 저세상의 허의원, 귀깨나 간지러웠을 것이다.
‘허준을 0.1%라도 닮아봐라, 이 개X만도 못한 의사 XX들아!’, ‘허준은 자기가 죽어가면서까지 환자에게 약을 양보하는데 늬들은 도대체 뭐냐?’, 심지어는 ‘허준은 바라지도 않는다. 유도지만큼이라도 해봐라’에 이르기까지 허준을 들먹인 욕설이 난무한다. (물론 실제로는 훨씬 더 읽기 거북한 육두문자가 난무하고 있다.) 필자로 하여금 이 글을 쓰도록 결정적으로 열받게(?) 만든 말은 ‘의사 XX들 전부 허준을 보고 감상문을 써내게 해야된다!’는 말이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필자는 지금 공부를 위해 미국에 온지가 두 달이 넘었고 그래서 그 엄청난 의사 폐업 사태의 와중에 있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상황을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하고, 또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은 국내에 있는 의사 못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어떤 모양새로 비추어질지 몰라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준을 보고 의사들이 감상문을 써내야 한다는데(!), 그것쯤은 해도 문제없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미국에 간 놈이 무슨 허준을 봤다고 그래?’라고 뭐라고 그럴 사람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필자는 최근 여기 한국 비디오 가게에서 녹화된 것을 빌려 밀린 진도(?)를 모두 보충했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여기에 아직 출시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 마지막 서너 회 정도는 보지 못했지만 친절한 방송사 인터넷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 줄거리는 대충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도.
서론이 좀 길었다. 필자는 드라마에 비쳐지는 허준의 모습이 실제 역사상의 허준의 모습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겠다. 물론 어의의 자리에까지 오를 정도로 출세를 하고 그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중에서 버티어낸 허준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외골수에 전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에다가 성인에 가까운 순수함을 가진 인물이라고는 참으로 믿기 힘들며, 아마도 처세술에 아주 능한 사람일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필자의 지식과 능력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또 동의보감이라는,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저를 남긴 그 업적을 폄하할 의도도 조금도 없다. (우리 나라 드라마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진풍경은 사극에서 한 인물이 좀 삐딱하게 그려지면 당장에 ‘문중’이 들고일어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논쟁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저, 딱 드라마만 놓고, 다 맞다 치고, 얘기를 해보자.
드라마 속의 허준은 참으로 억세게도 운이 좋다. 손모가지가 잘릴 위기를 넘기는 것은 의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너무나도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드라마가 계속 되어야 하니 손목이 잘릴 수가 없었겠지만) 의술이 무지무지하게 뛰어나서 정말 몇날 며칠 몇시까지 환자가 치유될 것을 정확하게 예측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실 거의 허황된 무협지 수준의 얘기 밖에 안 될 것이다. 환자가 좋아졌다는 전갈이 한 10초만 늦게 당도했으면 허준은 졸지에 억울하게 손 없는 병신이 될 운명이 아니었는가.
필자도 인턴시절 동의보감 소설을 읽으며 책을 놓을 수가 없어 밤을 지샌 적이 있다. 허준이 작두에 손을 넣고서도 양예수의 ‘위를 본적도 없는 놈이 무슨 반위를 고쳐!’하는 호통에 굴하지 않고 그가 보았던 스승 유의태의 위의 형상을 줄줄이 읊어대는 장면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하면 섬뜩한 일이다. 허준의 손목은 그의 손목만이 아니라 필자 자신의 손목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의사의 손모가지를 작두에 넣고 쌍둥 잘라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드라마니까 시청자는 허준은 일단 무조건 ‘착한 사람’이고 기타 유도지 등 허준 잡아먹으려는 일당이 ‘나쁜 놈들’이고, 허준의 성심도 몰라주고 화를 내는 환자 등등은 정말 갑갑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글쎄, 실제 상황이면 어떨까?
필자가 열심히 치료를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환자가 자꾸만 나빠지고 있다면? 필자는 필경 손목을 잘리고야 말 것이다. 드라마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내관이 달려와 ‘멈추시오!’하고 소리를 지르는 일도 안 생길 것이고, 필자가 정말 열심히 환자를 치료했음을 알아주는 시청자들도 없고(시청자들이라면 전화, 팩스, e-mail을 통해 손목을 자르지말라고 열화같은 성원을 보내줄 터인데), 그저 성난 환자 보호자만이 작두를 들고 덤벼들 뿐이다. 환자가 안 좋아지면 의사 손목을 자른다는 법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헌데, 혹시, 혹시 사람들은 그러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필자를 오싹하게 하는 것이다.
환자를 고치려면 자기 손목을 걸고 해야 하는가? 허준 자신의 말대로 ‘의원은 환자를 두고 다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가 틀림없이 고쳐내라는 다짐을 하라고, 안 그러면 치료 안 받겠다고 한다면? 그러면서 일단 약속하고 나서 약속을 못 지키면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면? 내가 허준이라면 치료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다. 내의원 때려치고 만다. 왜 내 손목을 걸고 치료 안 받겠다는 사람을 치료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야만 그가 그토록 되고 싶어하는 심의(心醫)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뭐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없다. 필자 같으면 어쨌든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의사를 붙잡고 물어봐도 네 손목을 걸고 환자를 치료할 수 있냐는 질문에 끄덕거릴 사람은 없다.
필자의 생각에는 허준이 그 지경이 된 것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궁중 사정을 전혀 모르고 그냥 띨빵하게 덫에 걸려든 것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의술을 드라마틱하게 과시해 보이려 위험한 도박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 이 둘중의 하나 뿐이다. 의원의 본분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라… 손목이 잘려도 좋다? 국민들은 감동 먹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무서워서 못 하겠다.
의원으로서 소신에 따라 진료를 하자면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이상하리만치 허준은 그런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갈등이 전혀 없다. 오직 환자를 치료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치 않아서일까? 천출의 굴레를 벗고 양반의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집념에서일까? 옆과 뒤는 전혀 돌아보지 않은 채 코뿔소처럼 앞으로만 돌진하고 있다. 시대가 조선시대이고, 의원은 중인에 불과하며, 장소는 궁중이니 어쩔 수가 없다고? 신분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 때문에 궁중에 남아 있는가? 의서를 보고 좋은 약재를 접하여 실력을 키우고자? 허준의 의술은 내의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내공 충천하는 절정 고수의 경지에 거진 도달한 상태가 아니던가? 그의 필생의 업적인 동의보감의 미덕은 외국의 귀한 약재를 이용한 값비싼 처방보다 우리 산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한 단방 처방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러한 업적은 귀양 생활 동안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동의보감 내용을 실제로 본적은 없습니다. 잘 모르면서 줏어들어 하는 소리이니 틀리면 지적을…) 그러면서 궁중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정말 심의가 되고자 했다면 진작에 때려치우고 낙향했어야 할 일이다.
역시 논리적인 설명은 딱 두 가지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주어진 상황대로 살아가는 것이거나, 아니면 출세하고자 하는 것.
사람들은 지금 같은 때에 허준 같은 의사가 아쉽다고 말을 하지만, 필자는 대한민국의 의사들이 진작부터 모두 허준과 같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의료제도의 심각한 모순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물론 폐업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목이 잘려도 환자는 봐야하니까. 하지만 다른 모든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대한민국 의료제도가 어그러져온 끔찍스런 괴담(?)에 ‘혹시 의사들이 허준 같았었다면?’을 덧붙여보자. (무척 길고 지겨운 괴담이지만 과감히 생략하여 짧게 이야기해보자.)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되면서 진료수가는 당시의 관행 수가의 거의 절반 수준에서 메겨진다. 부족한 재정으로 국민에게 선심을 쓰려는 정치적인 결정에 따른 시행이므로 정부로서는 ‘손 안대고 코 푸는’ 묘안이다. 다행히도(?) 의사들은 이러한 정책에 전혀 반항을 하지 못 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였다. 또, 의사들에게는 아직 비보험 환자들이 있었다. 허준이라면 어찌할까? 그저 열심히 환자 보겠지. 보험, 비보험 환자를 차별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수입은 좀 줄을 것이다.
그런데, 의료보험은 결국 전국민 개보험이 되었다. 이젠 ‘비보험환자’라는 것은 없다. 의사들의 수입은 다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의사들은 역시 반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험급여에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진료항목이나 기술을 들여와 수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가 마진을 통해서 손실분을 보충한다. 리베이트니 하는 소위 ‘검은 돈’도 한몫한다. 허준이라면 물론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그저 소신에 따라 환자를 진료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집안 사정은 더욱 기울게 된다. 다희 아씨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노가다판에 뛰어들 것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겸이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다면서 무단결석과 본드 흡입을 시작한다.
게다가, 허준이 소신에 따라 진료를 하다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친다. 물론 허준은 워낙 의술이 탁월한지라 대충 진맥만 하면 훤히 다 알기는 하지만, 아무리 명의라 한들 잘 모르는 경우도 있고 치료 못 하는 병도 있다. CT라고 하는 신통한 기계가 나와서 사람 몸 속의 단면을 훤히 보여준다는데, 허준이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 것인가. 진맥만으로 진단이 미진하다면 한번 이 신통한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CT 사진 찍은 값을 물어줄 수 없다는 통보가 의료보험공단에서 날아든다. 검사 결과 정상으로 나왔으니 이건 ‘멀쩡한 사람에게 CT를 찍은 것’이라 과잉진료란다. 아니,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미리 다 알면 뭐 하러 찍어보나? 모르니까 알아보려고 찍은 거지.
그뿐이 아니다. 환자에 따라서는 같은 병이라도 병이 오래 가서 보통보다 약을 좀 더 길게 쓰는 경우도 생긴다. 헌데, 여기에도 가차없이 돈을 못 물어준다는 전갈이 돌아온다. 의료보험 규정집에 나온 것 이상으로 쓰면 삭감이다. 분하고 속상하지만 어쩌나. 환자는 그래도 치료하고 봐야지.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필요한 만큼 약을 쓴다. 도저히 여건이 안 되면 환자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받아 환자 본인 부담으로 약을 쓴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과잉 진료를 했으니 보험공단에 청구한 것을 삭감하는 것은 물론이고 환자에게 양해를 받고 약을 쓴 것까지 환자에게 다시 물어주어야 한단다. 언론에서는 ‘의원들, 부당 과잉 진료한다’고 떠든다. 분통이 터지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의원의 본분이므로 어쩔 수 없이 참는다.
한편, 의사의 수가 부족하고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 문턱이 높던 초창기에는 약사들이 환자를 진료하고 나름대로 약을 처방하면서 사실상 의사 노릇을 하였고 이 편이 비용이 훨씬 쌌으므로 국민들은 이를 선호하게 되었다. 전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으면서 병원 문턱은 낮아졌지만 그저 약국에 가서 약을 사먹는 관행은 그대로 남게 된다. 사실상 의사의 처방에 따라 조제하는 것이 원래 역할인 약사들은 자신들이 사실상 의사나 마찬가지로 진료하고 처방하는 것에 대해 당연시하게 된다. 허준은 의술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약사들이 사실상 진료행위를 하는 것을 개탄하기는 하지만, 역시 의원의 본분은 환자를 보는 것이므로 나서지 않고 그저 환자 진료에 성심을 다한다. 내가 열심히 환자를 보다보면 환자들이 언젠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허준이 정말로, 진정 심의라면, 아마도, 아마도, 이쯤에서 그는 의원문을 닫고 부당한 정책과 잘못되어 가고 있는 의료체계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을 것이다. 아니, 더 일찍 시작하였을지도 모른다. 환자를 고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라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라면, 자기의 그 소중한 소신을 그토록 억압하는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자 항거하는 데에도 목숨을 기꺼이 걸었을 것이다.
의료보험 초창기부터 잘못 끼워지기 시작한 단추에 의사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저 빈틈을 찾아 각자 제 살길을 찾기에 정신이 없다가, 이제 와서 이도 저도 안 되는 정말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겨우 정신을 차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비판이야말로 의사들이 가장 뼈아프게 들어야만 할 이야기일 것이다. 의사들의 원죄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의사들이 진작에 이렇게 싸웠었다면 오늘의 폐업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사회야 어떻게 돌아가든 환자만 열심히 보면 그만인가? 그것이 심의인가? 사회가, 의료제도가, 환자를 제대로 진료하는데 얼마나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것인지를 모른다면 그것이 진정 심의일 것인가?
국민들은 의사가 환자들을 버렸다고 아우성을 해대지만, 필자는 오히려 이제야 겨우 의사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는 생각이다. 진작에 이러지 못 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진작에 의사들이 가만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였더라면 어쩌면, (어쩌면이다) 폐업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너무 늦게, 9회말 투아웃 볼카운트 투쓰리에 시작한 몹시도 힘겨운 싸움이지만, 이제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 절대로 ‘세상 돌아가는 것은 내 알 바 아니고, 환자만 잘 보면 그만이지’라는 태도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필자가 위에서 했던 말을 취소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은 맞는 말이다. 의사들이 정말 허준과 같았다면 오늘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가 드라마 안에서와 같이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건 그저 환자 보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고, 의료제도가, 나아가서는 온 사회가 올곧게 서지 않고서는 국민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진작에 깨닫고 어그러지는 의료제도를 바로잡고자 치열하게 싸워온 진정한 심의(心醫)라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 6. 30.